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날, 꽃과 같은 아이들을 바다에 묻은 지 오래, 절기는 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르고 있다. 벌써 거리는 이른 추석 탓에 들뜬 분위기이나 광화문의 단식단과 청운동의 유가족에게 이 가을 명절마저 실종될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가 어찌 조상 낯을 대면하겠으며 자식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남은 이들이 어찌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지난여름 땡볕과 장마에도 광화문을 지켜준 선한 이웃들에게도 이 가을이 너무도 허망할 듯싶다. 진실 밝혀 한을 풀고 유족들을 일상으로 복귀시키지 못한 탓이다. 그래도 한 주간 앞둔 추석을 떠올리며 흘린 피와 땀의 결실을 간절히 기대해 본다. 그 시점까지도 유족과 전국 곳곳의 선한 시민들이 이렇듯 길거리로 내몰릴 경우 우리는 정말 ‘이것이 국가인가?’를 중히 되묻게 될 것이다.

정신없어 잊고 있었으나 올해가 갑오 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 되는 때이다. 60년이 두 번 지난 지금 그 혁명의 기운이 새롭게 움트는 뜻있는 시점이다. 올 초 정부는 갑오경장만을 기념했을 분 동학혁명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같은 해의 사건이긴 했으나 경장이 정부, 더구나 일본 주도하의 상향식 개혁이었던 반면 동학은 민중들, 오늘의 시민들의 희생에서 비롯된 거룩한 이 땅의 역사였다. 경장은 성공한 듯 했으나 실패했고 혁명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여 오늘 광화문에서도 그 뜻이 펼쳐지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 정부주도의 개혁은 소수 기득권자를 위한 것이었고 혁명은 그에 대한 민중, 시민들의 저항으로서 살고자 하는 의지표명이었다. 자식 잃은 부모의 아픔(慘慽)을 하찮게 여기는 이 나라 정부가 아무리 국가개조를 외친다 한들 2014년의 경장은 실패할 것이고 광화문 혁명은 성공할 것이다.

곳곳에서 유족과 그들 아픈 마음에 공감하는 시민들을 타자 화하는 정부의 차디찬 눈길을 마주한다. 거짓 정보를 흘려 유족을 조롱했고 사람 시켜 거룩한 단식 뜻을 훼손시켰으며 특정 단체를 동원해 여론을 흩뿌려 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용서받지 못할 것은 유족들에 대한 주도면밀한 이간질 작업이다. 단원고 희생자들과 일반 희생자들 입장이 갈라진 것도 권력해바라기들인 집권 정치가들의 농간 탓이다. 경제 불황도 거리의 무질서도 오로지 세월호 유족들 때문이라 호도한다.

