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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가 본 예수 - 삶의 자세와 십자가의 의미서울대학교 우희종(5월19일 한국 기독자 ·불자 학술회 발제 전문)
장익성 기자 | 승인 2006.05.20 00:00

지구의 여러 곳을 보편적으로 두루 비춰 산천초목에 생기를 주는 태양은 지구상의 여러 민족으로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내 집안만을 비춰주는 촛불은 나에게는 무척 소중하겠지만 결코 다른 이의 집을 밝혀주지 못하는 자그마한 빛일 뿐이다. 보편적인 진리라면 그 진리는 우리의 얼굴 수만큼이나 많은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I. 들어가며.

우리 사회도 종교 다원주의적 입장에 익숙해지면서 이미 많은 글이 종교 간의 공통 기반에 대하여 이야기되어 왔다. 그런 면에서 불교와 기독교 간의 대화에 있어서도 어떻게 보면 이미 새로울 것도 없을 정도로 많은 논의가 진행되어 왔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각 종교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받아들여 더욱 완고하게 자신만의 입장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이제 다중(多衆)의 소통 양식마저 논의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소통이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누그러뜨려 준다는 의미와 더불어 그 어떤 종교이건 인류에게 보편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면 그 종교적 형태를 떠나 그 가르침의 메시지는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단순한 상대적 다원주의 입장에서 보이는 종족중심적인 접근은 아닐 것이 전제하여야 한다. 

동일한 붓다의 가르침도 지역과 문화를 달리 했을 때 처한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의 불교로 전해져 온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불교와 기독교가 2,000년 이상 각자의 전통 속에서 나름대로의 종교적 형식과 전통을 지니며 내려왔다는 것은 많은 점에서 두 종교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종교의 참 뜻이 소외된 삶 속의 인간을 진리 안에서의 삶으로 인도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두 종교의 공통된 기반을 신학적 입장이 아니라 일반인의 시선으로, 그것도 타 종교인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바라보는 것도 단순한 종교 간의 대화를 넘어 서로가 믿고 있는 종교적 메시지 안에서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방법이 될 수도 있으며, 또한 그것은 어떻게 각자의 삶을 바꾸어 우리 스스로의 삶 속에 반영되어야만 하는가를 다시 생각 보는 계기가 될 듯싶다.

그런 면에서 칼 바르트는 비록 '존재의 유비'와 '신앙의 유비'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유사성이 없다고 말하였지만 그 역시 근대적 사고체계의 종말과 더불어 포스트모던 사고체계의 태동을 가져왔다고 볼 때, 종교 다원주의적 접근으로 불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한 인류 공통선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발해 질 것이며, 이러한 흐름은 신학자들의 연구 논문의 수준을 넘어 이미 일반인 대상의 서적으로도 널리 유포되고 있다.

불경과 성경의 자구를 직접 비교하며 그 유사성을 지적한 글도 있고 두 종교의 개념과 교리의 비교, 붓다와 예수라는 두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에 중심을 두고 이야기한 글도 있다. 또한 기독교 사상과 대승 불교의 하나인 선(禪) 사상과의 비교를 시도한 글도 이미 많이 접할 수 있으며, 기독교의 입장에서도 진리에 대한 선의 입장과 거의 유사한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도 그 입장과 태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외경과 더불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 그물처럼 얽혀있는 연기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라는 것이며, 이 점에 대하여 항상 깨어있음으로 해서 생과 사를 포함하여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아 자비로서 그들과 함께하라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자 사랑인 하느님만이 오직 생사를 넘어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음을 믿어 거듭 태어남으로서 진리 속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그 진리를 이웃과 나누며 살라는 것이다.

두 스승의 가르침 모두 진리란 무엇이며, 이러한 진리에 대한 수용과 더불어 그 안에서의 개인의 삶 및 이웃에 대한 자세를 말하고 있다.

본인 역시 불경과 성경, 양 쪽 모두 진리의 말씀임을 확신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종교에서의 가르침은 그 유사성과 차이점을 떠나 결국 그 종교를 접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체화되고 발현되어 그 사람의 삶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와 불교에서의 메시지는 결국 경전 속에서의 예수와 붓다의 삶의 자세로서의 이야기될 것이며, 그것은 예수나 붓다가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의 말을 뒷받침하지 못했다면(요한 10:38) 이천년이 넘는 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결코 그들이 길(道)이자, 진리요, 생명이라고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과 불경을 통해 나타난 삶의 지표로서의 예수와 붓다의 위대성은 그들의 삶 속에서 재확인됨으로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고 이 글에서는 붓다와 예수의 공통된 삶의 자세를 간략히 언급하고 그러한 삶의 원형(prototype)을 통해 예수가 우리에게 전하고자하는 의미와 이에 수반되는 우리의 책임에 대하여 나누고자한다.

물론 단편적인 글로서 이러한 위대한 스승들의 삶을 상세히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신학을 전공한 입장도 아니며 불교적 인식에 익숙한 저자 개인의 해석이기에 이 글은 어쩌면 글쓴이의 삶에 반영이 된 예수와 붓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적 해석은 창조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과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하다기보다는 서로 유사한 것만이 차이를 지닐 수 있다는 입장에서 진리의 화현으로서의 예수와 그의 삶의 궤적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건을 통한 진정한 예수의 위대성과 그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II. 이야기들

1. 진리로서의 예수와 붓다

예수는 스스로 자신이 길(道)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선포한다. 붓다 역시 자신은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깨어있는 자(覺者)가 되었으며 그가 말하는 것은 진리로서의 다르마(dharma)이고, 이를 통해 생사의 문제를 극복했으며 삶의 자세로서 깨어있음과 더불어 자비를 이야기한다.

