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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최악의 절망과 공포의 시절”유신시절 절망가운데 저항했던 신학생들의 이야기①
편집부 | 승인 2013.10.10 16:14

본지는 10월 유신이라는 암울했던 과거를 기억하며 유신시절 독재에 저항해 고초를 겪은 이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한국신학대학 신학생들로 현재 대부분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만나 그 시대의 이야기와 앞으로 한국사회와 교회가 민주화의 회복을 위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 기사로 옮깁니다. 분량상 두 차례로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 1972년 10월 17일 유신발표이후 광화문(당시 중앙청)앞에 나타난 탱크

1972년 10월 1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특별선언을 통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되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가장 암울했던 10월 유신의 시작이었다.

국회는 해산되었고 헌법도 정지되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따온 유신헌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헌적인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고 이후 긴급조치가 줄줄이 발동되며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암흑과도 같았던 70년대가 시작된 된다.

1970년대, 캠퍼스의 낭만을 꿈꾸며 올라온 신입생들은 사복을 입은 형사들의 감시의 눈초리와 잦은 휴교령으로 수업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대부분 저항조차 생각하기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증언한다. 이런 엄혹함 속에서 단말마적 고함을 내지르고 잡혀가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었던 저항의 전부였다.

박남수 목사(70학번). 정상시 목사(75학번), 김하범 선생(75학번), 윤인중 목사(78학번)는 모두 70년대 긴급조치에 의해 고초를 겪은 이들이다. 이들은 1975년 5월 13일 제정된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에 의해 수감생활을 했고 최근 무죄판결을 받았다.

본지는 10월 유신을 맞아 70년대 유신에 반대하며 항거했던 70년대 한국신학대학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목회자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살았던 70년대 긴조시대의 상황과 현재 무죄판결을 받게 된 심경, 그리고 앞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전망을 들어보았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유신, 긴급조치... 숨쉬기 조차 힘들었던 시절

70년대 긴급조치에 의해 옥고를 치르게 되신 경위와 그 당시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박남수 목사(이하 박) : 내 사건은 긴급조치 9호이고 1976년 한신선언문 사건으로 구속됐다. 내가 1970학번이니까 1년 동안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를 했고 76년 봄에 제대해 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당시 한신 캠퍼스 분위기는 참으로 이상했다. 각박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상당히 경직되 있었다. 당시 3.1구국 사건도 있었는데 이후 긴급조치 1,2,4호가 발동 됐다. 당시 한신에서는 긴조가 발령될 때마다 먼저 치고 나갔다.

   
▲ 1970년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한 박남수 목사. 독일선교사를 다녀온 그는 현재 의정부에 있는 송암교회를 담임하고 있다.ⓒ에큐메니안
그래서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신학생이 모여 ‘한신의 양심을 선언해야하지 않느냐’,‘우리의 소리를 신앙인의 입장에서 이야기 해보자.’라는 의견을 모아 한신선언문을 채플실에서 발표하려고 했다. 그러나 채플 전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학생들을 색출하고 기숙사를 뒤져 발표할 유인물을 수거해갔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몸을 피해 흩어졌다. 결국 한신선언문은 발표되지 못했다. 그게 1976년 4월일이다. 나중에 우리는 수배생활을 하다 각각 붙잡혀 1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당시 그 사건 이후 한신에서는 제적당했고 1978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기장선교교육원에서 신학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7월 29일 서울북부지법에서 무죄판결을 받게 됐다.

   
▲ 한국신학대학 1975학번인 정상시 목사. 그는 안양의 안민교회 담임을 맡고 있다.ⓒ에큐메니안
정상시 목사(이하 정) : 먼저 유신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질식할 것 같은 폭압의 시대였다. 막말로 우리는 전대협세대와는 전혀 다르다. 그 때는 공간이 확보되어 수천 명 앞에서 집회를 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도청과 사찰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 폭압과 눌림 속에서 우리는 고함을 지를 거라고 생각한다. 긴급조치 선언은 그런 것 이었다. 겨울 공화국이었다.

나는 1975년도에 입학했는데 4월 11일 한신대 휴업령이 났다. 고려대 휴교령. 고대는 위수령과 함께 긴조7호가 떨어졌고 우리는 휴업령을 받게 됐다.

3월에 입학해 소꿉장난 하듯이 재밌게 지냈다. 다방도 가보고 미팅도 하고 재밌게 대학생활을 했다. 그러나 한 달 이후 학교에 갔더니 느닷없이 철문이 닫혀 지고 휴업령이 내려진 것이다. 갑자기 서릿발을 맞은 꼴이었다.

이후 6월 즈음 휴업령이 풀려 교문이 열렸다. ‘아무개 교수를 잘라라’는 당국의 명령을 받아들이면서 학교가 정상화되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다. 그야말로 숨 막히는 시절이었다. 우리는 앉아서 공부를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강간당한 학교의 분위기였다. 김남수 목사가 그 시절을 목격한 것이다.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이 해임과 재적을 당한 것이다.

