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자 루터가 1520년 <교회의 바벨론 유포 시론>을 쓰면서 서두에 내세웠던 두 명제의 내용은 대사면의 비리와 교황권의 횡포였다. 루터는 교황을 사냥꾼 니므롯에 비유했다. 니므롯은 시날 땅의 바벨을 포함한 제국의 주인이며 폭군이 휘두르는 권력의 소유자로 여겨졌기 때문에(창 10.8-10), 루터는 당시 교회가 교황권에 사냥을 당했다고 묘사했던 것이다. 이제 5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교회도 세상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두 명제에 담겨졌던 관점은 여전히 자성의 거울로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 잔존하는 바벨의 형상 때문이다.

바벨이라는 고유명사는 성경 첫머리 부분에 나오는 거대한 탑을 떠오르게 하겠지만,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역사를 끝낸 제국도 원어로는 같은 바벨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두 모습으로 나타나는 바벨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내용을 담는다. 그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도 밝혀진다.

교육방송(EBS)은 지난 해 1월 말 방영했던 <위대한 바빌론> 사부작에서 역사상의 바벨탑을 찾아 고증하고, 그것을 재구성해 보여주었다. 방송이 개가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주전 6세기(604-562년) 것으로 추정되는 ‘바벨탑 석비’의 고해상도 사진을 노르웨이 소장자인 마틴 쉐인으로부터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석비에는 탑의 모양과 이름, 그리고 그것을 세운 인물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석비에는 이 탑을 세운 사람이 고대 제국 바벨의 느부갓네살 2세로 나타나는데, 성경에서 느부갓네살로 호칭되는 인물이다. 석비에는 또 “에테멘앙끼 지쿠라트 카딩기르라끼”라는 수메르어로 된 탑명이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 ‘카딩기르라끼’는 아카드어로는 ‘밥일리’로 읽게 되기 때문에, 탑의 이름은 “바벨의 지구라트 신전”이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탑의 규모와 모양이다. 고증에 따르면, 탑은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91미터이고, 옥탑까지 모두 7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러한 규모와 모양은 주전 458년경 바벨을 여행했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남긴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그는 장광고가 각각 180규빗이며, 8층의 탑이었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역사(大役事)는 권력이나 재력의 집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고대 세계에서 엄청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건설자였던 느부갓네살은 수호신 마르둑에게 이 탑을 바치면서 동시에 제국의 위용도 만천하에 드러냈을 것이고, 옥탑에 마련한 마르둑의 신전에 올라가 그를 섬기면서 동시에 그것으로 자신의 권좌도 굳건하게 지켜갔을 것이다. 바벨은 이렇게 역사에서 거대한 지배체제와 그 위에 군림하는 종교의 형상이 되었다.

▲ 재구성된 바벨탑 모습. 석비 오른쪽 위에 느부갓네살 2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방송 화면 캡처.

성경에서 바벨탑을 쌓는 정황도 그러하다. 대홍수를 겪은 노아의 후손은 동방을 떠나 한 곳에 정착하려고 한다. 그곳은 지형적으로 계곡 가운데 있는 넓은 공간, 곧 개활지(開豁地)다. 장소부터 심상치 않다. 성경에 나타나는 계곡이란 하나같이 음울하고, 거기서는 대개 전쟁이 벌어지거나 아니면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시날 땅의 우상은 그들의 명예였다. 그들은 만천하에 이름을 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손에 잡은 것 같았던 그것은 결국 한 때의 물거품이 되고 만다. 명예는 권력과 부의 동업자가 아닌가? 그것들의 저변에는 늘 보이지 않는 욕망이 들끓는다. 그럴듯한 명분 앞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강력한 체제를 형성하지만, 각자의 이익 앞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추악한 인간본성이 아닌가? 바벨은 바로 그것의 형상이다.

성경 수많은 곳에서 바벨이 언급된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 별들보다 높은 곳의 권좌를 차지해야지!” 그러나 그것은 한갓 꿈에 불과하고, 결과는 참담하다. “너는 스올 곧 구덩이 맨 밑바닥에 떨어질 것이다”(사 14.13-15). 바벨은 지옥의 표상이다. 그래서 성경이 마감되는 지점에서는 거대한 성 바벨은 결국 무너지고, 더럽고 가증한 것들이 모여드는 폐허가 된다(계 18.2). 성경이 바벨의 형상을 경계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예루살렘 도상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권좌를 원하고 제자들이 자리다툼으로 소란했을 때, 예수는 권력자들의 모습을 경계하며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크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라”(막 10.43,44).

교만의 극치와 탐욕의 체제 위에 군림하는 작은 교황들이 득실대는 현실에서, 18일 날아간 프란치스코가 닷새 동안 이 땅에서 보여준 것은 섬기는 종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끊이지 않는 메아리로 다가온다.

김구 (한신대 외래교수)

김구(한신대 외래교수)  fonsjugi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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