물론 진리를 깨친 인간으로서의 붓다에 비해 예수는 진리 그 자체가 좀 더 인격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뜻의 전달과 공유라는 것은 그 지방의 전통과 문화에 의존해서 그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와 표현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당시 여호와라는 인격신을 지닌 유태교의 전통 속에 있던 중동지방에서 진리 자체가 인자로서의 예수라는 인격적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져 하느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된다 (창세 2:7). 그러나 이 땅에 온 예수의 관심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영성이었으며(요한 14:20) 그것은 결코 사망에 이르지 않고 생사를 초월한 진리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붓다가 강조한 것도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육체가 아니라 본래의 자기 모습이며, 이러한 중생의 본래면목은 결코 생사에 물들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육체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나 이러한 육체는 깨달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영혼이 담겨져 있는 성전이며 (고전 3:16), 불교에서도 자성이라 불리는 참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집으로서 인식되어있다. 그런 맥락에서 두 종교 모두 역시 인간의 몸을 이루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며 선택된 상태임을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에서의 영성은 무자성(無自性)이 곧 자성이라며 구체적 실체를 부정하는 불교와 뉘앙스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진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인격적 모습의 하느님으로 말하는 기독교와 연기적 관계성으로 말하는 불교에 있어서의 진리에 대한 표현 방식의 차이라고 보며, 이러한 관점의 근거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성경의 표현과 더불어 진리가 무엇이냐는 직접적 질문에 대하여 오직 침묵으로서 대답함으로서 진리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칭송받은 유마거사의
 모습과 더불어 빌라도로부터 동일한 질문을 거듭 받은 예수가 최종적으로 침묵으로 대답하는 모습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밝힌 예수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것은 그의 삶이 자신의 말을 증거 하기 때문이다. 예수 이름, Jesus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힘을 갖게 되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이름으로 구하면 시행될 것이라는 성경 말씀(요한 14:14)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힘을 스스로 선택하는 삶의 모습으로 자신의 말을 증거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권능을 각인시킨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삶에 대하여 절대적 믿음으로 그를 진리의 발현인 그리스도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the ground of being)이라고 받아들이는 용기를 지닌 이들에게는 죽음을 뛰어넘는 구원이 약속된다.

한편, 붓다 역시 모든 세속의 영광이 약속된 자리를 떠나 고통스런 고행의 시기를 지나 중도의 길을 찾아 이윽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대자유와 평화를 맛보며 생과 사를 뛰어넘는 다르마를 보여주기 위하여 청정한 승가를 만들어 진리를 전하며 제자들과 일평생 길 위에서 전도하다 생을 마감한다. 최소한 표면적으로 평안하게 보이는 붓다의 삶은 예수가 걸은 형극의 삶과 분명 다르지만 붓다는 이러한 자신의 삶의 모습을 통해 진리에 의지해 생사를 뛰어넘고자 하는 이들에게 궁극적인 무여열반의 길을 제시하는 또 다른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들이 그들의 삶 그 자체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 주려 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고, 더 나아가 같은 진리의 길을 보여준 두 위대한 스승의 삶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달라야 하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두 스승의 동질성과 더불어 같지만 같지 않은 각자의 고유성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2. 진리란 관계이다

우선 이들의 가르침은 모두 영어의 종교란 말의 어원이 보여주듯 왜곡된 관계의 복원이자 회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는 에덴에서 쫓겨나 하느님과 단절된 인간을 진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함으로서 인간의 기원(起源)이자 본래 모습이기도 한 하느님과의 관계 복원을 이루게 한다. 그 결과 원죄(原罪)에 의해 생명과 단절되어 흙으로 돌아갈 인간은 진리이자 생명의 근원으로 인도되어 생사를 뛰어넘어 영생을 얻게 된다.

한편 붓다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체 없이 단지 거미줄 망과 같은 관계로 이루어져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주이멸(生住離滅)을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라는 연기법을
 통찰함으로서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관계로서 상의상존하고 있으며, 자연스러운 흐름으로서의 관계성 속에서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아름다운 하늘나라인 화엄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개인적 체험을 통해 이러한 연기적 모습을 자각함으로서 그동안 무명(無明)이라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왜곡되거나 단절된 세상과의 관계로부터 벗어나 죽음마저 뛰어 넘는 해탈의 세계로 가게 한다.

세상의 연기적 관계에 철저히 깨달아 항상 깨어있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어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기에 이기와 독선의 삶은 더 이상 각자의 삶을 규정하지 못하고, 진리 안에서 거듭 태어남으로 이타적 사랑과 생명 속에 거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이들의 삶은 나눔의 삶이자 자유와 평화로움 속에 자리 잡는다.

이러한 면에서 원죄와 무명으로 인하여 왜곡되고 소외된 관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진리와의 본래의 관계를 회복하였을 때 사랑과 자비의 삶이 드러나게 되며, 결국 인류의 위대한 두 스승은 모두 관계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게 되는 단절되고 소외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며 나눔의 일생을 살았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3. 주체적이고 능동적 인간의 몫

그러나 중요한 점으로서 예수님과 붓다는 매우 강력한 힘으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전하고 있지만 결코 그러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그들이 지닌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하고 보여주어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받아들여 변화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따라서 남은 인간의 몫이란 그러한 무한한 사랑을 스스로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삶이 변화하고 주위의 타인과 그러한 사랑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요한 14:12, 로마 13:8). 

이렇게 강요하지 않으며 진리의 수용에 있어서 듣는 이의 몫을 남겨둘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판단하여 차별하는 자는 스스로 지닌 기준에 의해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하며, 또한 타인을 판단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나 관점의 기준 속에 상대를 집어넣고서 옳다 그르다 규정지어 분별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대에 대한 ‘월권’이 된다. 또한 그러한 월권을 상대에게 표현하여 상대를 변화시켜 보겠다는 적극적 간섭의 마음은 ‘오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면에서 그것이 아무리 좋다한 들 자신의 틀을 강요하는 오만한 이들은 서로 상의상존하는 관계라는 것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같이 변화해 가는’ 것임을 망각하고 상대방의 변화만을 고집하면서 자신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설령 그 오만의 기준이 성경이나 불경에 나오는 사랑이나 자비라 할지라도 성숙한 이라면 오직 문을 두드릴지언정 문은 여는 것은 상대의 몫이요, 물가에 데려갈지언정 물을 마시는 것은 상대의 몫임을 명확히 아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문을 열거나 물을 마시는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없는 우리 자신만의 몫이요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 앞에 결코 나태할 수없는 엄숙한 삶의 자세가 요구됨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서로 변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진리란 결코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이나 강압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양측의 몫이 중요한 것이다(마태 13장).

이렇듯 말씀을 듣는 이들의 몫은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음과 더불어 그러한 각자의 몫이야말로 진정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은 예수가 보여주는 많은 이적의 모습에서 잘 나타나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이적이 일어날 때 결코 예수 혼자만의 의지가 아니라 ‘너의 믿음이...’ ‘네가 원하는 바...’ ‘네 소원대로’ 등의 표현이 수반되는 것처럼 말씀을 듣는 자의 몫이 언제나 강조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적극적이고 능동적 믿음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하되 그 안에 피동적으로 머무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마태 7:7). 우리의 믿음이 적극적이고 살아있을 때 예수님마저 당신 스스로의 생각마저 바꾼다. 예수는 그러한 믿음을 큰 믿음이라 일컫는다 (마태 15:28).

