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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의 가장 큰 관심은 사람이었다.'안병무 선생의 평생지기 홍창의 장로 인터뷰
편집부 | 승인 2013.08.08 16:58

본지는 심원 안병무 기념사업회와 함께 안병무 선생이 1951년 창간했던 계간지 야성(野聲)을 웹진으로 복원해 웹진 야성을 출간 중에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나와 안병무’, ‘나와 민중신학’이라는 주제로 심원 안병무 선생과 함께 했던 지인들의 글과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본지는 그 두 번째 순서로 심원 안병무 선생과 평생지기였던 향린교회 홍창의 장로와의 만남을 통해 안병무 선생과의 인연과 그들의 삶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 내용을 인터뷰 기사로 옮깁니다.


20대 초반 청춘시절 기독학생운동의 인연으로 만나 안병무 선생이 임종할 때 까지 평생지기로 그와 함께해온 홍창의 장로를 만났다. 그는 안선생과 함께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은 향린교회의 설립자 중 한사람이자 그의 부인과 더불어 지금까지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향린 창립 멤버이다.

   
▲ 향린교회 설립멤버이자 원로장로인 홍창의 장로ⓒ에큐메니안
서울대 기독학생회 활동을 인연으로 한평생 안병무 선생과 더불어 교회 안에서의 대안적인 신앙운동을 펼치고자 노력했던 홍 장로는 의사이자 교수로서 자신의 영역에서 또 교회 밖에서도 한결같은 일생을 살아왔다. 1947년 의대졸업 이후 서울대병원에서 환자를 돌봤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소아과학 교과서를 6종이나 써냈고 1980년 서울대병원장 재직시절 그의 제안으로 어린이병원을 기공하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 시기 결성된 인도주의실천의사협회 초대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6.15선언 이후 남북 간의 교류가 활발하던 시기 홍 장로는 2008년 10월 24일소아전문병원인 ‘평양 어깨동무 소아병동’을 완공하는데 산파역할을 하기도 했다.

본지는 안병무 선생과 함께 신앙동지로 일신회를 조직하고 기독교 각성운동의 일환으로 야성을 발간하고 공동체를 일구고자 노력했던 홍창의 장로를 만나 그와 안병무 선생의 삶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 향린교회 원로장로인 홍창의 장로. 본지는 지난 6월 11일 오후 용산구에 위치한 홍 장로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에큐메니안
장로님 건강과 근황은 어떠신지요.

올해로 나이가 90인데 다행히 어디 아픈 데는 없다. 집사람도 90세인데 다행히 둘 다 건강하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사용하시는데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오래전부터 사용해 와서 지금도 어려움 없이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어떠했습니까?

고향은 황해도 황주다. 그 지역은 사과로 유명했고 군청소재지였다. 나는 그곳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긴 골’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분지였는데 그 마을 언덕에 교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1학년까지 학교에 다녔고 이후 아버님이 얼마 떨어진 곳으로 옮기게 되면서 이사하게 됐다.

할아버지가 장로셨다. 과거급제를 하셨지만 한일병탄이 되면서 시골로 돌아오게 되었다. 기린찰방(벼슬)으로 계시다가 고향인 긴골로 돌아와 그 교회 장로가 되셨다. 이후 아버지도 그 교회에서 장로가 되셨다.

 

해방, 격변기와중에 만난 인연

할아버지는 한학을 하셨는데 고향에 오신 뒤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셨다. 나도 그 인연으로 숭실중학교에 가게 됐다. 그러나 내가 숭실중 3학년 때 일제에 의해 일본학생과 한국학생이 함께 교육받는 평양 제3공립중학교로 변경됐다. 당시 숭실중에는 목사, 장로 자제나 신앙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익환, 문동환, 윤동주, 장준하 선생 등도 나의 선배로 숭실중학을 다녔다. 숭실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해방되는 해 5월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전학을 오게된 후 경성제대가 서울대로 변경되어 졸업은 서울대학교에서 하게 된 것이다.

해방이 되면서 한국에 돌아오니 일본에서 여러 대학을 다니던 학생들이 경성제국대학에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고 그곳에서 안병무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대학시절 일신회 활동을 통해 안병무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병무 선생님과의 첫 만남과 인연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방 후에 기독학생회라는 것이 있었다. 문리대, 의대 등 단과 대학별로 있었다. 그것을 합해서 전체 기독학생회로 모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안병무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중에 친한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처음에 20명이 모였고 나중에는 12명 정도가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그 모임이 일신회가 된 것이다. 일신회를 처음 만든 때는 서울대학교로 바뀐 뒤였다.

