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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이라는 이름의 족쇄<정현진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⑤-1> 출애굽기 5장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 승인 2014.10.06 15:34

이번 <정현진 목사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다섯번째 순서는 분량상 두차례에 나눠서 싣습니다. - 편집자 주

하나님과 긴 대화를 마치고(출 3:11-4:17에 이르는 대화는 한 가지 일을 놓고 하나님과 사람이 나눈 구약성경의 대화들 중에서 가장 길다), 또 도중에 일어난 돌발사건을 넘어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왔다(출 4:27-30). 모세가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니(출 4:27-30), 백성이 믿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출 4:31; 참조 14:31). 실로 40여년 만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강산이 네 번은 바뀌었을 긴 세월 동안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히브리인들의 노예생활이 바로 그것이다. 시경(詩經)에 강산은 10년에 한번, 인심(人心)은 백년에 한번, 사람의 생김새(人貌)는 천년에 한번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심으로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일에 착수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심사와 노예생활, 노예근성에 젖어있는 인간의 심성을 바꾸면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었던 약속을 실현시키기 시작하신 것이다.

본 문 내 용
5:1-5 모세와 아론의 요구를 파라오가 거절함
5:6-14

파라오가 이스라엘 자손의 노동강도를 세게 함

i) 5:6-9 노동감독관과 기록원들에게 내려진 파라오의 명령
ii) 5:10-14 파라오의 명령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달, 실행됨으로 억압의 강도가 한결 세짐
5:15-19 이스라엘인 작업 기록원이 파라오에게 하소연하였으나 거절당함
5:20-6:1 이스라엘인 작업 기록원이 모세와 아론을 비난함 (5:20-21)
모세가 여호와께 하소연하고(5:22-23), 여호와께서 답하심 (6:1)

‘그 후에’ 라는 말로 시작되는 출 5:1에는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와 첫 번째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출 5:2-6:1에는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와 담판을 벌린 뒤에 일어나는 일들이 기록되었다. 출 6:1은 와요메르 야흐웨 (그리고 여호와가 말씀하셨다)로 시작된다. 이는 이 부분이 새로운 단원의 시작이 아니라, 출 5:22에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여호와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출애굽을 향한 변함없는 의지를 다시 확인하신다. 그리고 출 6:2부터는 출 3:9이하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를 다시 부르시는 소명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 파라오앞에 서있는 모세와 아론
출 5:1-14에는 그 다음 11장까지 쭉 이어지는 주요한 테마 세 가지가 나온다(Douglas K. Stuart, Exodus, 159쪽): ① 모세와 아론의 예언형식을 빌어 파라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요구(말씀):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내 보내 ‘나’에게 예배드리게 하라(1, 3절); ②; 파라오의 거절, 여호와를 알지 못함으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음 (2, 4절); ③ 파라오의 완고함, 여호와와 대치하는 내용으로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음(4-14절).


1) 하나님을 아는 거룩한 지식의 힘 (출 5:1-5)

우선 출애굽기 출 3:18과 5:1를 비교해 보자(출 4:23도 참조):

출 3:18 출 5:1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이집트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가지 않고, 모세와 아론 둘이서만 파라오에게 감; ②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바꾸어 지칭함; ③ ‘사흘길’이란 말을 빼고 기한을 정하지 않은 채 장소(광야)만 언급함; ④ 3:18에는 청유법(cohortative)이 쓰였으나(네알카-나 = 자 우리가 가자), 5:1에는 피엘 명령법으로 샬라흐 (= 내어 보내라!)가 쓰였음; ⑤ 3:18 청유법에는 “”(= .. 하소서) 라는 강조사가 붙었으나, 5:1에는 강의형 명령형임. 이 밖에 ⑥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에 나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하는 대신에 절기를 지키겠다고 말하였다(히브리 동사 하각은 축제적인 분위기로 드리는 예배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출애굽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매우 약하게 표현된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파라오를 속여서 출애굽하려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절기를 지키겠다는 말은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겠다는 뜻이다. 이는 이집트인의 신들, 특히 파라오가 섬기는 신들을 거부하고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실 오경에는 출애굽의 목표가 다양한 말로 표현되곤 하였다: ‘(하나님을) 섬기다, 축제를 지키다, 예배를 드리다.’ 사실 이 말 속에는 출애굽의 목적이 들어 있다. 곧 출애굽는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주고, 거기서 자유롭게 살 길을 열어주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두 번째 목적, 곧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는 일을 위한 디딤돌인 것이다. 어쨌거나 이 말을 듣는 파라오는 아마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듯 멍한 기분이었으리라.