이러한 점에서 성숙한 관계란 것은 서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자신의 시각에서만 노력하지 않으며 (노력하는 순간 월권과 오만이 작용하여 고통을 낳는다), 상대의 모습 그대로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양쪽 모두 자연스럽게 ‘스스로’ 변화해 가는 것이며, 상대방의 모양새에 따라 각자가 ‘자신’의 모양새도 능동적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관계 속에서 ‘항상 자신을 되돌아 볼 때’ 가능하다. 누구나 뿌린 데로 거둔다는 연기적 인과관계 속에서 존재란 존재함으로서 이미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니며, 그 책임은 배려로서 나타나게 되며 배려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옛 기록에 보면 ‘깨달음이란 별 것 아니다. 배려일 뿐이다’라고까지 말한 선사(禪師)도 있다.

한편, 배려는 삶의 주인된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즉,  관계 속에서 주체적인 자가 배려할 수 있다. 진정한 배려는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기에 옛 선사는 그것이 곧 도(道)라고 말했으며(至道無難 唯嫌揀擇), 공자가 70살이나 되어 알았다고 하는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역시 주체적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역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 말씀과도 유사하다.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마음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거두어들이는 것 또한 자유롭게 하여 주인 되어 살아간다는 의미이기에, 진정한 자유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 틀을 깨어 없애거나 벗어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틀 속에 있더라도 그것의 실체 없음을 알아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예수가 수난을 받으면서도 누구를 원망하기 보다는 지극히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떤 틀 속에 있었어도 언제나 진리 속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삶의 주인 되기는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지만 예수 역시 우리의 몫을 강조하면서 삶의 주인 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마태복음 20장에서의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는 인과적 관계 속에서 각자의 몫이 있음과 더불어 주어진 것에 감사해야 함(知足)을 언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고통과 번민(무명)의 모습과 더불어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주인된 자의 자세와 길들여진 자의 삶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며 자신이 주인 되지 못하고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안의 어리석음이다.

부처님 경전 중에서도 '만족할 줄을 안다'라는 뜻의 지족(知足)이나 소욕지족(小欲知足)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세상에서 다양한 각자의 모습으로 변화하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생명체 하나하나가 서로의 차이(差異)를 차별(差別)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모습 그대로 보아 줄 수 있어 지금 이 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모습 그대로 온전함을 알아 (완전함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에 대하여, 범사에 대하여,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지족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일상적 삶 속에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지족(知足)하다면 이미 그의 마음에는 평화와 자유로움이 가득할 수 있고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이니 하늘나라의 행복은 이렇듯 지금 이 순간 여기를 자족(自足)할 수 있는 사람에게 약속되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우리가 이렇듯 스스로 만족하며 지금 여기에서의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그의 자유와 평화는 의도하지 않아도 성경과 화엄경의 말씀처럼 자연스럽게 각자의 모양새 데로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한편, 관계에서 배려한다는 것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상대를 염두에 두며 대하는 것이기에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나누어 주는 셈이다. 상대에게 마음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상대를 위해 즐겁게 자신의 마음을 거두어들일 수도 있음’이다. 자신의 마음을 내었다가도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 한번 일으킨 스스로의 마음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의 주인이 되어 사는 자의 참 모습이자 그것이 바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한다.

연기적 삶이란 관계 속에서 주체적으로 배려하는 자만이 그 관계를 통하여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우리는 배려를 할 때 상대의 모습을 통해 내가 변하고, 또 상대는 나의 모습을 통해 변화함으로서 서로 상대방에 맞추어 같이 변화하니 그 결과 서로 어우러지는 모습이 저절로 된다. 예수는 결코 우리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을 받아들여 피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진리와 생명을 구하는 자세를 요구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십자가상에서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4. 소망과 기다림의 자세

한편, 예수는 믿음과 사랑을 말하면서 소망을 이야기하였다. 분명 믿음으로 생명-진리/도(道)-를 얻는다. 하지만 그 믿음이 사랑/자비로 나타나는 생명으로 꽃피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그 안에 갇힌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는 고린도 전서의 말씀과 (고전 13:13) 함께 믿음이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소망(所望)임을 말하고 있다 (고전 13:7).

그런데 믿음을 부패하지 않게 하며, 그 무엇에도 머무르지 않게 하는 힘이 소망이건만, 불교건 기독교이건 모든 것의 바탕으로서의 믿음과 최종 꽃으로서의 사랑/자비를 말할 때에 비하여 비교적 이러한 소망에 대해서는 언급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예수가 말한 소망이란 과연 단순한 희망을 말하는 것일까(누가 12:36). 붓다는 우리에게 믿음에 의한 간절한 구도의 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기독교에서의 소망이란 단순히 내세를 기다리며 지금 이 자리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희망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예수와 붓다가 말하는 소망이란 것은 그것은 길게 참음이요, 오랜 기다림이며, 간절한 기다림이다.

그러한 기다림이란 어떠한 기다림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보살의 간절한 서원(誓願)은 본디 무원(無願)의 서원인 것처럼 예수의 소망이란 내세를 기다리며 현재 이 자리를 희생하는 그러한 희망이 아니라 항상 깨어있어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금 이 자리에 충실함 외에 다름 아니다.

생명이란 본래 면목은 지금 이 자리를 떠나 어디 먼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 안에 있는 본래 모습(영성)을 향하여 항상 지금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이 우리 각자의 기다림의 자세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다림의 자세를 통해 구원을 얻으며, 하늘나라가 이미 임해있을 알게 된다. 소망이란 간절한 기다림으로서의 과정이고 믿음이 사랑으로 꽃피우기 위한 실천의 자세이기도 하기에 일상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결국 예수가 우리에게 기다림의 자세를 항상 묻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몫으로서 간절한 기다림을 지니고 있는가? 이미 값없이 주어진 이 은총 속에서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 충분히 말씀 들었음에도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즉시 부처가 되지 못하고 하늘나라가 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경우 잘 들여다보면 많은 이들이 간절하고 절실함을 지닌 기다림의 자세가 없음을 본다. 소망(所望)의 자세가 없기에 자신들의 믿음이 그리 깊어 산을 옮길 정도라 하여도 여전히 흐르는 너와 나, 이웃과 중생의 눈물을 닦지 못하고 자신의 믿음이나 깨달음 속에 갇혀/머물러 있는 듯하다.

제자들에게 그토록 자주 강조했듯이 예수는 우리 각 개인에 있어서 깨어있는 기다림의 자세를 무엇보다도 요구하고 있다 (마태 24:42, 마가 13:35, 누가 21:36). 깨어있음으로 기다림을 이루어 각자의 몫으로서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는 한(요한 21:22-23) 그 무엇을 하더라도 머물러 죽은 믿음이 된다. 머무르지 않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다림의 자세야말로 믿음, 소망, 사랑이 결코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 항상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깨어있는 자의 행복이 약속된다.