일신회 회원 중 상당수가 현재 기장교단의 신암교회 출신이었다. 일신회는 한 달에 한번 모여 예배와 독서모임을 진행했다. 문리대 기독학생회 회장인 안 선생은 그 때 이미 교회에서 활동을 할 때였다. 말도 잘하고 다정다감하며 접근성이 좋았다. 안 선생은 이후 연합기독학생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일신회에서 주로 했던 활동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기도회와 예배, 독서모임을 주로 했다. 회원인 곽상수 선생의 집이 돈암동에 있었는데 그 곳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모임 때마다 원서를 먹지에 눌러써 나눠 독서회를 진행했다. 한 달에 한번 모일 때마다 시간을 엄격히 했다. 시간 지나면 문 닫고 ‘이제는 늦었다. 바깥에서 슬피 울 일이 있으리라’라는 성구를 적어 놓는 등 모이는데 시간엄수를 중히 여겼고 회원들도 성실히 모임에 임했다.

해방이후 혼란했던 시기였는데 일신회가 관심 가졌던 분야는 무엇이었습니까?

경제나 사회보다는 순수한 신학서적을 공부했다. 영문으로 된 신학서적을 보기도 했다. 해방직후에는 좌익사상을 공부하는 학생모임이 많았고 좌우익간의 헤게모니싸움이 심했다. 그래서 학생회하면 보통 좌익사상이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학생회는 올바른 가치나 정의에 대한 것은 그들과 같았지만 사회주의와는 달랐다. 기독학생회는 좌익의 공산주의와는 선을 그었고 때론 그들과 맞서기도 했다.


야성(野性)은 민중의 소리

일신회 모임이후 야성을 창간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신회모임이 계속 된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수련회로 자하문 근처 수도회에 수련회로 모였다. 그 곳에서 ‘이 시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기도하며 의논했다. ‘여러 가지 전공이가 다른 이들이 모여 있는데, 좋은 우정, 신앙의 동지로 모였는데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심각히 고민하고 기도하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서울시내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어떤 부인으로부터 전쟁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그때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한 후 산을 내려와 기약도 없이 뿔뿔이 헤어졌다. 그게 1950년 6월 25일이었다. 그렇게 해방 후 1년이 지난 때인 1946년 일신회가 조직되었고 한국전쟁이 나면서 흩어지게 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후 서로 연락을 못하고 피난을 가게 되었다. 장하구 선생은 대구로 갔고 이영환 선생은 전주 적십자병원 원장으로 나는 서울대병원이 제주 한림으로 피난을 갔을 때 같이 제주로 내려갔다. 제주한림에 구호병원을 만들었다.

제주에 있을 때 안병무 선생을 제주로 초청을 해 부흥회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제주에 가기가 매우 힘든 때였는데 안 선생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온종일 걸려 한림에 온 것이다. 와서 대성황리에 부흥회를 마쳤다. 부흥회가 열린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안 선생의 설교를 듣고 ‘이런 설교는 1년에 한번 정도 할 만 한 강연’이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그때 안선생과의 우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사건이었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금방 오지만 며칠을 걸려 제주에 왔다는 것이 우정을 절실히 느꼈다.

제주에서 안선생은 나에게 전주로 모이자고 제안했고 그 후 전주 적십자병원 원장인 이영환 선생으로인해 자연스럽게 전주로 모이게 되었다. 그 후 전주에 있는 교회에서 일신회 회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야성은 이 시기 창간되었고 안 선생이 부산을 오가며 인쇄와 출판을 했다.

   
▲ 1951년 11월 첫 발간된 야성1호의 표지ⓒ에큐메니안

당시 야성출판의 목적과 의의는 무엇이었습니까?

기성교회에 대한 실망이었다. 전쟁와중인데도 교회는 교파싸움에 매몰되어 있었다. 백성들은 교회에 위로의 목소리를 바랬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일신회는 ‘이래서 교회가 되겠느냐?’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신앙인이다.’ 라는 모범적 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야성(野性)은 말 그대로 들에서 부르짖는 소리였다. 안병무 선생이 제안해 야성 발간이 시작됐다. 전쟁 중에 갈망했던 바, ‘교회가 이렇게 사는 것이 교회다.’라는 것을 보여주자는 제안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광야에서 들리는 소리’ 학자의 소리, 교파의 소리가 아닌 광야의 소리, 민중의 소리를 담고자 했다. 야성은 일신회 동지들의 삶의 기록. 간증. 우리 자신들의 신앙 간증의 기록이다.


교파싸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당시 장로교내 고신파 문제와 김재준 목사 출교와 관련 된 내홍 등 많은 분란이 있었다.


순수 신앙공동체로 모인 향린동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1953년 5월) 향린교회를 창립하셨는데요. 그 배경과 목표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신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향린교회를 창립했다. 향린동산에서 일신회 회원들이 살고 있었고 바깥에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해 5월에 향린교회 창립을 하게 되었다.

