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막상 시골에 내려와 살려고 하니, 가정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 우리집 앞에 전개되는 석양

첫째는 생존하고 계신 모친님에 대한 염려요, 둘째는 아내와의 동거(同居)문제였다. 첫째 문제는 모친님께서 연노하시지만 아직은 건강하게 홀로 살고 계셔서 잠정적으로 해결되었다. 둘째 문제는 내 아들과 연계하여 고려하게 되는데, 우리에게는 대학원에 재학 중이며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어렵게 한 것은 내가 퇴임하면서 계획한 귀촌(歸村)의 시기를 늦추든가 아니면 곧바로 내려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우리 집사람에게 어려움을 준 것은 나와 함께 시골에서 동거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아들의 학업과 유학을 도우며 서울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인가였다. 우리 집사람은 서울에 있는 것을 선택했다. 남는 것은 나의 거취문제다.

내가 평상시 소중히 여기고 있는 신념은 ‘인생의 황금기는 정년퇴임 후 10년이다.’라는 생각이다. 정년퇴임을 하였기에 의식주의 기본적인 것은 해결될 것이고 정년 후 10년, 즉 75세까지는 육체적 행동에 자유스러울 것으로 예측하기 때문이다. 이 인생의 기간 동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해 보고 싶다’는 욕망을 감출 수 없다. 확트인 바다의 해변을 바라보며 사는 것. 험준한 바위와 파도를 벗 삼아 낚시를 즐기는 것.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아보는 것. 이런 소박한 꿈이다. 이 같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우리 집사람과 의논했고 준비해 왔다. 집사람의 동의는 받아 놓았는데, 그것을 퇴임과 더불어 할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 고흥반도의 석양과 여인(필자의 부인)

나의 결의(決意)는 단호했다. 꿈의 실현은 늦출 수 없다는 단호한 맘가짐이다. 그 결과, 나는 퇴임과 더불어 고흥반도의 해변 농가에서 혼자 생활하기 시작했다. 벌써 2년 반을 넘겼다. 내가 서울을 떠날 때, 우리 집사람이 내게 하던 말이 생생하다. “1주일도 못 가서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비아냥거림이다. 그런데 1주를 넘기고 2주를 넘기고 한 달을 넘기는 것을 보고는 놀래 갔고, “아니, 저 사람 봐, 나 없이도 혼자 살 수 있겠네!” 하는 것이다. 평상시 우리 집사람은 “당신을 먼저 보내고 나서, 내가 가야 맘이 편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말이 바뀌어 “내가 먼저 가도 되겠네.” 하고 맘 놓는 형편이다.

남자가 혼자 사는 것 가운데 가장 귀찮고 어려운 것은 식사 문제다. 밥을 스스로 지어서 먹고 살아 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곱게 늙으려면 혼자 사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언젠가는 혼자 남는다는 것을 의식하고 미리 준비해야 한다. 혼자 사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식사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내가 우리 집사람과 살면서 가장 충격적인 말을 들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다. 식사 때가 되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집사람은 식사를 준비하고 나서, 나에게 “식사하러 오세요!”하고 부른다. 수저 라도 챙겨놓지 않는 나에게 우리 집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엌일은 당신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네요. 당신은 부엌일에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부엌일에 무능해요.”

▲ 우리 시골집 부엌에서 바라본 전경. 이웃집들과 바닷가 모습이 보인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능이란 ‘능력이 없다’는 말인데,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내가 무능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무능”이란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자손심이 상하고 내 자신에 대한 모욕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거기다가 내가 먹는 것을 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꼈다. 그 후로 부엌일에 조금씩 관심을 가져오다가 퇴임 전후로는 이 일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낚시하면서 생선 포 뜨는 것, 지리나 매운탕 끓여 먹던 것이 한국 음식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혼자 살려면, 아니 한국의 남자가 자립적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부엌일에서 자유스러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얹혀사는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년기에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은 더더욱 불가하다. 한국의 나이든 젊은이들이여, 언제까지 “삼식이”이라 구박받고, 집 안에 틀어박힌 ‘방콕 생활’에 안주하려 하는가? 인생의 주기마다 각각의 독자적 삶이 있듯, 나이에 걸맞는 자기인생을 찾아 나설 의사는 없는가?

성서에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땅에서 매인다”는 것은 먹고 사는 일상에 완전히 매여 사는 삶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하늘에 푸는 것”은 (일상이 우리를 매이게 하지만, 이것을 넘어서) 영혼의 자유함을 갈망하고 번민하는 자의 영역이 된다. 소위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 고민하는 소크라테스’를 선택하는 인생길이라 할 수 있다.

정년퇴임한 내게 있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이것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건강함 그 자체로 행복하다. 일용할 양식이 있기에 마음이 평안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연환경이 있기에 행복하다.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만드는 취미가 있기에 즐겁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 수 있기에 하루하루가 재미있다. 남들이 보기에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혼자 행복해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나의 인생’이 있기에 그 자체로 행복하다.

2014년 8월 15일
고흥반도 해변의 시골집에서

박 명 철(전 연세대교수)  mcpark@yonsei.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