5. 관계 속의 예수

      1) 경계인

한편, 관계 속에서 배려하며 서로 변화하는 것이 온전함 모습이라면 우리에게 삶의 원형을 보여준 예수가 그러한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하여 어떠한 자세로 스스로의 삶을 살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인간의 몸을 지니고 진리와 하나 된 자는 인간의 세속적 사실의 세계와 진실의 세계,
 양쪽 모두를 알고 있기에 경계인(boundary-crosser)이 될 수밖에 없다. 붓다는 무여열반 상락아정의 세계와 화택으로 비유되는 사바세계와의 경계인으로 자리 잡게 되며, 예수는 역시 요한으로부터 하늘나라와 인간의 경계에서 두 세계를 이어주는 경계인으로 이야기된다(요한 1:34).

예수는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깨어있음 속에서 인간들의 삶을 지극히 가볍게 하는 제도나 규율, 도덕 등과 같은 우리 시대의 클리셰(cliché)를 다시 해석하여 항상 인간의 삶이 기본이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예수는 당시 선민사상에 물들어 있던 유태인에게 강력히 그 경계를 허물어 이방인들과도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인간 평등의 메시지를 던졌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비폭력주의로 성인으로까지 일컬어지던 마하트마 간디마저도 부정하지 않고 수용했고 21세기인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인도의 신분제도를 붓다는 이미 이천 오백년 전에 강력히 부정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함을 주장하였다. 당시 기득권에 저항하는 경계인으로서의 붓다의 이러한 용기가 진리의 철저한 자기 삶으로의 체화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어디서 나오겠는가.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천상세계와 우리의 세계를, 저 너머의 삶과 이곳에서의 삶을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되지만, 진리의 육화(肉化)로서의 두 스승의 삶이 지니게 되는 경계는 신과 인간이라는 성(聖)과 속(俗)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당시의 여러 집단이나 계층 간의 경계도 있으며, 특히 주목해야 할 것으로 예수는 구약과 신약과의 경계에 서있다는 점이다.

      2) 사표로서의 스승

경계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사람들의 길들여져 있던 기존 사고의 틀로부터 새로운 가치체계로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 스승이요, 교육이라는 가르침이라면 사표로서, 경계인으로서 예수가 보여준 모습은 어떠한가? 그것은 열림이자 다양에의 수용이며, 이러한 것을 통해 인간은 계율이나 이로 말미암은 클리셰 안에서 자신을 길들이고 구속하고 있던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더욱 자유롭게 되며 이러한 자유 속에 평화를 얻게 된다.

한편, 교육과 훈육은 다르다. 훈육은 그것이 지식이건 가치체계이건 집단이 이미 지니고 있는 기존 틀에 듣는 이들을 집어넣어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교육이란 사람들이 길들어져 있는 그 시대, 그 집단의 사고의 틀로부터 벗어나 좀 더 자유롭고 다양한 시각을 지닐 수 있게 해주는 일련의 인식 전환 작업이다. 스승으로서의 예수는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이 시대의 많은 종교인들이 하듯이 사람들을 훈육하려 하지 않았고, 항상 듣는 자의 몫을 남겨두었음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렇기에, 길들려진 삶/가치체계로부터 거듭 태어나고 깨우치기를 강조며 고난과 비난의 삶을 산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통해 우리는 스승으로서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예수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듣는 이의 몫을 강조하였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듣는 이를 신뢰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뢰에 바탕을 둔 사랑이 있었기에 그를 희롱하고 못 박으려는 그들마저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러한 생생한 삶에 바탕을 둔 가르침으로 우리를 뒤따르도록 하고 있다(요한 13:15).

예수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하리라고 말하였고 불교에서도 진리를 통하여 대자유인이 된다고 한다. 자신이 갇혀있던 틀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경계인으로서의 가르침은 이러한 면에서 무명과 원죄로 말해지는 세속과 열반과 하늘나라로 상징되는 자유와 평화의 세계로의 경계 속에서 우리에게 깨달아 거듭 태어나 자유와 평화를 얻기만을 열심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기존의 지식이나 사유 체계에 길들어져 있는 이들에게 다양한 관점과 새로운 가치체계를 제시하여 더 넓은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스승은 언제나 경계인이 될 수밖에 없으며, 기존의 지식이나 가치기준을 반복하는 훈육자는 결코 주위로부터 비난 받을 일이 없지만 기존의 틀을 넘어 새로운 시각을 지니기를 요구하는 교육자는 비난이나 오해의 대상이 되기 쉽다. 양쪽 두 세계에 동시에 속한 경계인이란 열리지 못하고 머물러 닫혀있는 집단으로부터는 혼란스럽고 알 수없는 이야기를 전하는 변방인이자, 그들을 긴장하게 하는 야만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길들어져 있는 집단으로부터 오는 안락함 때문에 새로운 관점이나 가치체계를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하여 어느 집단이나 개인이건 기존의 것을 지키려고 하는 저항을 보이며, 그것은 마치 물리학의 관성의 법칙과도 같아서 자신들이 신봉하던 틀에 비해 더욱 새로운 지평과 더 많은 다양성이 이야기될수록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그들의 저항은 더욱 커진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예수님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의 반응도 그렇고 붓다의 전법 과정 중에 보이는 다양한 저항과 비난이 그러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근거한 뿌리이지만  머물러 정체되어버렸다면 강력히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점까지 가야만 한다. 

차이와 차별은 엄연히 다르건만 상대방이 자신들의 집단에 완전히 속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워하기에 그러한 두려움을 지닌 집단 속에서 경계인의 삶은 또한 희극적으로 희화될 수밖에 없다. 예수가 로마 병정들에 의해 얼마나 희화되었는지는 성경에서도 잘 증거 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스승은 그러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이 새 시대를 여는 진정한 스승이 짊어져야 할 그의 삶의 몫이요 예수와 붓다가 걸었던 길이다.

이렇듯 쉽지 않는 길이지만 경계인은 결코 양 집단을 판단하지 않으며 떠나지 않는다. 이러한 집단들로 인하여 경계인의 존재의미가 있으며 서로 상의상존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속해있지 않지만 속해 있는, 떠나있지만 항상 떠나 있지 않는 자들이 경계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외롭지만 결코 외롭지 않으며(마태 22:29, 26:72, 마가 8:17, 요한 1:10, 13:7, 21:4), 자유롭고 알 수없는 바람과 같은 가벼움으로(요한 3:8)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를 지닌 경계인의 삶에는 생명과 진리의 세계가 아닌 한 세속의 고향이 없다. 결코 길들여지지 않으며 항상 길들여진 삶을 낯설게 바라보아 머무르지 않기에 경계인의 삶에는 당연한 것이 없다. 이들에게는 삶이 당연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게 진리 속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무소유의 자세로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자들에게 항상 자신의 삶을 나누며 산다.

