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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게 하는 사람<정현진의 출애굽기와 노닐기>출애굽기 4장-②
정현진 목사 | 승인 2014.09.04 15:23

이번 <정현진 목사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네번째 순서는 분량이 많은 관계로 두차례에 나눠서 싣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설교힌트 찾기

1) 하나님을 알게 하는 사람 (출 4:16-17, 20)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파라오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라고 하시자, 그는 “내가 누구입니까”(출 3:11) 라는 물음과 함께 백성이 자신에게 “너를 보낸 그 신이 누구인가”라고 물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이 물음들을 거듭 되물으며 그 대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곧 신앙생활이다. 우리는 이 물음에서 얻어지는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섬기고 고백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누구인지에 관한 대답을 늘 되풀이 물으며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화와 다원주의 물결이 범람하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정체성,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 예수님을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도 덩달아 희미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주시는 사명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에 대해 여러 차례 머뭇거리던 모세에게 ‘그가(아론이)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출 4:14), 너는 그(아론)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출 4:16b)’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출 7:1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이는 무슨 뜻인가?

또 모세는 손에 지팡이를 들었다. 이것은 출 4:2-4에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그런데도 이제 그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교회와 만나는 사람의 마음과 얼굴에 웃음이 흐르게 하는 교회, 사역자 및 성도와 만나는 사람 마음에 평화가 깃들게 하는 사람, 하나님의 평화와 목적을 보여주는 사람,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다. 하나님은 성도를 이렇게 쓰시고자 한다: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 재칼과 코브라가 끄는 배에 오른 태양신 레가 파도모양으로 등장하는 뱀신(아포피스)와 싸우는 세트신의 도움으로 어둠의 세계를 헤쳐나가는 장면(주전 1085-950 21왕조)
2) 뱀의 꼬리를 잡으라! (출 4:1-9)

출애굽기 3-4장에는 표적(이적), 기사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온다. 구약성경에 이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낱말 세 가지가 여기도 등장한다(성경해설 참조).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말씀하실 때 그대로 하였더니, 그것이 뱀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출 4:4a) 고 말씀하셨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 나를 죽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뱀의 목을 잡지 않고 꼬리를 잡으면 뱀에게 물려 죽습니다’ 라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도 지체없이(!) ‘그가 손을 내밀어’(출 4:4b) 그것을 잡았다. 그런데도 뱀에 물리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 뱀을 지팡이로 변하게 하셨던 것이다. 뱀을 잡을 때에는 그 목덜미를 잡는다는 일반상식에서 벗어난 명령, 그러나 순종하였더니 하나님 능력과 은총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 등 제자 7명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날 아침(새벽)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 와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 21:6a). 그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물을 어찌 오른쪽만 빼놓고 던졌겠는가? 깊은 곳, 얕은 곳, 오른쪽, 왼쪽, 앞, 뒤 - 그물을 던져보지 않은 곳은 아마 한 군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바닷가 출신도 아니요,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분도 아니다. 내륙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산동네 나사렛에서 자라셨다. 그분 직업도 고기잡이와는 한참 거리가 먼 목수였다. 그런 예수님이 밤새도록 갈릴리 바다를 샅샅이 뒤진 제자들, 물고기 잡는데 귀신같은 그들에게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한 번 더 던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씀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군말없이 그 말씀에 따랐다.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증언한다: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 21:6b). 조금 전까지 물고기의 씨가 아예 말라버린 것 같던 바로 그 바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만일 그 새벽녘에 건져 올린 물고기가 귀하다면, 그것은 물고기 양이 많아서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과 그 결과 소득도 의미도 없이 사라져버릴 뻔하였던 그날이 제자들에게 매우 뜻깊은 날로 회복되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당시, 그를 태운 배가 그레데 해안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이 뵈닉스로 가 겨울을 나려하자, 사도 바울은 커다란 풍랑이 일 것을 예고하며 이를 만류하였다(행 27:10 이번 항해가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그러나 이 항해를 책임지는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행 27:11). 그런데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났다. 이 두 항구 사이가 약 3시간 거리이니, 불과 한 두 시간 만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영적인 지도와 혜안보다 세상적인 경험이나 판단을 더 앞세운 결과, 큰 낭패를 당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미 주어진 기적을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기적을 갈망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 심령과 생활에 어떻게 작용(적용) 되고 있으며,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 이런 물음을 안고 출 4:29-31을 읽으니, 그 사람들이 참 부럽다:

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3) 믿음과 출애굽

출애굽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믿는 믿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사실은 출 4:1-9에 5 차례 쓰인 믿는다(아만)는 말에서 엿볼 수 있다(1, 5, 8[x2], 9; 참조 31절).

