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 7일, 이 날은, 광활한 대지에 나의 운명을 맡기던 날이다. 중경을 찾아가는 대륙횡단을 위해, 중국 벌판의 황토 속으로 그 뜨거운 지열과 엄청난 비바람과 매서운 눈보라의 길, 육천리를 헤매기 시작한 날이다. 풍전등화의 촛불처럼, 나의 의지에 불을 붙이고 나의 신념에 기름을 부어, 나의 길을 찾아 떠난 날이다.’

이렇게 시작한 달리기는 수없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중경 임시정부에 당도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내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처참한 정파 정쟁에 환멸을 느끼시고 아버지는 마침내 죽을 곳을 찾아 시안에서의 OSS 훈련을 받으셨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라는 네 마디 유서를 쓰고 국내 침투를 기다리던 중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숨이 턱에 닿도록 일군을 탈출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을 곳을 찾아 달렸었던 아버지의 첫 번째 달리기는 이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목표점을 향해 숨이 끊어지도록 달려왔건만 그 경주의 끝, 도달하여야 하는 목표점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며 허망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두 번째 달리기가 시작 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었다. 임시정부 환국과 김구 주석의 비서활동 그리고 이범석의 ‘족청’에 이어 아버지가 달려야 할 경주로를 찾아 떠났던 길은 마침내 1953년 부산 피난지에서 <사상계>로 시작 되었다.

‘적수공권’ 빈손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어머니의 코트를 팔아 태어난 <사상계>는 ‘알 권리와 일릴 권리는 참 언론의 생명이다’라는 언론관으로 이승만 정권에 맞서 ‘투쟁’의 달리기를 시작했다. ‘무엇을 말하랴-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하의 백지 권두언으로 자유당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대정부 포격용 포탄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 했음에도 아버지는 결코 그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4.19 학생혁명’의 정신적 근거를 제공하면서 아버지의 달리기는 최종 목적지에 다 다른 듯 보였다. 하지만 역사는 아버지에게 최종 목적지를 허락 하지 않았고 곧이어 ‘5.16 군사 구데타’와 군부독재와 싸워야하는 달리기를 이어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말았다.

‘우리 <사상계>가 싸운 것으로 말하면 옛날에 자유당정권과의 싸움이 더 심한 싸움이었지 결코 지금의 정권과 더 싸웠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정권과는 싸웠다기 보다는 군사구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을 잘 달래어 이 나라에 이 이상 더 어려움을 가져오지 않게 해야겠다는... 그래도 젊은 의욕이 이 나라 건설에 다소나마 새로운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서 항상 건설적 충고를 하여왔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라고 아버지는 생각 하셨지만 아버지는 박정희를 제대로 알지 못하셨다. 어쩌면 당신과 같은 민족적 대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군인의 절도나 기강은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박정희는 아버지의 건설적 충고를 자신이 극복 할 수 없는 도발적 도전으로 보았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죽지 않는 <사상계>를 기어코 없애야겠다는 듯이 이번에는 나를 형무소에 옭아 넣었으니 그로써 그들이 나에게 할 수 있는 박해의 방법은 죄 동원한 셈이었다. 결국 나도 <사상계>도 지칠대로 지쳐 <사상계>는 그 후 점점 숨결이 흐려가고 나도 그들과의 투쟁방법을 달리 해야 될 것을 강구치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1966년 이승만 독재정권과 맞서 싸워 민중의 승리를 이끌어 낸 <사상계>는 무식한 군사구데타 정권 하에서 그 숨을 멈추고 이 땅의 참 민주주의 라는 최종 목적지를 허공에 날려버린 채 아버지의 두 번째 달리기는 끝나고 만다.

아버지의 두 번째 달리기는 반칙의 연속이었다. 이승만의 독재에 이어 박정희의 반칙과 그 반칙을 적발하고 제지하며 벌칙을 주어야 할 심판이 없는 경주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그 달리기를 계속 할 수 없으셨다.

1967년 아버지는 세 번째 달리기를 위한 경주로를 찾아 옥중출마를 하신다. ‘대통령모독죄’라는 가히 최소한의 인격이라도 갖춘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죄목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를 했고 당선되셨다. 하지만 세 번째 달리기의 시작은 당신이 그리도 환멸 해 했던 정쟁의 한 복판에서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 달리기로 시작 하셔야만 했다. ‘삼선개헌’이라는 장애를 넘기 위해 온 몸으로 맞서 싸웠지만 결국 1971년 야합과 협잡, 부정과 부패, 회유와 협박 그리고 권력의 폭력은 아버지를 경기장 밖으로 밀쳐 버리고 말았다.

이로서 아버지의 4년간의 세 번째 달리기는 아버지의 달음박질 보다 더 빠르게 달려가 버린 목표를 허망하게 바라보며 끝나고 말았다.

1972년 12월, 아버지는 마지막 달리기를 준비 하셨다.
일년 전 자전적 수기 <돌베개>를 출판 하시며 ‘이제 나는 살아서 오십대 초반을 보내며 잠자리가 편치 않음을 괴로워 한다.’고 고백하셨던 아버지의 마지막 달리기는 오십 여년,  당신의 모든 삶을 내 건 달리기였었다.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백만인 개헌청원 서명운동’은 마침내 아버지의 마지막 달리기의 출발신호였고 이어지는 긴급조치와 징역 15년의 판결 그리고 박정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의 마지막에서 ‘이 지구상에는 수백억의 인간이 살다 갔습니다. 그 중에 <가장>되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죽으면 내 집이 어찌되겠는가>하는 걱정을 안고 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발전하여 왔습니다. 우리들도 예외 일 수는 없습니다.’ 라는 말로 당신의 마지막 경주의 끝을 예고 하셨다.

1975년 8월 17일,
39년전 오늘,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경주를 마치셨다. 단 한 순간도 쉴 틈 없이 군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어디까지 달려왔는지 뒤 돌아 볼 겨를도 없이 숨이 끊어질 듯 달려왔던 아버지의 달리기는 마침내 ‘재야의 시민’으로 끝이 났고 김수환 추기경은 장례미사에서 ‘장준하는 죽어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했지만 이제 나는 별이 된 아버지를 광화문에서, 시청앞에서 그리고 강정마을과 밀양송전탑 아래서 또한 팽목항과 이 땅의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민족의 역사를 세우고자, ‘다시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우뚝 서 당당히 외치는 모든 시민들에게서 다시 보고 있다.

39년 전 아버지의 달리기는 끝이 났지만 그 달리기는 이 땅의 민중들에 의해 역사 속에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장호준 목사  revch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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