이것이 스승으로서의 경계인이 지닐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행복에 찬 모순의 삶이며, 동시에 이것이야 말로 이들의 삶에 동참하며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야할 우리들에게 남겨질 몫일 것이다.

6. 십자가 사건

      1) 창조와 진화

예수의 구약과 신약의 경계인으로서의 십자가상의 예수를 이야기하기 전에 십자가 사건이 결국 아담과 이브의 에덴 추방으로 인하여 있을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먼저 우리는 하느님에 의한 창조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진리에 대한 붓다의 표현 방식과는 달리, 창조라는 개념은 진리이자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언급이 처음부터 인격화되어 기술되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본다. 하느님 스스로 창조 활동 후 안식을 취하며(창세 2:2) 하느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후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에덴에서 공의를 실행하는 인격적인 하느님으로 언급하였다. 인격적 모습이라는 것은 이미 상대적 개념이기에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으며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는 연기적 관계성 속에서만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그러한 연기적 관계라는 것은 관계에 참여하고 있는 각 구성인/요소 간의 역동적 상호 작용 속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화해 가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해서 이 세상은 진리로부터 한 생각 일어나 생겨났으며 이 세상은 원인과 조건으로 이합집산과 생노병사를 거듭하는 실체 없는 관계로서 이루어져 마치 거미줄 망처럼 서로 관계하며 얽혀있다고 설파하였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적 창조론과 소위 다양한 우리의 모습이 한 물건, 한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 고정된 실체 없이 변화해간다는 불교적 입장은 서로 다른 것일까. 이 점에 있어서 진리가 우리에게 나타나고 전달되어 공유되기 위해서는 이야기 되던 당시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다고 볼 때, 창조나 한 생각 일어나 비롯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소위 진리, 생명, 법, 불성, 한마음, 한 물건, 하느님, 여호와, 길道, 신神등의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삼라만상의 근원(the ground of being)과 그로부터 비롯된 다양한 개체로서의 생명체와의 관계를 어느 측에 서서 표현하느냐의 차이로 보인다.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신의 입장에서 개체 고유성을 지닌 생명체라는 존재를 표현한다면 생명체는 창조되어진 것이고, 생명체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비롯되어 변화해 온 것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여러 종교에서 공통되는 것은 그 이름이야 진리, 길(道), 법 등 다양하기는 하지만 진리 이외의 방법으로는 결코 진정한 자신의 근원인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우리들의 육신이라는 것도 단지 흙이나 사대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점에 있어서 각 종교 간에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은 이미 언급하였다.

한편, 이렇게 근원으로부터 개체화를 거쳐 나타난 것이 인간을 포함한 중생이라 해도 근원과 이러한 개체는 마치 바다와 파도처럼 결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뿌리이다. 내 안에 붓다가 있으며 예수가 있다. 또 예수와 붓다 안에 내가 있다. 더 나아가 내 안에 네가 있으며 네 안에 내가 있다(요한 17:21-22). 이러한 동체대비의 자비심에 의해 자리이타가 나오며 사랑에 의해 스스로를 못 박아 참회하여 상대에게 생명나무의 실과를 주는 것이다. 네가 살아야 내가 살며 내가 살아야 네가 산다. 이것이 붓다가 말한 자리이타이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희생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라는 신약 시대의 새 계율인 것이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스스로 자존(自存)하던 하느님은 인격적 하느님으로서 인간과의 관계가 필요했으며, 욥과 만나기 전의 하느님은 사탄에게 무고한 인간을 시험하게 하는 모습이었으나(욥1:12) 결국 욥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인식하게 된다. 이제 너와 나의 관계성을 인식한 하느님은 그 후 요나와의 만남을 거쳐 결국 단절된 관계 회복을 위하여 예수를 보내어 에덴에 있던 생명나무의 열매(창세 2:9, 3;22)를 우리에게 줌으로서 용서와 사랑이 진리의 본질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고 볼 수 있다.

      2) 관계 회복과 폭력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살펴보기 전에 예수로 인한 관계 회복의 소중함을 바탕으로 무엇을 폭력이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자식을 염려해서 하는 행위라면 어머니가 자식에게 매를 든다 해도 그것을 폭력이라 하지 않는 것처럼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나 언어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며, 또 시선을 끄는 수많은 고통의 이미지로 포장되어 마치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 듯이 받아들이게 되는 폭력의 표면적 모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폭력이란 왜곡되거나 단절된 관계의 또 다른 이름임을 알게 된다. 

폭력은 상대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기보다는 타자화(他者化)시켜 방기(放棄)하는 행위이다. 우리의 관계를 왜곡하거나 단절시키는 수많은 것들은 모두 폭력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는 많은 폭력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수와 붓다의 가르침은 결국 원죄와 무명으로 인해 발생된 소외된 관계로부터 벗어나 본래의 관계 속에서 자유와 평화로움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이기에 이들은 언제나 비폭력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우리 시대의 좋은 예로서는 월남전 당시 평화를 외치며 민중의 삶을 위하여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한 승려들의 예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으로 폭력은 강자만의 것이 아니다. 약자의 폭력으로서 체념이 있다. 체념은 일종의 상대에 대한 무시(ignorance)로서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우리가 철저히 인식한다면 관계 복원을 말하는 예수와 붓다는 우리에게 연기적 관계에 대한 자각을 통해 그것이 자신의 삶이건 자신의 속한 사회 문제이건 관계성에 대한 깨어있음을 통하여 결코 체념하지 않는 적극적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너와 내가 관계 속에서 둘이 아닌 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사랑과 자비라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자세를 지닐 것을 요구한다.   

