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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과 성서②<이영재의 구약이야기> 토라는 국가해체를 권고한다
이영재(Ph.D., 전주화평교회) | 승인 2014.09.17 12:19

이영재 박사의 구약이야기 세번째 순서로 '평화통일과 성서'를 연재합니다. 지면관계로 두차례에 걸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편집자 주

평화통일과 성서① : 들어가는말  1.국가와 문명  2. 폭력과 문명  3.민족주의

평화통일과 성서② : 4. 대안사회를 위한 통일운동 - 국가를 넘어서  5. 전쟁과 평화: 거룩한 전쟁  6. 계약법에 나타난 샬롬 : 손해배상법  7. 에스겔의 통일환상

4. 대안사회를 위한 통일운동 - 국가를 넘어서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는 용어는 ‘코스모스’란 단어다. ('코스모스'란 용어는 요한복음에만 80회 언급된다. 이 빈도수는 마태복음에 9회, 마가복음에 3회, 누가복음에 3회, 사도행전에 1회 언급된 것에 비하면 매우 현저한 빈도수이다. 게다가 요한일서에 무려 23회나 언급된다.  요한이서에 1회, 요한계시록에 3회 언급된다. 요한의 문집에만 코스모스는 107회 언급된다.)

한글개역은 이것을 ‘세상’이라고 일관되게 번역했다. 헬레니즘에서 <코스모스>는 도시를 하나의 소우주에 비유하여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의미하는 용어였다. 헬레니즘 시대를 살았던 도시문명의 예찬론자들은 도시생활에서 질서를 창조하고 조화로운 삶을 구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코스모스는 도시문명에서 발달한 가치관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요한은 이 코스모스란 헬레니스트 용어를 사용하여 당대의 도시문명과 로마제국을 질타하고 있다. 요한신학의 문명비판의 배후에는 오경에 비평하는 도시문명이 깔려 있다.

참 빛이 세상에 와서 비추었으나 죄로 물든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고 빛보다도 어둠을 더 사랑했다(요1:9~10; 3:19; 8:12; 9:5; 11:9: 12:46).

예수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요1:29).

하나님은 죄 많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요3:16~17; 10:36; 11:27; 12:47; 요일2:2; 4:9, 14).

그러므로 예수는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요4:42).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달하신다(요8:26).

말씀은 하나님의 주신 떡이다. 말씀이신 예수의 살을 먹는 자는 죽음에 갇힌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요6:33, 51).

그러나 예수가 세상을 보고 악하다고 증언하므로 세상은 예수를 미워했다(요7:7; 15:18~19; 17:14; 요일3:1, 13).

세상은 아래에서 났지만 예수는 위에서 났기 때문에 예수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요8:23; 13:1; 14:17, 19; 16:28; 17:5~6, 11, 13, 24).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하며(요3:3)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요일2:15~17; 4:3~6)

세상에 대하여 한 알의 밀알로 죽어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요12:25).

예수로 인해서 세상의 왕이 쫓겨나며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요12:31; 16:8, 11; 요일4:19).

예수는 이미 세상을 이기셨으므로(요16:33; 요일5:4~6)

하나님의 백성에게 세상과는 다른 참된 평화를 주신다(요4:27).

예수는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서 늘 기도하시며(요17:9),

믿는 사람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신다(요17:18, 21, 23).

참된 왕이신 예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37). 

이상의 문장에서 ‘세상’이란 용어를 도시나 국가로 바꾸어 읽으면 그 의미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성서는 가르친다. 가인의 에녹도성 이후 도시문명은 노아시대의 대홍수 심판으로 종식되었으나 심판 이후에 다시 일어난 함의 니므롯 도시국가들이 지금까지 세상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이들 국가들의 폭력으로 인하여 망가졌다고.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도시국가들을 모조리 없애버리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늘에서 하나님 자신이 만드신 새로운 도시를 이 땅에 내려주신다. 그 도시에는 생명수가 도심의 중앙통을 강물처럼 흐르며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들이 길가의 가로수들로 푸르게 자랄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하나님의 도성이 아름답게 완성된다. 이와 같이 창세기로부터 요한신학을 거쳐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도시들과 그 도시들의 연합체로 성립한 국가들이 심판을 받을 것임을 성서는 일관되게 예언하고 있다. 국가들이 폭력으로 무장하여 전쟁을 일삼아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국가무장론의 필연성을 현실로 인정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통일운동도 남측과 북측이 다같이 무기를 내려놓고 군대를 해산하며 대형화된 국가체제를 작은 공동체들로 잘게 나누어 지방자치의 민주체제로 다시 세우는 전망을 제시할 때 교회의 사회참여운동의 내용이 될 수 있다. 교회는 부강한 통일국가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비무장 영구평화지대로 선포하고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안사회를 향하여 국가체제를 해체하는 전망을 통일운동진영에 제시해야 할 것이다.