당시 학교에는 학생보다 형사들이 먼저 학교에 상주해 있었고 학생으로 위장한 프락치들이 많았다. 그런 속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1977년 고난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선언문은 김하범 선생이 작성했다.

   
▲ 한국신학대학 1975학년도에 입학한 김하범 선생. 그는 현재 비영리기구의 모금을 돕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에큐메니안
김하범 선생(이하 김) : 고난선언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긴조9호시절은 정권이 노리는 궁극의 목표는 자기들이 마음 놓고 뭘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눌러놓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커뮤니티를 파괴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던 것 같다. 교수와 학생을 이간질하고 학생들 사이에도 유언비어를 퍼뜨려 서로가 서로를 못 믿게 하는 일들을 자행했다.

결국 우리가 75,6년에 느꼈던 위기는 정권의 폭압에 우리가 꺾이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 보다는 우리 커뮤니티가 파괴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가 더욱 컸다. 그만큼 긴조9호는 우리에게는 굉장히 커다란 무게였고 그 무게에 짓눌려 꼼짝 못하다가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컸다. 결국 그런 상황에서 커뮤니티의 신뢰를 회복하고 공동체 의식을 가져 나가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원칙대로 행동하는 것 밖에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지만 ‘치고 나가야 한다’라고 결론내리고 내부의 두려움과의 싸움을 벌였다. 긴조9호의 경험은 80년 광주이전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최고의 공포였고 절망적 상황이었다.

정 : 그렇게 당시 선배들과 함께 4.7 고난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 1977년 4월 7일 발표된 고난선언 원본. 이후 이 사건을 '4.7 고난선언'사건이라 부른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
   
▲ 4.7고난선언 원본ⓒ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

박 : 고등학교 때까지 군사정권하에서 주입식교육을 받고 정권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왔지 우리의 생각과 권리를 이야기하는 시대를 살지 못했다. 한국전쟁 세대로서 한신에 와서 가장 강조했던 것이 자유정신, 정의, 신앙의 경건성이었다. 그것을 강렬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순수한 신앙과 시골교회의 한국의 복음주의와 다름없었는데 한신에 와서 결사의 자유, 행복 추구권, 언론의 자유에 눈뜨면서 한신의 교수와 학문을 통해 그것을 배웠다.

   
▲ 한국신학대학 1978학번인 윤인중 목사. 그는 현재 인천평화교회 담임을 맡고 있다.ⓒ에큐메니안
윤인중 목사(이하 윤) : 나는 긴조와는 직접적 관련은 없다. 1981년도 광주5.18 직후 집시법으로 구속됐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4.7고난선언 사건과 관련된 선배들과 인연이 있다. 고등학교시절 서울성남교회에서 이영재 전도사(75학번)를 교회학교 선생으로 만났다. 77년도에 그가 감옥에 수감됐는데 교회학교 선생에 대한 의리로 4.7고난선언 관련 재판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방청했었다. 그때 사회와 정치를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유신은 박정희의 장기집권음모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71년 3선나오면서 이게 마지막이라고 얘기했지만 이후 영구집권 총통제로 가기위해 법을 만든 것이다. 당시 재판정에서 김하범 선배의 ‘나는 역사의 가야금을 탄다’라는 최후진술을 기억한다.

78학번으로 한신에 갔을 때 학교는 경직되어 있을 대로 경직된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당시 교회청년회는 사회참여적인 분위기였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인 분위기였다. 당시 한신은 유신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은 부서진 공동체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장빈을 비롯해 밴드를 구성해 엇나갔는지도 모른다.(웃음)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은 한신, 기장이라는 공동체가 수난을 당했던 고난의 시절이었다. 75년부터 긴급조치와 계엄령을 만나고 1980년에는 광주를 만났다. 광야 40년같이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끌고 갈 세대들이 정금같이 단련되는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장과 한신이 그 점에서는 자랑스럽다.

정 : 긴조시절은 바벨론 유배생활이었고 어머니들의 눈물겨운 투쟁의 시절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시골 보수교회 집사님인데 나중에는 학교에 찾아오셨다. 교수들에게 따져 물었다. ‘좋은 목사님 만들려고 보냈는데 신학교가 왜 이런 학생들을 만들어 냈느냐’라고.

김 : 성동구치소에서의 사건이 잊히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박 모 선배가 고함을 질렀다. 자기 혼자의 힘들어서가 아니었고 누군가 우는 모습을 보고 분노해 고함을 지르며 항의했다. 그래서 추가 기소를 당했다. 김현수 목사와 함께 나도 고함치며 항의해 추가기소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 선배는 멘탈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그 선배는 투병 끝에 명을 달리했다.

그 당시 인상 깊은 사건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박 : 감옥에서 고생할 때 김하범 선생 어머니가 오셔서 위로해 주셨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 NCC총무셨던 김관석 목사님과 박용길 장로님 등이 우리를 아들처럼 대해주셨다. 우리들 때문에 투사가 되셨던 것이다.