매일 최선을 다 하겠다 다짐하며 사실에 근접해 보도하는 손석희 사장을 손보려 하기에 걱정이다. 정작 정부는 역사왜곡에 앞장선 인사를 KBS 이사장에 앉히려 하면서 말이다. 이렇듯 자신들 잘못을 감춰 기득권을 유지코자 정부는 백성들을 상대로 못할 짓 마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중, 시민들은 이것이 나라인가를 물었고 그 분노가 임계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정점을 찍고 수그러들었으나 영화 <명량> 속 대사들이 시대적 아픔에 위안이 되었었다. 충(忠)이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것이란 말이 그중 하나로 가슴을 울렸다. 하지만 정작 이순신의 고민 ‘어찌 백성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을까?’란 대사에는 그리 주목하지 못한 것 같다. 열두 척의 배만을 갖고 전장에 임하는 이순신을 보며 백성들의 불안과 걱정이 얼마나 지대했을까? 싸움 자체를 포기하고 싶고 지쳐 도망가고픈 백성들이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 정부는 지금 이런 우리의 속내를 백번 이용코자 한다. 피로감을 더욱 극대화 시킬 전술을 연구하고 종편언론을 통해 허튼 소리를 쏟아내며 요지부동한 권력모습을 맘껏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비단 열두 척의 배만 남았다 할지라도 삶의 바닥까지 스며든 민중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자연의 도움 역시도 백성들의 합쳐진 뜻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 <명량>이 주는 교훈이었다. 이제 우리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 부추겨진 피로감을 새로운 용기로 바꿔야 하는 전환점에 이르렀다. 이를 고민하는 이순신과 같은 지도자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 각자가 이순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광화문 천막 뒷전에서 이순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이유라 하겠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46일 단식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감당키 어려운 인고의 시간을 견뎠을 터, 그 힘은 오로지 자식 죽음의 이유를 알고자하는 진실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했다. 그 힘이 그로 하여금 대통령의 냉혈 함과 맞서게 했고 무관심, 약속 파괴를 맘껏 질타할 수 있었다. 지난 46일간 무소불위의 대통령과 맞섰던 존재는 유민 아빠 오로지 그뿐 이었다. 과거 선조가 이순신을 버렸듯 대통령이 김영오를 내쳤으나 정작 나라를 지키고 이 땅의 미래를 연 것은 오늘의 이순신, 김영오가 아니겠는가? 최고 권력과 맞선 그의 단식은 수많은 이들을 두려움과 피로감에서 탈출시켰다. 많은 정치가들을 광화문으로 불러냈고 몇 만에 이르는 자발적 동조 단식자들을 세웠으니 그야말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 우리 시대의 장수이자 의병이었고 예언자라 하겠다. 더구나 자신의 환갑날 그를 대신하여 40일 단식에 들어간 한 목사님이 있으니 우리 또한 두려움을 벗고 맞설 때가 된 것이다.

▲ 지난 6월 10일 대학생들이 청와대 총리공관앞에서 대통령에게 세월호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이윤보다 인간을"이라고 외치고 있다.ⓒ에큐메니안

오늘 우리의 맞섬과 대듦은 결코 잘못된 것일 수 없다. 이는 무엇보다 가장 보편적인 인간성을 지켜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까닭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억울하게 당한 이들의 한(限)을 풀어주는 것이 최소한 국가의 존재이유일 것이다. 만약 그들 한이 이 땅을 유리하도록 방치한다면 그의 앞날 역시 좋을 수 없다. 새로이 입법을 요구하는 것은 진실규명을 목적한 일이기에 얼마든지 그리 되어야 옳다. 이미 수백 명의 법학자들이 기소, 수사권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았던가? 비슷한 수의 심리학자들의 호소도 이채로웠으나 설득력 있지 않았던가? 백번 양보하여 다시 묻는다. 법체계 흔들릴 것을 염려하는 당신들은 그간 얼마나 불법을 저질렀고 법을 바꿔 나라를 통째로 삼켜버리지 않았던가? 친일로부터 독재로 이어지는 민족의 불행한 과거사가 세월호 참사 곁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민족 정통성을 지우려 했고 독재를 미화시키더니 이제 세월호 기억조차 수장시키려 하니 어찌 우리가 맞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서적 시각에서도 맞섬과 대듦은 의당 옳다. 부활의 예수가 갈릴리로 가라 한 것은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선포된 까닭이다. 세상의 중심이 약자에게 있다 하며 그들 하소연을 들어준 예수의 삶을 부활 이후에도 지속하라는 명령이었다. 함석헌의 말대로 맞섬과 대듦은 살아있는 자의 모습이다. 부활의 생명을 덧입었다면 우리 모두 그리 살 일이다. 아무리 정부가 훼방을 놀고 그답지 못한 장난질 쳤어도 세상의 민심은 할 만하니 대들어 볼 것을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한마디로 재협상하라는 것이다. 요지부동의 정권에 대해 그것이 옳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의 혁명은 인류 보편적으로, 헌법상으로 무엇보다 성서적으로 정당하다. 무엇이 두렵겠는가?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 유족을 살리고 이 땅을 구원하며 ‘세월호 세대’들에게 그들 미래를 다시 돌려주자. 이것이 시대를 사는 성찰적 지성인, 신앙인들의 피할 수 없는 사명이리라.

이정배 교수(감신대)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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