5. 전쟁과 평화: 거룩한 전쟁

국가들과 그 국가의 기업들 간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서 군비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군수산업이 발전하여 무기생산량이 과잉되고 무기개발이 첨단화되었다. 한편 생산한 무기를 소비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여 약소국 약소민족들 사이에 전쟁을 조장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한반도에서도 무기산업의 메카니즘에 의한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성서의 메시지를 크게 선포해야 할 것이다.

성서는 야훼의 거룩한 전쟁(聖戰)을 선포한다. 이에 대한 일반인의 오해가 있다. 야훼 하나님은 전쟁을 유발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폭력의 하나님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교회는 성서에 나타난 ‘야훼의 거룩한 전쟁’ 사상을 올바르게 주석하여 그 오해를 잠식시켜야 한다. 야훼의 거룩한 전쟁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헤렘~r,xe>에 있다. 헤렘은 야훼께 바친 물건으로서 전쟁에서 개인이 사취해서는 안되는 전리품이다. 여리고 도성을 함락시켰을 때 아간이 금덩어리와 은덩어리와 시날산 외투를 사취하여 숨겼다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자 마침내 들통이 나서 죽임을 당했다(수7:21). 판관 기드온도 전리품을 사취하는 죄를 범했으며, 다윗도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후 전리품을 사취하는 죄를 범했다.

세속적인 전쟁은 전리품을 취득하고 포로를 노예로 끌어오며 남의 영토를 빼앗아 소유하려는 목적으로 발발한다. 전쟁에서 얻은 소득을 가지고 용병으로 고용한 군사들에게 보상으로 삯을 주어야 한다. 아브라함 시대에 그돌라오멜 연합군이 소돔 도성 연합군과 전쟁을 벌였을 때에도 전쟁의 목적은 재화의 취득에 있었다. 조공을 바치지 않으려고 하자 종주국이 쳐들어 온 것이다. 롯과 그 가족은 소돔 도성의 온 성민들과 더불어 포로로 잡혀서 끌려갔다(창14:12). 아브라함이 추격하여 모든 빼앗긴 것들과 롯과 그 가족을 되찾아 왔으나 정작 아브라함 자신은 전리품을 하나도 사취하지 않고 소돔 왕에게 돌려주었다(창14:23). 아무 전리품도 취득하지 못하게 하면 재물에 뜻을 둔 세속적인 전쟁은 의미가 없고 용병의 고용도 불가능하니 전쟁이 성립하지도 않는다.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세상의 전쟁과 구별된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여 평화를 이루려는 목적으로 싸우는 사상과 믿음의 전쟁이다.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무기가 아니라 오로지 ‘소리’<콜>로 싸우는 전쟁이다. 즉 말씀으로써 원수의 도성을 무너뜨리는 구별된 전쟁이다. 야훼 하나님은 말씀의 전쟁에서 늘 승리를 거두시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임한다는 신학은 오경에 가득 보도된다. 오경의 전쟁이야기들은 모두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다. 신명기법의 전쟁법은 징병에서부터 세상의 징병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신20:5~8). 새 집을 건축한 자와 포도원을 수확을 앞두고 있는 자와 이제 약혼한 자, 그리고 겁이 나는 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규정한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가 야훼의 전쟁에 합당하다. 기드온의 정병은 모두 소심하고 폭력에 무능한 자들이었다. 신명기의 전쟁법과 기드온의 정병 이야기도 역시 야훼의 전쟁이 보통의 전쟁이 아니라 말씀으로 치루는 전쟁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서는 낭만주의적인 평화를 말하지 않는다. 세속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에 의해서 계속 부정당하는 추이 속에 세계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고 성서는 외친다. 교회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폭력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여 승리를 거두는 방법을 선택한다.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말씀의 전쟁임을 오경은 분명하게 제시한다.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한 교회의 선교도 오로지 말씀으로만 나아가야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 오늘날에도 현시될 것이다. 거룩한 전쟁을 치룰 때 북측과 남측의 죄성을 극복하고 교회는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국가권력이 추동하는 어떠한 정치적 프로그램에도 궁극적인 기대를 걸어는 안 된다.