   
▲ 홍창의 장로가 향린동산 시절의 생활모습을 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에큐메니안
향린동산이 처음 시작된 장소는 현재 중국 대사관이 있는 터였다. 일제 강점기 때 고급요정이었고 한국전쟁 때는 전쟁고아를 돌보던 고아원이었던 곳을 우리가 인수해 함께 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공동체라기보다는 일신회 멤버들이 함께 살면서 신앙과 생활을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이후 아침마다 기도회를 하고 주 당번을 정해놓고 일기도 쓰고 공동체 생활을 해갔다. 정형화된 공동체 생활은 아니었다. 당시 안 선생을 제외하고는 다 결혼 한 상태에서 함께 살았다. 그렇게 서로의 일정을 공유하고 일기장을 만들고 돌아가며 당번을 정해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향린교회의 처음 시작은 일신회라고 봐도 될까요?

일신회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시작한 향린교회는 창립한 1953년 12월에는 100명이 넘게 모이기 시작했다. 향린동산에서의 삶이 시작되면서 신암교회를 다니던 일신회 회원인 이영환, 장하구, 이종완 선생들이 향린교회로 오게 되었다.


향린교회 창립이후 지금까지의 몇 차례 변화를 겪게 되는데요.(평신도교회, 기장가입, 담임목사의 변화 등)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처음에는 목사도 신학한 사람도 없이 시작했다. 교파를 부인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교파싸움이 심했다. 그러한 싸움에 휘말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서 교단에 가입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독립교회로 시작한 것이다. 차차 교파싸움이 정리되면서 다른 교회하고 연대하기위해서는 교파에 들어갈 필요성을 느껴 기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기장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의 신앙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진보적이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한 교단을 기장으로 판단했다.

향린교회의 처음의 정신은 '올바른 교회를 우리의 신앙과 삶으로 체현해 내는 것'이었다. 단지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였지 무교회주의는 아니었다. 문제는 교파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중에 판단을 하게 된 것뿐이다.

목사님을 청빙하지 않은 이유는 애초에 '모두가 목회자 역할을 하자'는 취지 때문이었다. ‘교인 하나하나가 목회자와 같은 생각을 갖고 평신도가 목회자 같은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교회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평신도교회를 지향해왔는데 각자 직업을 갖고 그 안에서의 역할이 커져가다 보니 그러한 삶을 지속하기 힘든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 또한 의과대학 교수로 책임이 무거워져갔다. 그러다보니 처음의 생각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실제로 부흥이 잘 안 되었다. 한계에 봉착했다.

가정이나 개인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돌볼 사람, 즉 목회자의 존재가 필요함이 제기 되었다. 오히려 무책임한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것보다 교인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목회자를 모시자고 의견을 모아 첫 담임 목사로 김호식 목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 ⓒ에큐메니안

현재 한국교회를 어떻게 진단하고 계십니까?

대교회주의가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폐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으로 끝이고 사는 것은 일반사람과 다름없는 그런 교회의 교인들은 편리하다.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성가를 듣고 마음을 위로해 주는 설교를 듣고 이후 자기 하고픈 대로 살고... 이런 식으로 교인들이 늘어나는 대교회주의가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공동체의식도 없어지고, 교회 장로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런 교회가 교회인가. 적은 수가 모여야 공동체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친하고 서로의 사정을 알아야 공동체의식도 생기고 즐거움도 슬픔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커서는 안 된다. 100명 내외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교인수가 적을수록 다정히 정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향린교회의 분가선교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가득 찼던 사람

안병무 선생님과 평생 신앙동지로 살아오셨습니다. 안 선생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안병무 선생과는 둘도 없는 친구로 살아왔다. 그의 신학보다는 인간적인 면, 우정을 보게 된다. 그를 생각하면 정을 느낀다. 누구나 안 선생을 찾아가면 다정하게 대해주는 모습이 기억난다. 훗날 서로 바빠 만나는 횟수가 적어졌지만 초창기 젊은 시절 다정한 친구로 만나는 그것이 내게는 제일 귀중한 것이다. 안 선생은 인간적으로 정이 많았던 반면 불의를 용납 않는 정의감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소유했던 사람이었다.

안병무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입니까?

나는 안 선생의 임종을 지켜봤다. 마지막으로 가족과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인공적인 생명연장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 후 돌아가셨다.

안병무 선생의 가장 큰 관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었다. 만나서 인간적으로 정이 오고가는 인간성. 안 선생은 사람을 만나서 대화할 때 인간다운 면이 있었다. 상담하는 사람의 심정을 잘 파악해 인도해서 해결을 해주기도 했다. 결국은 그것이 목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인간성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 안 선생은 인간성과 정의감을 함께 가지고 있고 부드러운 인간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지적인 판단력이 합쳐져 올바른 사회를 만들고 지도하는 알맞은 소양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것은 목회와도 연관되는 점이다. 안 선생은 일신회 활동 전에도 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설교하면 신자들이 감동을 받았다. 사람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사랑, 좋은 언변과 내용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마 신학적으로도 위대한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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