히브리어 아멘/ 아만은 본디 히브리 사람만 쓰는 아주 독특한 말이었다. 시리아 말과 아람 말에도 이 말이 나오지만, 그것은 히브리말의 영향을 받아 나중에 생긴 것이다. 그 뜻은 본디 시간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은 중요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밀고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하나님 계획에 합당한 일일 때, 갖은 방해와 장애물도 꾸준히 오래 지속하는 믿음의 사람의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뜻이 “버티다, 꾸준하다, 견고하다, 성실(신실, 정직)하다, 굳건하다, 신뢰할 만하다”로 발전한 것이다.

기적 또는 이적을 나타내는 중요한 낱말 세 가지가 출 3-4장에 8번 나온다(오트 3:12; 4:8x2, 9, 17, 27; 니플라오트팔라, 펠레 3:20; 모페트 4:21). 사실 출애굽기에서 가장 큰 기적은 출애굽 사건 그 자체이다. 이 기적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어떤 경우에도 그 분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기적은 한편으로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선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에게 천명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표적(기적)을 믿는다’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의 어떤 사건에 기적적으로 개입하신 사실을 한번만 믿으면, 그 믿음이 그 사람의 의식과 생활에 오랫동안 꾸준히 작용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기적을 믿기에, 주어진 목적과 사명에 끝까지 충실한 사람이 곧 믿음의 사람이다 (갈 6:9 참조).

4) 기억력의 치유

기억력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아주 고귀한 선물이다. 그렇지만 사용하기에 따라서, 이것은 자칫 우리 인생에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생전 처음 하나님을 만난 모세, 하나님이 만들어 가실 미래에 동역자로 부름받은 모세가 출 3-4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그런 예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가 이렇게까지 저항(?)한 것은 어쩌면 지난 날 자신이 겪은 실패가 생각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겪은 처절한 실패는, 마치 옷에 묻은 얼룩처럼, 그 기억 속에 박혀 있으면서, 새로운 일에 착수하려 할 때마다 그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지난 날 모세는 실패한 사람이다. 그 실패의 여파로 오랜 세월 동안 망명 생활을 하였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을 때, 그에게는 그 옛날의 패기도 의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이집트 왕실 사람도, 동포가 당하는 불의에 의분을 느끼고 개입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장인의 양을 키우며 세월을 죽이는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은 사람이 보는 눈과 다르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과 다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는 눈과도 다르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런 과거를 모른 채, 그리고 그의 현재 상태나, 인간적인 약점, 그리고 그가 처한 환경을 모른 채 그를 부르셨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것 - 약점과 장점, 환경과 조건을 다 아셨다. 그리고도 모세를 부르셨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성패, 더 나아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지난 날 우리의 실패와 과오에 대한 기억을 치유해 주신다. 그리고 족쇄가 되었고 아팠던 그 기억을 뛰어넘어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신다. 하나님 기억 속에는 실패자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주신 자신의 약속과 목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5) 선택은 하나님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신 이유를 우리는 잘 모른다. 억지로 이유를 갖다 붙이자면, 한  두 가지를 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파라오 친딸의 양자가 된 모세는 궁중에서 이집트의 모든 학문을 배우고 익히며 말과 행동이 뛰어났다(행 7:22).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모세 말고 누가 또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이유를 들면, 이집트왕궁에서 양육받은 사람이 노예인 히브리인의 지도자가 되거나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에는 그 인생여정이 너무나 다르다는 등 그 반대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말로는 설득력이 약하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를 쓰시고자 하셔서, 하나님이 그 사람 인생의 주인이시므로, 그를 부르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그를 부르시고, 그를 사명의 자리로 보내고자 하셨다. 이에 대한 모세의 저항(불순종)도 만만치 않았지만,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그보다 더 집요하였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다른 믿음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쨌거나 모세가 부름받은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는 모른다고 대답하거나, 하나님만 아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6) 위기(시험)를 이겨내야 제대로 쓰임받는다 (출 4:24-26)