6. 계약법에 나타난 샬롬 : 손해배상법

시내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법 중에 소위 ‘계약법’이란 법이 출애굽기 20:22~23:33에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법이 규정되어 있다. 갑이 을에게 손해를 끼쳐서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관계를 정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을이 입은 손해를 갑이 갚아주어야 한다는 배상법이 출21:28~22:15[히14]에 나온다. 이 법문에는 특이하게도 동사 <샬람>의 피엘형이 무려 14개 구절에 연달아 18회 나 언급된다. 이 동사는 한글개역에서 ‘보상·배상하다/갚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영어 사전은 repay, reward, make amend라고 정의한다. 피해자는 보상을 받음으로써 가해자와 화해할 수 있다.

나귀가 구덩이에 빠졌을 경우 그 구덩이를 판 땅의 소유자가 나귀 값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출21:34). 소가 다른 소를 받아 죽였으면 그 소의 임자가 죽은 소의 값을 갚아 주어야 한다(출21:36). 소나 양을 훔쳤으면 소는 다섯 배, 양은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한다(출22:1[히21:37]). 도둑은 몸으로라도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출22:3~4[히2~3]). 남의 농작물을 망치면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출22:5~6[히4~5]). 맡긴 물건이 분실되거나 훼손되었을 경우, 또 세를 낸 물건이 망가지거나 세를 낸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을 경우에도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출22:9~15[히8~14]). 배상함으로써 양자 사이에 관계는 정상으로 회복한다. 이것이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성원들이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배상법은 화해신학을 겨냥한다. 동사 <샬람>에서 화목제물이라는 명사 <쉘렘> 내지는 <쉴라밈>이 나왔다. 하나님의 나라는 화목제물로 인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말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지러진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롬3:25). 여기서 ‘화목제물’에 대한 단어로서 바울은 그리스어 <힐라스테리오스>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 명사는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의 뚜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카포렛>의 번역어이다(출25:17~22). 이 단어는 출애굽기 25장에 일곱 차례 언급된다(출25:17, 18, 19, 20, 20, 21, 22). 

 바울은 예수를 통해서 모든 죄를 대속받고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신학을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가 지불해야할 배상금으로 피해자 하나님에게 갚아주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깨어진 관계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다 올바르게 회복된다.

남측과 북측으로 갈라져서 대립하는 한반도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룸으로써 화목한 관계로 회복할 수 있다. 어떠한 정치적 프로그램으로도 남북의 참된 화해를 이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통일이 된다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참된 관계로 회복되지 않으면 결국은 죄로 물든 가인의 도시와 같은 국가로 남과 북이 다 전락하고 말 것이다. 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로 올바로 서야하며 교회가 진실한 믿음으로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던져서 십자가에 죽어야만 남북이 서로에게 입힌 상처가 아물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남측에 만연한 자본주의의 죄악, 곧 금권숭배 물질만능주의 우상을 훼파하고 오로지 한 분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으로 회복해야 한다. 순결한 교회만이 하나님의 미래를 열 수가 있다.


7. 에스겔의 통일환상

에스겔 37장에 통일의 환상이 나온다. 이것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철저히 멸망을 당한 후에 포로지에서 에스겔에게 주어진 것이다. 해골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에 하나님의 생기<루악흐>가 불어와 그 뼈들 속에 들어갔다. 그러자 죽은 뼈들이 살아난다. 이로써 죄인들은 여호와께서 참된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되었다(겔37:6). 생기가 마른 뼈들에 불어오자 새 이스라엘이 창조되었다(겔36:26~27; 37:12).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과 마찬가지로(렘32:33), 에스겔의 환상에서도 새 언약의 백성이 새 시대에 새롭게 정립한다. 오래 갈라져 서로 싸우던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통일을 이룩하여 하나가 된다. 유다 막대기와 이스라엘 막대기가 하나가 되어 한 분 하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더 이상 두 민족 두 나라로 나뉘지 않고 한 민족 한 나라가 되어 한 분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겔37:22).