출애굽기 5장은 ‘그리고 그 후에’란 말(웨아하르), 곧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출애굽기 4장에서 언급된 것들 뒤에 생겨난 일들이 출애굽기 5장에 나오리라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리라 긴장하며 기대하게 한다. 이런 뜻에서 출 5:1의 첫마다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뿐만 아니라, 내용의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제 모세와 아론은 이집트의 바로를 만나러 갔다. 이 만남은 전에 다른 누구와 만났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나오는 가다(오다)란 말(뽀)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에 착수하였다는 어감(뉘앙스)이다. 그만큼 그 둘은 결연한 태도이기도 하고, 긴장도 하였으리라.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전하는 말은 예언자가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코 아마르 야ㅎ웨 =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 4:22 참조; 이런 형식의 표현은 오경 가운데 출애굽기에만 나온다). 이는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하는 말은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이 말씀(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요, 자신들은 그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겸손한 자세로 주어진 사명에 임하였다.

파라오에게 간 그들은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히브리인이라 부르고 노예라고 읽는 이집트인과는 달리, ‘내 백성’ (암미)이라 부르셨다. 백성이라는 일반적인 칭호에 ‘내’라는 1인칭소유격 어미가 붙은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의 위상은 최고로 상승하였다. 그들은 세상에 흔하디 흔한 백성 중에 하나가 아니라, ‘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내)보내다’는 말(샬라흐)은 기본형(Qal)으로 여러 차례 쓰였다(2;5; 3:12, 14, 15, 20a; 4;4[2x], 13[2x], 28). 출 5:1과 다른 곳에서 이 낱말은 강의형(Piel)으로 쓰였다(3:20b; 4:21,23[2x]). 강의형으로 쓰일 때 보내는 주체는 파라오였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 백성 내어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때 그 낱말은 ‘풀어놓다, 해방시키다’ 등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내 백성 내 보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자마자, 파라오는 대뜸 ‘여호와가 누구냐’고 묻는다(2절). 이 물음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① 이는 교만하고 도발적인 대답이다. 곧 ‘이 나라에서 내가 곧 신인데, 여호와가 감히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라는 것이다. 사실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의 아들(신의 대리자)이다(삿 9:28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신복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삼상 17:26; 25:10 참조). 이 말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들린다; ②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2)고 한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말은  그의 몰이해와 무지를 보여준다. 그는 태양(신)의 아들인 내가 정체조차 모르는 여호와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면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설대로 행하였다. 그의 강경한 반응에 영향을 받았는지, 출 5:3에서 모세와 아론이 하는 두 번째 말은 출 3:18의 분위기에 보다 가깝다. 명령형 - ‘우리를 떠나게 하소서(샬라흐)’ 대신에 청유법(corhortative 우리를 (반드시) 떠나가게 하기를 바라나이다) 로 바뀌었다(넬라카-나 ← 할라크). 이를 출 3:18; 4:23과 비교하자면, ‘사흘 길,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되살아났고,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대신에 ‘우리를 치실까 두렵나이다’로 한결 완화된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파라오의 태도는 아주 완강하였다: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무슨 목적으로 백성에게 그들의 일을 싫어하게 만들려느냐? 너희의 그 힘든 일을 위하여 (여기서) 나가라 (5:4 직역; 5:8-9, 17 참조).”

파라오의 이런 태도는 요셉을 모르는데서 비롯되었다(출 1:8). 이는 시대가 달라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요셉이 이집트와 파라오를 위해 한 일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출애굽기에서 ‘알다’ (야다)라는 낱말은 파라오에게 매우 중요하다(1:8; 2:25; 3:7; 5:2; 6:3, 7; 7:5, 17; 8:10, 22; 9:14, 29-30; 10:2, 7, 26; 11:7; 14:4, 18; 16:6, 12; 18:11; 23:9; 29:46; 31:13; 33:12, 13, 16-17). 나중에 여호와께서 일으키는 기적들을 많이 겪은 다음에 모세에게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위해 ‘복을 빌어달라’ (출 12:32)고 청할 즈음에, 여호와를 모른다고 버티던 그의 억지가 비로소 꺾였다. 그제서야 그는 여호와를 ‘모든 신들 위의 신’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여호와를 알고, 그분을 인정하는 과정은 이렇게 길고도 험하였다.