정 : 구속자가족협의회가 태동된 게 3.1명동사건과 4.7고난사건으로 태동됐다. 이후 민가협으로 발전된 것이다. 박용길 장로님께 세배 하러 다니면 우리 어머니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어머니는 보수적 신앙이었지만 박용길 장로님은 좋아하셨다.

김 : 성령이 하나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사건이 있었다. 목요기도회 때 스님이 두 분이 들어오셨다. 동국대 승과대 학생들이 구속됐는데 아무도 도와주질 않아 여기에 참석하게 됐다는 것이다. 감동적이었다.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벽을 넘어서게 만드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것이 성령 안에 하나 되게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윤 : 197,80년대 시국 강연이나 시국모임이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자주 열렸는데 종로5가 전철역에서 기독교회관까지 가기위해서는 비장한 각오로 가야했었다. 경찰들과 사복경찰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회관으로 가다가 잡혀가는 사람도 많았다. 그 길을 가면서도 ‘가야하나 말아야하나’고뇌를 느꼈다. 당시 가족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던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유신과 긴조가 그렇게 만들었다.

김 : 감옥가지 않고 긴조를 살았던 동기들과 선후배들 또한 그들 나름의 고난이 있었다. 우리는 대표로 징역을 산 것이고 실제로는 함께 투쟁했었다.

 

   
▲ 좌측부터 박남수 목사, 김하범 선생, 정상시 목사, 윤인중 목사

우리 행동의 근거는 기장과 한신의 신앙과 신학


긴급조치에 저항했던 배경과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 우리의 행동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주요했다고 본다. 긴조9호를 그릇된 법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을 죽이는 하나의 우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스스로 비판하는 것을 잡아가두는 것은 법 자체에 생명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 위에 선 법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신앙과 신학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신운동에는 그 저변이 깔려있었다.

그러한 신앙과 시대정신의 교감이 강의실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십니까?

정 : 수유리 시절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교수들이 안고 가는 공동체가 존재했다. 단순히 한신만 아니라 기장공동체가 갖는 유신과의 싸움이라는 전선이 존재했다. 고백교회 등 다양한 교회에서의 고난과 투쟁이 있었고 예언자들이 존재했다. 강의 또한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유신이 하나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다.

박 : 19살 한신에 들어와 교수들 간의 강단 논쟁을 목격했다. 박봉랑 교수와 안병무 교수가 논쟁을 하는 것을 보며 학문의 자유의지가 이런 것인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 또 저녁에 막걸리 한잔 하고 있노라면 문동환 교수가 지나가면서 ‘적당히 하고 와’라고 말씀하신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열린 삶속에서 신앙의 틀을 나름대로 갖게 해주었던 경험이 있었다.

윤인중 : 기장과 김재준, 함석헌은 재평가 되어야한다. 밖의 역사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김재준, 함석헌, 장준하는 5,60년대 사상의 중심을 지켜왔다고 본다. 5,6,70년대 기장은 기라성과 같은 선배들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한 집단이었다. 성령께서 기장과 장공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이다. 1970년대 에큐메니칼 진영은 소수였으나 실력도 있었고 내부 유대도 강했고 사회적 영향력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유대가 무너지고 사회적 영향력도 땅에 떨어졌다고 본다.

박 : 일반적 대학에서는 교수와 학생들의 관계 형식적인 관계라면 우리 한신은 소수라는 특수성과 신앙, 성서를 통한 예언자적 불의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시대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학생들의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다고 본다.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장준하의 사상계. 김재준의 제3일이 우리 기독교의 정신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해왔다.

김 : 60년대만 해도 논설을 쓰기 전 사상계를 봤어야만 했다. 그만큼 시대담론을 주도해왔다. 이후 그 영향력이 치밀하게 공격당해왔다. 신입생 때 받은 느낌은 ‘신앙이라는 것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소소한 문제의 해답이 아니야’ ‘신학은 너의 존재, 실존, 너의 생명에 관한 문제야’ 이런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신앙인으로서 주초 문제는 우스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관심 갖는 것은 이게 아닌데.
 
황주석 선배(KSCF 전 총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 그가 날 불러 ‘우리가 데모하고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는 이유가 뭔 줄 알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열악한 여성 노동자들이 사랑스러워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려고 하는데 그것을 방하는 세력이 있으니 화가 나서 하는 거야’라고 대답 굉장히 큰 느낌이 왔다. ‘우리가 하는 게 물리적인 투쟁이 아니구나, 정신적인 싸움이었구나.’ 한신에서 그렇게 사고하는 훈련을 했다. 왜 하는 것이고 왜 해야만 하는지 배우는 과정이었다.

   
▲ 인터뷰는 지난 9월 2일 서대문 기장선교교육원에서 진행됐다.ⓒ에큐메니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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