이 주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전적인 주제이다. 성경 안팎에서 큰일에 쓰임받은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은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이나 실패의 위기 또는 시험을 극복해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맹자는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그릇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천장강대임어사인야) 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身行 拂亂其所爲 (기심지 고기근골 아기체부 궁핍기신행  불난기소위) 動心忍性 增益其小能 (동심인성 증익기소능).}

하나님은 사람은 쓰시기 전에 먼저 시험을 통과하게 하신다. 아브라함과 욥과 요셉에게도 그리하셨다: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 105: 17-19)

위기와 시험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온다. 심지어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셨다(마 4:1-11; 막 1:12-13; 눅 4:1-13). 때로는 그 원인과 이유를 알기에 자책하거나 누군가를 향해 원망을 하거나 억울해 한다.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곤혹스러워하거나 침체에 빠진다.

여기서 모세와 그 가족이 당하는 위기의 이유나 성격을 아무도 해명할 수 없다. 그것을 극복해내는 과정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성경의 다른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쓰임을 받기 전에 위기에 처하였듯이, 모세와 그 가족도 지금 그런 처지에 놓였다. 사실 인간에게 다가오는 위기와 그 극복의 과정은 수수께끼 중에 수수께끼다. 이런 뜻에서 그 원인과 이유, 또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명쾌하게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주어진 위기나 시험에 숨어있는 하나님 목적을 신뢰하는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그 위기(시험)에 대처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쓰임받는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 주신다.

7) 동역자를 붙여주시는 하나님(출 4:14-17, 27-31)

독불장군(獨不將軍)이란 말이 있다. 혼자서는 그 누구도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경과 교회사에 이런 예가 수두룩하게 많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을 보내주시고, 나중에 여호수아를, 그리고 72장로들과 천부장, 백부장, 십부장 등을 붙여주셨다. 다윗 임금에게는 나단을, 예언자 예레미야에게는 바룩을 각각 보내주셨다. 사도 바울에게는 바나바, 누가, 마가, 디모데 등 여러 동역자를 붙여주셨다.

동역자를 보내주시고 함께 하나님 뜻을 이루어 나가게 하시는 은총은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된 시대에 더욱 더 필요하다. 인간해방 또는 역사의 해방의 길은 탁월한 지도자 혼자서 닦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공동체와 그 리더들이 함께 이루어가는 것이다.

8) 인간에게 있는 약점은 다른 사람과 힘을 합치라는 하나님의 뜻

모세가 자신을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그에게 붙여주셨다. 그의 언어장애를 치유하여 그가 말을 잘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대신에. 이로써 하나님은 탁월한 사람인 모세조차도 혼자서는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다. 사실 하나님에게 모세의 언어장애를 치유・회복시키시는 것은 식은 죽먹기처럼 쉬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를 치유하는 대신에, 아론을 그에게 세워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는 놀랍고도 은혜로운 것이다.

9) 양달과 응달

자신의 입이 둔하다 (언변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뒷걸음질치는 모세의 행동은 아론을 등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론은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다. 이런 아론의 등장은 모세에게 일단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주어진 것 같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으면, 거기에 문제도 끼어들기 마련이다. 나중에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모의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아론은 미끈한 말솜씨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였다 (출 32장). 그리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모세의 권위에 그럴듯한 말로 도전하였다 (민 12:1-2). 이 때 모세의 반응은 나중에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아니 아론까지 갈 것도 없다. 하나님의 소명에 흔괘히 따르지 않았던 대가를 나중에 모세 자신이 톡톡히 치러야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여러 차례 거절하던 모세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는 자신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해야만 하였다. 이렇게 사람 일에는 양달과 응달 (빛과 그늘)이 공존하는가 보다. 세상에는 완전히 이롭기만 한 것도, 완벽하게 손해만 되는 일도 없기 마련이다. 이 때 모세가 차라리 이렇게 반응하였으면,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하나님, 저의 형 아론이 개인적으로는 저보다 뛰어납니다. 저는 언변도 딸리고 다른 능력도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사람이 저라면, 저를 사용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신다면, 그리고 저의 입술에 동행하신다면, 아마 이다지 재주없는 저도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제게 ‘가라’ 명령하십시오 (V. Hamilton, 76쪽 참조).