‘여호와가 누군데 감히 나에게 ...’ 라고 생각하는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이 요구에 즉각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너희가 어찌하여 망령된 짓을 하느냐’ (람마 ... 타프리우)냐고 반문하였다(4절). 개역개정에 ‘(일을) 쉬게 하려느냐’로 옮겨진 말(파라으)은 본디 ‘잃다, 싫어하다, 멀어지다, 무시하다’ 라는 뜻이다.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의 요구가 백성에게 일을 싫어하고 근로의욕을 떨어지게 만든다고 생각하게 ‘망령된 짓’이라 단정한 것이다. 그는 모세와 아론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고 명령하였다. 노역이란 말(쎄발라)은 여기서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이는 그 일이 매우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의미강화의 복수형인 것이다(출 1:11 무거운 짐; 2:11 고되게 노동; 5:9 참조). 5절에서 ‘쉬게 하다’로 옮겨진 말은 4절과는 달리 샤바트가 쓰였는데, 이것은 중단하다, 그치다라는 뜻이다.

2) 더욱 강해진 노동강도 (출 5:6-14)

바로 그 날로(빠욤 하후) 그는 백성들 중에 공사감독들과 현장 기록원들에게 노동강도를 더 세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3인칭 대명사 복수형( = 그들)이 4번이나 되풀이 사용하였다(출 5:7-8).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그의 상한 감정을 도드라지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더 나아가 그는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8절에서 한번, 17절에서 2번 강조하였다(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주일을 성수하는 성도에게 할 일이 없어 그렇다고 빈정거린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자’ 고 소리질러 외쳤다(쵸아킴 ← 챠아크)고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말하였다. 그는 또 모세와 아론의 말을 거짓말(뻬디브레 샤케르)로 낙인찍었다.

감독들과 기록원들이 파라오의 말을 전하는 형식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코 아마르 파르오’(출 5:10). 여기서 감독들(노게심)이란 말은 사람들을 강제하며 일을 시키다(사 58:3), 빚을 독촉하다(신 15:2) 등을 뜻하는 나가스에서 나왔다. 쇼트라이우 (← 쇼트림)란 말을 ‘패장’이라 옮긴 개역성경과는 달리 개역개정이 ‘기록원’이라 번역한 것은 매우 적절하게 보인다. 이 말의 뿌리(쇼테르 ← 샤타르)에 기록, 기록하는 자, 관리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예에게 주어진 벽돌의 수량을 채우도록 독려하는 한편, 그 실적을 낱낱이 기록하는 현장 관리인이었다. 이들을 통한 노예(노동자)의 통제, 이것은 저항의지를 꺾거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방법으로 동서고금에 널리 쓰이는 방법이다.

그들은 파라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작업현장으로 곧장 달려 나가 그 말을 전하였다. 히브리성경은 와우연속법을 두 차례 연이어 사용함으로써 이런 사실을 확연하게 보여주었다(와예체우 ← 야챠르 ... 와요메루 ← 아마르). 11절은 그들이 하는 말을 명령형 두 개로 표현한다(가서 주으라; 레쿠 케후). 11절 맨 앞에 2인칭 복수 인칭대명사(앗템)가 쓰였다. 사실 이것은 필요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명령에 따라야 할 자가 이스라엘 자손인 것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또는 파라오의 단호한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파라오의 얼음장같은 태도는 곧장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악영향을 미쳤다: “이에 그 백성이 이집트 땅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이는 짚을 대신할 곡초 그루터기를 모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감독들은 그들을 독촉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하루에 너희가 할일을 그날에 마치라. 너희에게 그 짚이 있을 때와 똑같이’(출 5:12-13 직역). 이것의 일부분을 개역개정은 ‘’라고 옮김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이 흩어져서 곡초 구루터기를 모아다가 (성공적으로?) 짚을 대신한 것 같은 어감으로 표현되었으나, 히브리 성경의 뉘앙스는 이와 다르다. 곧 곡초의 그루터기를 모으려고(르코쉐쉬 ← 카샤쉬) 흩어졌다는 데 초점이 있지, 그 결과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았다. 파라오의 관리들은 목표량을 채우려고 이스라엘 자손을 심하게 닦달하였다. 그래도 그 수량을 채우지 못하자, 이스라엘 자손 출신 기록원들은 파라오의 감독들에게 매우 심하게 매를 맞았다(14절). 개역개정은 파라오의 감독들을 이 문장의 주어로 옮겼으나, 이 문장은 수동형(와육쿠 ... Hopal)이다: 파라오의 감독들이 이스라엘 자손 위에 세운 기록원들은 매를 맞으며 이런 질책을 당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어제도 오늘도, 벽돌 만드는 작업에서 너희가 맡은 일을 전처럼 다 하지 못하느냐?’