   
▲ 구스타프도레의 성경판화, "에스겔의 마른뼈들의 환상"
참된 통일은 세상 권력체로서의 남왕국과 북왕국이 모두 철저히 파괴된 사건을 전제하고 있다. 왕국체제가 철저히 파괴되고 멸망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 통일되는 그 나라는 유일신 하나님을 모시고 모든 우상숭배가 사라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로 성립한다. 에스겔 환상은 세상국가의 폭력을 바탕으로 시도하는 모든 통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으며 반드시 실패할 것임을 보여준다. 군대의 힘을 믿고 군비경쟁을 일삼으며 실력을 바탕으로 압박함으로써 통일을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포기되어야 마땅하다. 폭력체로서의 정권은 완전히 박살나고 무너질 것이다. 그 후에 통일은 참된 전망이 열릴 것이다.


나가는 말

토라는 국가의 해체를 권고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왕들을 모조리 제거하였다. 가나안 땅을 즐비하게 세운 도시국가들을 다 무너뜨리고 그곳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공동체 연합체제를 결성하였다. 야훼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고대도시국가들의 신전에 봉안한 만신전을 모두 철폐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은 유일신이므로 만신전의 위계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모든 도시국가들마다 저마다의 신을 모시고 있었고 도시국가의 위계질서가 곧 만신전의 위계질서로 신전에 표현되었다. 가장 강력한 종주국의 도시에 최고신이 봉안되었다. 야훼는 국가를 수호하는 최고신이 아니었다. 야훼는 모든 신들을 초월하여 홀로 계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다신교의 도시들에서 고통당하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신 오직 한 분밖에 없으신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야훼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도시나 국가의 체제를 갖추거나 그 체제에 예속될 수가 없다. 야훼의 백성은 세상의 국가체제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공동체의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야훼의 법은 ‘사랑’이란 한 단어로 요약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축으로 펼쳐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는 세상의 즐비한 국가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랑의 공동체로서 살아가야 한다(요15:9~12). 사랑으로 온 세계를 뒤덮어서 하나님나라를 창조계에 회복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요 존재이유다. 성서는 교회로 하여금 국가에 종노릇하지 말고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봉사하지 말 것을 권면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해 있으며 사랑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투쟁의 원리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교회는 국가를 무너뜨려야 한다. 부르조아 독재체제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 모두 폐지해야 한다. 국가란 체제 자체가 폭력으로 성립한 체제이며 폭력이 없이는 국가가 무너질 것이다. 교회는 폭력이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라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받은 지상 유일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폭력에 희생된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폭력에 희생당한 그리스도가 결국 승리하고야만다는 진리를 입증한 사건이다.

교회는 유일신 신앙을 굳게 견지한다. 물질주의 우상숭배의 다신론으로 나타난 세속적인 이념 위에 현실의 국가들이 세워져 있다. 교회는 국가의 폭력적 위계질서를 말씀선포와 기도로써 무너뜨려야 한다. 교회는 한 하나님 아래 온 인류가 한 가족으로서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선포하여야 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통일운동의 시발점이며 방법론이고 또한 종착점이다.

교회의 선교는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수많은 작은 사랑의 공동체들을 세워나가야 한다. 사랑의 공동체들이 엮는 연대망을 국가의 대안체제로 세상에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 공동체의 사랑을 실현해 보여줄 때 비로소 미래의 전망이 보인다. 세계의 미래는 오로지 사랑의 공동체 설정의 여부에 달려 있음을 교회는 날마다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통일운동의 처음과 끝도 공동체운동에 달려 있다. 공동체운동 없는 통일은 또 다른 국가주의 내지는 제국주의로 귀결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영재(Ph.D., 전주화평교회)  rheeyjae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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