때로는 다른 사람과 합력하는 것이, 때로는 단독자의 모습으로 서는 것 – 이 둘이 다 우리에게 필요하다. 어느 때에 그리해야 할지를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라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최선의 길이다.

10) 사역자를 파송하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모세는 먼저 장인 이드로에게 허락을 청하였다. 미디안의 제사장이며 일곱 딸을 둔 한 가문의 족장인 이드로의 입장에서 큰 딸의 가족을 먼 곳으로 보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사위에게 몹쓸 짓을 한, 야곱의 장인이자 외삼촌인 라반과는 달리 모세를 선대하였다. 비록 인간적으로는 서운하고 섭섭하였겠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떠나는 사위 모세를 위해 복을 빌어주는 이드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감이 된다. 이드로처럼, 우리도 자신과 가까운 사람 또는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더 알맞은 곳, 혹은 꼭 필요로 하는 곳(삶의 방향)으로 가도록 기꺼이 허락하고 내어줄 수 있을 때, 그리고 떠나 보내면서 그냥 보내지 않고 진심을 담아 샬롬의 복을 빌어주고 떠나보낼 수 있다면, 그는 사실상 떠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드로는 “평안히 가시게나! 샬롬!”하면서 사위와 딸, 그 가족을 먼 곳, 위험한 곳으로 보냈다. 아마 육체적으로는 멀리 떠나갔어도, 그들은 이드로의 마음속에서 평생 함께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야곱에 대한 그의 외삼촌 라반의 태도와 사뭇 다르다. 사명받은 사람을 그가 활동하기에 가장 알맞은 곳, 가장 필요한 곳으로 파송하는 일은 교회의 오랜 전통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역시 중요하다.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행 13:1-3)

11) 대처할 지혜(대답할 말)를 주시는 분

모세는 말이 어눌한 사람이다. 이는 자신이 파라오에 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가 두려워서 한 핑계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말 잘하는 아론을 그에게 붙여주신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에 더 까깝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결정적인 약점이 될 수 없다. 사명자는 다양한 사람과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상황을 만나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하면 그것조차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라는 사람과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입에도 함께 계시는 분이다(출 4:12). 그에게 상황에 알맞은 말을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도 사나운 이리와 같이 거친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며,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마 10:19) 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사도 바울 성인은 자신의 어눌한 언변에 기 죽지 아니하고, (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라고 여기며 담대하게 사명을 수행하였다(고후 10:10; 11:6 참조).

12) 채워주시는 하나님 (출 4ㅣ17)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에 모세는 부족한 사람이다. 그 자신이 이런 사실을 잘 알뿐만 아니라, 우리가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도 모세가 하는 말이 단순한 핑계가 아니라, 거대한 제국 이집트와 그 나라를 다스리는 파라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으며 그 아래서 노예근성을  지닌 이스라엘 자손들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부족한 (미약한) 부분을 채워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이적들)을 행할지니라.” 그렇다. 하나님은 주어진 과제와 현실에 비추어 우리가 턱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잘 아신다. 그러기에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우리 인생길에 동행하며 인도하시는 것이다.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13) 돌발사고 (출 4:24-26)

인생길 곳곳에 사고와 사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직접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피부로 와 닿지 않거나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것의 해당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깜짝 놀라며, 심하게 괴로워하며 마치 딴 세상에 있는 양 행동한다. 그러나 우리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위험하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큰 두려움없이 일상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신비로운 일이다. 위기가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수수께끼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창세이래 단 한번도 변함없이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도, 우리가 먹고 마시며 일생생활을 꾸준히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대단히 큰 신비요, 은혜이다.

정현진 (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정현진 목사  psalm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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