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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이야기의 또 다른 해석<김구 칼럼> 선악의 지식나무
김구(한신대 외래교수) | 승인 2014.10.07 16:37

흔히 원역사로 지칭되는 성경 첫머리에는 인류가 낙원에 살게 된 과정과 함께 그 복된 공간에서 멀어지게 된 쇠락의 과정도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아주 오래 세월 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꽂힌 것이 있는데, 선악과 이야기가 그것이다.

선악과 이야기에 대한 고대의 해석이 유대인들의 전설에 녹아들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뱀은 다리가 있었고 낙타보다 컸으며 사람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그가 하와에게 접근해 스스로 선악의 나무 열매를 따먹었고,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와에게 확인시킨다. 그녀는 유혹에 넘어가 나무 열매를 따먹게 된다.

금단의 열매는 징벌을 초래하게 된다. 뱀은 다리 대신 배로 다니고, 다른 음식을 먹게 되었다. 하와에 대한 징벌은 해석자를 통해서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여자는 물질적 영적 사회적인 지위를 잃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담은 열 가지에 달하는 징벌을 받는다. 그가 입고 있던 하늘의 옷을 하느님이 벗기셨기 때문에, 그는 알몸이 된다. 나날의 양식을 위해 애쓰며 열악한 음식을 먹고, 자녀들은 땅을 떠돌아야 하고, 땀을 흘리게 됐으며, 악한 경향을 갖게 되었다. 죽으면 시신을 벌레가 먹고, 짐승들의 힘이 우월하여 그를 살해할 능력을 갖게 됐으며, 평생 고난에 찬 생활을 해야 하고, 끝날에는 살아온 모든 것을 술회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원인론적인 질문들에 대해 성경 자체는 문자적으로 놓아두고 그 사이에 있는 문제를 설명하려 했던 유대교의 전형적인 틈새 메우기의 결과이다.

   
▲ 미켈란젤로가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에덴 축출을 그린 시스틴 성당의 천정화
성경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살이가 힘들 때마다 그 수고로운 삶을 아담의 탓으로 돌렸을 것이다. 죄의 연대론이 배태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아마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이러한 연대론이 만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적어도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계기로, 그리고 유다 말기에 죄의 연좌 문제가 부각되었던 흔적을 보여준다. 아버지든 아들이든 개인의 잘못은 개인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법적 교훈이 그것이다(신 24.16; 렘 31.29,30; 겔 18.17-20). 이는, 나라가 망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사회적인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어 선악의 본질적인 문제까지 소급되면서 만연했던 죄의 연좌적 해석에 대한 이의(異意) 제기일 것이다.

선악과 문제는 그러나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죄의 연대론이 우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후 90년경의 문헌으로 파악되는 외경 에스라 사서는 그런 사실을 밝혀준다: “오 아담, 당신은 무슨 짓을 했습니까? 죄를 지은 것은 당신이지만, 타락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당신의 후손인 우리들의 것이기도 하니까요”(4에스라 7.118). 이러한 입장은 바울의 권고(로 5.12-21; 고전 15.22)와 시인의 고백(시 51.5)에 힘입은 교부들에게도 유지되었다. 특히 이단론의 배격에 주력했던 이레니우스한테서 비롯되어 어거스틴한테서 확립된 것이 이른바 원죄론인데, 그 중심사상은 종교개혁자들에게까지 이어진다. 선악과 이야기에서 출발한 죄의 연대론이 견고한 터전 위에서 기독교의 정통적 해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비평학적 연구가 시작된 이래로 선악과 이야기에 대한 접근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야기의 원천을 찾거나 비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에덴동산 이야기와 유사한 신화나 전설들이 더러 있기는 하다. 아다파(Adapa) 신화에 등장하는 탐무즈(Tammuz)는 하늘의 신 아누(Anu)의 궁전을 지키는 두 신 가운데 하나인데, 그는 수메르어로 “좋은 나무의 주”를 뜻하며 한 나무를 감고 있는 두 뱀의 형상으로 묘사된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우룩의 왕 길가메시는 고난 끝에 영생의 풀을 구하지만 어떤 뱀에게 잃고 만다. 이들 신화와 전설에는 결정적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일치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료의 비교연구는 선악과 이야기가 성경의 고유한 내용이라는 점을 밝혀냈고, 결과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선과 악의 지식이라는 문제에 관심이 모아지게 만들었다.

근년의 몇몇 연구들은 바로 그 지식에 관점을 모은다. 히브리어 동사 ‘야다’가 단순히 지식의 습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유혹(창 3.5)의 결과로 알게 된 것은 자기들이 “벗었다”는 사실이었다(3.7). 여기서 ‘야다’가 의미하는 것은 배움의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 깨달음이다. 또 선악의 이해도 새롭게 조명된다. 창조의 과정에서 하느님은 나날을 ‘토브’[善]로 평가하신다: “하느님이 보시니 좋았다[토브]”(1.4,10,12,18,21,25). 여기서 ‘토브’는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흡족한 나무도 있고 먹기에 좋은[토브] 나무도 있었다(2.9). 또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토브’가 아니므로, 돕는 짝을 마련하신다(2.18). 그래서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윤리적인 해석을 넘어선다. 에덴동산에 등장하는 금단의 나무는 모든 것을 경험적인 선과 악에 결부시키는 자의적인 사리판단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 애플사 로고
선과 악의 나무 이야기는 정보화 시대를 보는 문제로도 접근이 시도된다.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정보라는 용어는 information의 번역어인데, 본래 그림(forma)으로 나타낸 것(in)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매우 오래 전부터 어떤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림을 그려서 전달해 왔다. 그것이 오늘날 정보(information)라는 말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정보란 지식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 연유에서 선악의 지식 나무는 정보와 연결되는 것이다.

선악과 이야기에서 제기되는 핵심적인 문제는 먹지 말라는 금령을 어기고 그것을 먹었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주민들은 동산 중앙에 있던 그 나무는 그대로 놓아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먹었다. “먹는다”는 행위는 “가진다”는 행위의 다른 표현이다. 그들은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가졌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공동의 것을 개인의 것으로 바꾼 것이다. 이른바 독점을 하려고 시도했던 셈인데, 그들이 가지려 했던 것이 선과 악의 지식이었으니 선악의 정보를 독점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식이든 경험이든 정보는 한군데 모아놓으면 거기서 진실이 드러나는 법이다. 최초의 인간들이 그렇게 해서 밝혀낸 것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신적인 능력이 아니라 벗은 그들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무화과 잎을 엮어 몸을 가렸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나무들 사이에 숨어버렸다. 적나라한 자기들의 부끄러운 현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고,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는 반성은 전혀 시도되지 않았다. 드디어 그들은 복된 세계인 에덴동산에서 축출되기에 이른다. “그곳을 지키고 가꾸라”(창 2.15)는 가장 원초적인 의무를 져버렸기 때문이고, 그래서 주민의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이버 망명이 급증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런 시기에 앎의 문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성경의 한 부분을 새삼스런 눈으로 읽어보는 일도 필요할지 모르겠다. 정보의 독점과 자의적 판단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오류를 정보화 시대는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하지 않을까?

김구 (한신대 외래교수)

김구(한신대 외래교수)  fonsjugi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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