한편 관계라는 것이 이것과 저것, 너와 나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엇을 너와 나라고 하며 이것과 저것이라 할 것인가. 대승경전인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問)에서 잘 나와 있듯이 비록 이세상은 수많은 상대적인 존재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들은 서로 둘이 아님을 말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自他不二),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피안과 차안이 서로 둘이 아니다. 화엄경에서도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임을 설한다(一卽多 多卽一의 重重無盡). 그렇기에 인간의 삶이 펼쳐지는 지금 이 자리가 가장 소중한 자리이며,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어야 한다. 붓다는 깨달음(悟)을 강조했다기보다는 깨어있음(覺)을 말했다. 한국 불교에서 강조하는 깨달음이란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의 본래면목(佛性)을 깨달아서 깨어있음으로 가지 않는 한 그것은 죽은 깨달음이요, 예로부터 불가에서 가장 경계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숨결을 받아 생명체로 탄생하였으며 신약에서는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하늘나라도 임해 있음이 선포되고 있다 (마 10:20, 요한 15장, 고전 3:16). 하느님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과 하느님은 서로 둘이 아니다(요한 14:20, 17:21-22, 고전 6:15, 12:27). 또한 예수도 성경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깨달아 깨어있음이다 (마가 7:14,  13:33, 마태 15:16, 24:42, 고전 14:19, 딤후 2:26, 에베 3:4, 골 1:6). 실제적으로도 성경에서는 깨달음의 종교라는 불교 경전보다도 더욱 자주 깨달으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또한 그 결과로서 항상 깨어있기를 강조한다.

해외에서 이미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붓다와 예수의 이러한 공통점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논의가 있고 서론에서도 언급하였기에 상세한 언급은 생략하지만, 우리는 붓다의 불성과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고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과 같음을 굳건히 믿어 깨달음 속에서 본래의 자신들의 온전한 모습과 올바른 관계에 대하여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한 깨어있음으로 해서 하늘나라가 이미 지금 이 자리에 임해 있음을 알아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평안 속에 살아가는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3) 십자가의 의미

예수와 붓다로 상징되는 진리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 같이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붓다와 예수는 서로 유사한 진리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른 삶의 모양새를 보여주었다. 두 스승 모두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제자들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길 위에서 삶을 보내지만 붓다는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했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 왜 그렇게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을까. 모욕과 능멸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구속의 길을 걸은 예수는 과연 무엇 때문에 누구의 죄를 대속한 것이며, 십자가의 역사함을 통하여 무엇을 다 이룬 것일까. 이 점에 있어서 예수는 구약과 신약의 경계에 서있다. 모든 계약이나 약속에 있어서 새로운 계약이 나왔을 때 옛 계약은 새로운 계약의 근거는 될지언정 그 효력은 상실된다. 십자가상에서 예수의 진정한 삶의 완성이 있었기에 이제 구약과 신약의 경계인으로서의 예수가 열어준 새 시대인 신약시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다시 태초의 세계로 돌아가 보자.

창세기에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창세 3:3)는 인간에게 주어진 태초의 계율을 어김으로서 길(道)이요, 진리요, 생명인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같이 기거하던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어 소외(estrangement)된 삶을 살아가게 된 인간의 상징적 이야기가 있다. 또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러한 상태의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죄 없는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함으로서 인간의 죄를 대신 사함으로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인간은 그동안 단절되었던 진리와의 관계가 복원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 모두의 죄를 대신 속죄(贖罪)하는 희생양으로서의 예수의 삶의 모습이라고 말해진다.

한편, 모든 것이 연관되어 서로 변화하는 관계로서 표현되는 생명의 참모습과는 거리가 먼 폭력이란 행위는 상대를 대상화하고 방기하여 상대와의 관계를 왜곡하고 단절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폭력이란 것은 반드시 강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약자도 체념이란 행위를 통해 상대와의 관계를 끊음으로서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인간 추방의 사건에서 과연 누가 폭력을 행사하였을까? 흙으로 빚어진 힘없는 인간이었는가? 아니면 창조자로서의 주재자인 하느님이었는가? 분명 하느님이 잘못을 범한 피조물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자신과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의 영역에서 인간을 추방한다(창세 3:24). 공의의 하느님으로서 계율을 어긴 자에 대하여 엄격하게 판단하며 용서 없이 철저하게 정죄를 한 것이다.

비록 이 부분은 과거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삶과 더불어 수많은 문학과 미술의 소재가 되어 왔고 이제는 인류 문화유산의 커다란 한부분이 되어 있지만, 신약의 클라이맥스가 십자가 사건이요, 이러한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진리와 단절되어 소외되어 온 인간의 본원적인 고독한 삶이 관계 회복을 통해 자신의 본래의 자리(本來面目)로 되돌아가게 되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거듭 태어나고자 하는 신심과 용기 있는 자라면 바로 이 상황 속에서 십자가의 보혈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시점에서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피의 의미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전혀 생각 없이 성경의 문자만을 읽고 있거나, 아니면 인간의 부분적인 지식(knowledge)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일부 신학자들의 권위에 길들여진 자들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성경에 담겨있는 모든 기록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길, 진리, 생명)을 증거 하기 위해 쓰여 졌으며, 성경은 진리의 책으로서 진리인 하느님 당신의 고백록이자 진리의 발현을 기록한 글이다. 비록 성경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등장과 이야기가 있지만, 어떻게 보면 피조물로서의 흙으로 빚어진 인간들은 성경에서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닌지도 모른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진리라는 것은 너와 나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代贖)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보혈은 결국 인간이 아닌 에덴동산에서 폭력을 행사한 하느님의 원죄(原罪)를 위하여 흘린 것임을 확신한다. 관계의 복원을 위해서는 하느님 스스로를 거룩하게 해야만 했던 것이기에(요한 17:19) 십자가 사건은 선악을 알게 된 인간과의 관계를 끊어야 했던 공의(公義)의 하느님이자 정의와 분노로 나타나는 구약 하느님의 죄를 스스로 사하고 거룩하게 함으로서 이제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으로서 새로운 계약 속에 거듭 태어나는 순간이자 이를 받아들인 인간 역시 거듭 태어나 부활할 수 있게 되는 대사건이다.

하느님/예수님은 에덴에서 자신이 인간에게 행한 폭력에 대하여 인간이 느꼈던 고통과 괴로움을 똑 같이 느끼기 위해 수많은 모욕과 희롱 속에서 골고다 언덕에서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서 진정한 속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의 고통 속에서 가능하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는 예수님의 간청은 결코 이루어질 수없는, 진정한 관계 회복을 위해 예정된 필연적 의식이었다(요한 10:17-18, 12:27). 예수님도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음은 성경에도 잘 나타나 있다(요한 6:39-40).