3) 미운털 박힌 모세와 아론(출 5:15-21)

노예생활에 익숙한 이스라엘 자손들, 노예를 부려먹는데 익숙한 이집트인들 - 이 모두가 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몸살을 앓는다. 노예제도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파라오는 한편으로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거짓말로 매도한다. 에덴동산에서 뱀도 아담과 하와에게 이런 짓을 하였던 것이다(창 3:1-5). 예레미야도 하나님 말씀을 거짓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였다(렘 27:9-10, 14, 16). 히스기야왕도 하나님과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 앗시리아 침략군과 맞서야만 하였다(사 36:13-18). 사실 이런 일은 세속에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러나 진실한 주의 사자는 이런 왜곡과 탄압에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진리를 전파한다(행 20:24, 31 참조).

한편 파라오는 중간관리자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을 더욱 심하게 억압하였다. 이에 이스라엘 자녀 출신 기록원들이 파라오에게 들어가 울며 하소연하였다(차아크 = 부르짖다, 울부짖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짚을 당신의 종들에게 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보소서!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백성이 잘못하고 있습니다”(5:15-16 직역). 이에 대한 파라오의 반응은 동지섣달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뉘앙스를 살려 출 5:17-18의 이 부분 직역하면, “정말 너희들은 진정 게으른 자로구나. 그러니까 너희들이 ‘우리가 갑시다. 여호와께 예배를 드립시다’ 라고 말하는구나. 그러니 이제 너희는 가라. 너희는 일을 하여라. ... 그러나 너희는 벽돌을 배당받은 숫자대로 바쳐야만 한다” 이다. 여기서 파라오는 이스라엘 자녀들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형식을 빌려 그들을 비웃었다. 파라오는 ‘너희’라는 인칭대명사가 되풀이 쓰면서, 적대적이고 불편한 심기가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그것도 청유형(cohortative)으로 그들의 태도를 한껏 비아냥거렸다. 결국 그들은 하소연할(간구할) 대상을 잘못 찾은 셈이 되었다. 그들은 애당초 이스라엘 자손을 심하게 학대하라고 명령한 당사자에게 가서 애걸복걸한 것이었다.

이렇게 냉대를 당하고 물러나던 그들은 또 한 번 엉뚱한 과녁으로 화살을 쏘아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이 나쁜 일들이 모세와 아론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보자마자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을 만나려고 선  모세와 아론에게 적의를 품고 달려들었다(파가으).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온 뒤 (직역)”, 그리고 그들에게 퍼부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샅샅이) 살피시고, 심판(판단, 징계)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우리의 냄새를 바로의 눈과 그 신하들의 눈에 악취가 되게 하였다. 우리를 죽이게 하려고 그들 손에 칼을 쥐어주었다’(5:21직역; 창 34:30; 삼상 13:4; 27:12; 삼하 10:6; 16:21; 사 30:5; 대상 19:6 참조) 라고. 그들의 말은 사실상 저주하는 말투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를 거부하였다(출 5:21c). 이런 이스라엘 자손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그리 낯설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기독교인이 성경(하나님의 말씀)을 들먹이며, 자기 고유의 생각 및 신앙과 다르게 행동하는 다른 기독교인을 판단(저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파라오와 동포, 양쪽에서 오는 차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모세와 아론은 코가 석자나 빠져 여호와께 하소연하였다(출 5:22-23): ‘어찌하여 ... 어찌하여...’ 그들은 ‘그리고 주님은 주의 백성을 정녕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출 5:23 직역 브핫첼 로 힛차르타 ← 나찰)라고 절규하였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임마누엘’의 약속과 함께 출애굽의 의지를 한번 더 강력하게 밝히셨다.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psalm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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