그러한 의미에서 십자가상에서 고통 받던 예수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쳐야만 했던 것은 결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닌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몰라서도 아니요(요한 14:29), 자신이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을 이미 수용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던 예수에게 갑자기 연약한 인간적인 면이 나타나서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던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을 추방하는 하느님에 대하여 절망과 한탄 속에 울부짖었던 바로 그 처절한 외침이며, 또한 모든 것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던 무고한 욥의 탄식과 절망에 찬 외침에 대한(욥 3장, 13장, 17장) 신의 철저한 자기 경험의 순간이다. 이러한 수난의 과정을 통해 예수는 아담과 욥으로 상징되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으로 인해 겪었던 고통을 스스로 체험하며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여 철저히 참회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참회 의식을 끝낸 예수는 ’다 이루었다‘라고 하며 숨을 거두게 된다(요한 19:30).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으로서의 공의, 정의, 분노 등은 모두 상대를 판단(judgement)할 때 나타나게 되는 모습인 것처럼 에덴에서 자신의 자식인 인간을 정죄하며 폭력을 행사했던 하느님은 자신 스스로를 못 박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스스로 참회하면서 관계의 단절이라는 폭력을 이기는 길은 오직 이와 같은 사랑이며, 사랑이란 상대를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으며 용서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고 있다(누가 17:4).

한편, 이러한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하느님은 스스로 몸소 행하지 않고 말만 하며 외식하는 자가 아님을 증거하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삶만이 진정한 관계의 복원을 이루어 우리를 진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몸소 행하지 않고 말만 하며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그토록 꾸짖으실 수 있었던 것이며(마태 23장), 우리에게도 우리의 몫으로서 능동적인 참여를 준엄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누가 6:46-47). 하느님은 행하는 자이다.

이러한 성경 읽기에서 중요한 점으로서 하느님은 이토록 인간을 사랑하사 자신의 속죄를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었으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피 흘린 것인가를 생각해 봄으로서 그 보혈의 참뜻을 더욱 새길 수 있다는 것이지, 십자가에서 하느님 스스로를 위해 못 박힌 것이냐 인간을 위해 못 박힌 것이냐는 식의 논의는 그다지 중요한 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느님의 속죄란 결국 내 안의 있는 하느님의 속죄이기도 하기에 십자가의 보혈은 하느님의 죄를 사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죄를 사하는 것이기도 한 까닭이다(로마 6:6).

결국 성경에서 증거 되듯, 관계의 단절과 이에 대한 속죄(십자가)를 통한 거듭 태어남(부활)으로 관계의 복원을 몸소 보여준 하느님(길, 진리, 생명)의 고백은 우리 각 개인의 기록이자 고백이 되어야 한다(요한 13:15).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못 박음으로서 행한 하느님 자신의 참회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도 우리 각자의 참회의 순간이도 하면서 동시에 거듭 태어나 우리 스스로도 부활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제의(祭儀)를 통해, 이러한 거듭 태어남을 통해, 본디 하느님의 형상을 지니며 하느님의 숨결을 지닌 우리는 우리의 근원으로 돌아가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하느님 스스로 참회를 통해 자신의 죄 사함을 이루고 에덴에서 있었던 태초의 계명을 사랑으로 완성시킴으로서 이를 받아들인 인간에게는 죄 사함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된다. 이제 우리는 결코 하느님과 분리된 둘이 아니며 같은 진리의 품안에서 거하게 되기에 내가 서있는 지금 이 자리가 그대로 하느님이 거하는 에덴동산이자 하늘나라임을 알게 되며, 이것이 인간이 살아서 죽음을 뛰어 넘어 영원히 사는 길이자 예수를 따라 이미 부활한 것이다 (요한 11:26).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율로 이루어진 구약시대에는 그 율법의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을 ‘하라’는 긍정적인 신약 시대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주체로서 인간을 신뢰하는 하느님의 따뜻한 시선이 있다. 태초의 계율로 인하여 관계의 단절을 가져와 죄가 들어올 수밖에 없는 구약시대의 정의와 공의의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를 십자가에서 못 박는 처절한 참회 의식을 통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새로운 신약의 하느님으로 거듭 태어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고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철저하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총이자, 은혜이다 (에베 2:8).

더욱이 스스로를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게 하고 (욥 17:6, 누가 18:32) 못 박음으로 해서 그동안 인간이 느껴왔던 그 모든 고통을 당신이 절절하게 체험하면서 우리에게 무엇이 참회이며 용서이자 사랑인지를 보여준 십자가의 사건은 몸소 실천하는 스승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삶은 말씀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관계 복원을 위해 철저히 자기 참회를 하며, 이를 통해 거듭 태어나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모든 존재의 연기적 관계의 소중함과 잘못된 관계의 복원이 가장 소중하다는 불가(佛家)에서 가르침과 더불어 예수의 형극의 삶이야말로 이를 위한 노력이 항상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 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우리 인간의 가장 근원적이고 전형적인 삶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 (빌 3:17).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를 전제로 예수의 삶을 볼 때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태초에 인간에게 계율을 줌으로서 죄
를 들어오게 하였으나(로마 4:15), 자신의 추방의 역사로서 인간에게 행한 폭력, 이러한 폭력은 사탄에게 무고한 욥을 시험하게 하는 시련으로 이어졌고(욥 1:12) 어쩌면 하느님은 칼 융의 말처럼 이 시점에서 욥을 통해 그러한 자기 인식이 가능했기에
 이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봄으로서 사랑이신 하느님이 지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통해 생명나무의 열매를 인간에게 주고자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냄으로서 용서와 사랑이 진리이자 진리의 발현이기도 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룬 예수를 통해 본래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관계는 서로 상의 상존하여 각자의 몫을 지니고 서로 변화하면서 펼쳐짐을 말하는 붓다의 관점에서 볼 때, 관계 회복을 위해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서 하느님이 자신의 몫을 다 한 시점에서 더욱 선명히 남는 것은 계명을 어김으로서 에덴에서 추방되는 계기를 만든 인간의 몫이다.

III. 마무리 - 예수를 통해 보는 우리의 몫

진정한 관계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다양한 것이 어우러져 같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차별(差別)하지 않고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결코 그 어느 쪽도 상대를 판단하여 차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 속에서 각자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몫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여 정죄하는 우리의 모습은 진정한 상생 관계의 단절(斷絶)을 의미하며, 곧 상대에게 행하는 폭력이다.

예수는, 자존하는 진리로서의 하느님이 그로 말미암은 아담/이브, 욥, 요나와의 관계를 통하여 스스로를 변화시켜 오면서 관계 복원을 위하여 자신을 못 박아 진정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준, 사랑의 하느님 자신이자 진리의 발현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랑의 하느님을 앞에 두고 그러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인간에게 남겨진 몫은 무엇일까.

우선 그것은 하느님이 스스로를 낮추어 보여준 그 화해의 모습을 인간 스스로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결코 하느님은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 아니 강요할 수 없다. 오직 문을 두드릴 뿐이며, 단지 예수나 붓다가 자신들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진정한 관계의 재정립을 위한 거듭 태어남이다.

결국 이러한 관계의 재인식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너와 나를 위한 진정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며, 또한 원죄나 무명의 세계가 생명의 세계와 결코 둘이 아니기에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지금 이 자리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거듭 태어나 각 개인과 진리와의 관계 재정립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관계로부터 단절된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스스로 절절히 맛보며 자신을 못 박아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을 용기 있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허나 우리가 진정 거듭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믿음을 지니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지만, 그러한 믿음도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관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넘쳐나는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면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고전 13:2).

본디 예수와 붓다의 메시지는 인간들의 삶의 현장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니며 지금 이 자리에서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마가 18:18). 관계의 단절이 곧 폭력이며 관계에 깨어있는 삶을 예수와 붓다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향한 우리의 삶은 약자가 행하는 폭력이기도 한 체념에서 벗어나 열정을 바탕으로 매우 적극적이어야 한다. 또한 관계의 중요함을 알아 하느님과 내가 하나이며, 성(聖)과 속(俗)이,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님을 안다면 세속적 상황 속에서 고통 받는 인간을 무시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으로서 그런 의미에서 왜곡된 사회 정의의 수정을 위하여 참여하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예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준엄한 질타를 하며(마태 23장), 우리에게 언행이 일치하는 삶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예수와 붓다의 가르침은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관계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길들여져 있던 원죄와 무명의 세계로부터 진리와 생명의 세계로의 거듭 태어남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도 도덕도 아니며 진리와 각 개인과의 일대일 직면이자, 개인의 영적 체험에 바탕을 두어 철저한 인식의 전환이 전제되어 너와 내가 공유하며 살아가는 삶의 변화이다. 따라서 인간을 사랑하고 자비로운 종교적 메시지는 자연스럽게 인간을 대상화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이 시대의 물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치열한 의식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종교적 자각에 의해 진리가 지니는 온전한 관계성을 통해 사회 정의와 생태 운동에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 참여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결코 폭력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예수와 붓다는 강조하고 있다. 그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타협이 아니라 (마태 12:26) 너와 내가 함께 나누며 나아가는 비폭력의 축제(祝祭)로서의 참여 운동이어야 한다. 예수가 전하는 사랑은 이제 그의 십자가에서의 보혈에 의하여 기쁨과 감사의 축제의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

내 이웃을 나 자신을 희생해서가 아니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된다. 다시 말하여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한다. 희생이 아니라 이웃끼리 서로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道伴) 비폭력의 축제로 삶을 살아가기를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만큼(요 3:16) 지금 이순간 자기 모습 그대로 ‘온전’하며 생명와의 관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알아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 된다는 것을 예수는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관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통하여 본래의 우리 모습이기도 한 사랑이란 형태로 드러남에 있어서 예수의 삶은 붓다의 가르침에 비추어 전혀 다르지 않다. 굳이 차이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불경으로 나타나는 붓다의 가르침은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에 가깝고, 기독교에서의 진리는 비교적 인격화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이야기되어왔다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상 진리에 대한 메시지를 좀 더 명확히 그리고 널리 전하기 위해 종교라는 형태가 더욱 강화되어 왔다고 볼 때, 예수나 붓다의 메시지도 반드시 기독교나 불교라는 종교라는 형태 속에서만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보석 같은 말씀은 특정 종교라는 틀 안에 가두어 그 빛을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그러한 틀을 걷어냄으로서 더욱 주위를 밝게 비추어야 한다는 나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면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씀들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닐까 한다. 그 장소란 바로 교회나 산사 속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지금 이 자리이다 (누가 15:7). 울고 웃는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바로 천국의 삶이되는 길이며 이럴 때 살아가면서 즐거움이나 괴로움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우리의 평상심이 곧 도(道)가 되는 것이다.
 

예수와 붓다는 우리에게 깨달아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있음으로 거듭 태어나 삶의 개혁을 통해 죽음도 어찌하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말하고 있으며,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아 기다림의 자세로 나눔을 실현하며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영원한 피안(彼岸)의 생명이란 결코 지금 이 자리를 떠나 내세에나 얻는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 진리 속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부활하기를 선언하고 있다.

이렇게 특정 종교의 틀을 거두고 바라보면 예수는 붓다이다.
 또한 동시에 예수와 붓다는 너와 나이며, 바로 내 이웃이기도 하다(마태 25:40). 예수가 스스로를 못 박아 보여준 참다운 참회와 거듭 태어남으로써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평안하여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붓다가 말하는 화엄경의 자리이타며, 보현 행원품의 중생 일체극중고과 아개대수의 자세이기에 이는 곧 예수의 모습이자 붓다의 모습이며 내 이웃의 모습이 되니 이미 이 땅에 하늘나라가 임하고 구현된 모습이다 (마태 12:28, 요한 15:3).

한편,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예수와 붓다, 모두 진리 외에는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같은 진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예수는 진리의 인격화된 모습으로 전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매우 친근하고 실제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면은 듣는 이로 하여금 진리의 표면적인 것에 머무르게 하는 측면이 있어 삶의 변화를 수반하는 진정한 믿음에 대한 통찰 없이 단지 성전에서 ‘믿습니다’만을 외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한편, 이와 비교하면 붓다는 진리를 관계성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부터 설명하기 때문에 구체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관념적이고 접근하기가 어려운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선종은 이러한 진리의 체화를 위하여 모든 개념마저 놓게 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몰고 간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살아있는 사람을 묘사할 때 예수는 사람의 형상이나 모습부터 말함으로서 정작 듣는 이들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그 밑에 들어 있는 피와 살의 구조를 간과해 버릴 수도 있고, 붓다는 사람의 생리 구조와 구성부터 이야기하기에 정작 사람의 형태나 모습을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접근하건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사람을 아는 것이므로 두 스타일의 스승이 만나 서로 각자의 종교의 모습으로 상호 보완함으로서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손쉽게 생기 있는 사람을 발견하여 그의 따뜻한 온기와 마음으로 너와 내가 서로 함께 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과거 하늘나라에는 방이 많다는 성경 구절을(요한 14:2) 종종 인용하며 은유적으로 다양한 종교 및 사회 현상과의 대화를 강조한 하비 콕스처럼 과학에 대한 맹신과 폭력적인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당연시 되는 지금의 한국 사회 속에서 예수와 붓다가 서로 손을 잡고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진리를 펼쳐 나아갈 때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진행이 되건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행복한 삶으로 연결될 것으로 믿는다.

이 세상은 뿌린 데로 거둘 것이고,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니 땅과 하늘이 둘이 아니며,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있을 것임을 바라면서.

장익성 기자  mocacoff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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