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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정현진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⑤-2> 출애굽기 5장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 승인 2014.10.15 12:47

이번 <정현진 목사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다섯번째 순서는 분량상 두차례에 나눠서 싣습니다. - 편집자 주

* 설교힌트

1) 가라 모세! 너 가서 ... (출 5:1-5):

예전에 복음성가 중에 ‘가라 모세 너 가서 바로왕에게 이 말 전하라 ...’ 는 것을 즐겨 부르곤 하였다. 출 5:1-2에는 ‘(내)보내라’는 낱말이 4차례 나온다. 하나님은 하나님 목적과 뜻을 이루는 자리로 사람을 보내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자리는 결코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자칫 목숨까지 내놓아야할 위험한 자리였다.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를 움직이셔서 바도 바나바와 사도 바울을 이방 지역의 선교사로 파송하셨다(행 13:1-5). 그 사역 자체는 대단히 위대한 것이었으나, 그 사역의 당사자인 사도 바울을 비롯한 동역자들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고후 1:8-9 참조).
 
모세, 예언자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모두 뜻과 힘을 합쳐야할 동포에게 조차 오해와 미움을 받는 자리로 보냄을 받았다. 그러니 큰 믿음, 큰 용기없이는 감히 나갈 수 없는 자리이다. 그렇지만 소명의식에 투철한 사람은 이와같은 것을 알기에, 아니 그런 곳일수록 복음의 능력이 더 필요한 곳임을 알기에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찬송 323)는 찬송을 부르며 나아간다. 

2) 노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우리말 성경에는 4절과 5절을 ‘쉬게하다’로 똑같게 옮겨졌으나, 4절에는 파라으(= 자유롭다, 자유롭게 하다), 5절에는 샤바트(= 그치다, 쉬다, 안식하다)가 각각 쓰였다.

세상에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言則是也), 누가 그것을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내용이 아주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노동은 (인간을) 자유케 한다 (Arbeit macht frei)는 구호는 백번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독일의 나치가 1930-40년대 이 말을 사용하였을 때에는 그 내용과 의미가 완전히 변질되었다.

   
▲ '노동은 자유케한다'(체코 테레지엔쉬타트에 있는 나치수용소)
그 당시 나치는 유대인포로수용소마다 이 구호를 그 정문과 곳곳에 크게 써 놓고 강제노동을 시켰던 것이다. ‘삼대독자 외아들도 일해야 곱다’ 는 속담처럼(살후 3:10 참조) 누구나 일을 해야 존중을 받기 마련이지만, 여기서 파라오가 하는 말은 그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5:4, 8-9, 17). 하나님이 주신 창조력을 존귀하게 발휘하는 노동,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하는 노동, 휴식과 일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노동,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노동은 아름답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 선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과 반대되는 결과를 빚어내는 노동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3) 압박자 파라오, 위로자 예수님:

파라오는 강제노역과 학대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하소연에 귀를 막았으며, 울며 하소연하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서도 자기 입장만 되풀이 말하며, 압박을 가하였다. 예수님은 세파에 찌들고 상처입은 사람들, 인간관계에 시달리는 당대 사람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들과 깊이 공감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세워주셨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그분의 사역은 파라오가 당대 사람들에게 한 것과 전혀 달랐다. 그분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 겪는 아픔과 시련, 상한 감정과 지친 영혼, 시들어가는 생기에 공감하시고, 만져주시며, 영육간의 휴식으로 인도하시며, 생기를 재충전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4) 하나님은 알자

“히브리인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었습니다”(5:3 공개) 라고 모세와 아론이 말하자 파라오는 ‘여호와가 누구냐’고 묻는다. 이런 물음을 야곱, 모세, 삼손도 물었지만(창 32:30; 출 3:13; 삿 13:17), 여기 나오는 파라오의 물음은 그 뉘앙스가 앞의 것들과 사뭇 다르다. 그의 말투는 ‘여호와가 누군데 감히...’라는 투이다(Knight, Theology as Narration 38; 김이곤,101-102). 그의 이 차가운 태도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엿보인다: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5:4)

8 ...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5:8-9)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5:18)

하나님이 누구신가, 성령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일은 우리 신앙의 첫걸음이자, 평생동안 찾아가야 할 대답인 것이다: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 4;36-41)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 91:14).

일찍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만일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파라오가 이집트의 모든 장자와 맏물이 죽을 때까지 하나님 계획에 거슬려 대들지 않았으리라. 이런 뜻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 성령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일은 신앙의 첫걸음이자, 평생 찾아가야 할 대답인 것이다.

5)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피조물의 한계를 지닌 존재인 사람은 억압과 강제를 당할 때, 한편에서는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것이 주는 편리함에 젖어 은근히 그것을 즐기는 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 보면, 해방과 구원을 향한 투쟁에서 영광과 찬사를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해방되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해방 또는 해방투쟁을 거부한 예는  수없이 많다. 한편에서는 억압자가 억압을 더욱 강화시키며 위협해 오는 현실이, 다른 한편에서는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면서 그럭저럭 익숙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외부의 적과 투쟁할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과도 끊임없이 맞서야 하기에 해방투쟁은 지극히 어렵고 힘든 과정 과정의 연속된다. 그것이 성공하기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포기하고 다른 길을 하거나, 죽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0-12)

6) 거절당하는 사역

출애굽기 5장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해방사명을 위해 한 첫 번째 활동이 나와 있다. 이 시도는 파라오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동포에게도 거절되었다. 이런 일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이를테면 사 6-7장)와 예레미야도 그러하였다(예레미야의 고백록 참조). 사역의 과정에서 예수님도(막 3:20-30), 사도 바울도 미쳤다는 말까지 들었다:

24 ...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렇지만 복음은 소극적-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소극적-적극적으로 거절하는 사람에게도 전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무 방해자도 없이 순순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거룩하고 숭고한 일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순탄하게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가 하는 사역은 사람들과 세상에게 거절당하느냐, 수용되느냐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냐, 하나님 나라 확장에 보탬이 되느냐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7) 익숙이라는 이름의 족쇄

사람이 병치레를 하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진다. 이런 저런 의무와 책임감에서도 벗어난다. 그래서 병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칭병이나 꾀병을 해가며, 은근히 즐기는 것이다.

중국에는 예부터 어린 여자 아이의 발을 꽁꽁 동여매는 풍습이 있었다. 이 전족(纏足)으로 아이의 발은 자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등의 뼈가 휘어진다. 나중에 이런 풍습의 폐단을 깨닫고, 그 전족을 풀게 하였지만, 그들은 이미 정상으로 걸어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발을 꽁꽁 싸맨 천을 풀자, 오히려 걸음걸이가 더 이상해지고, 통증도 커졌다.  결국 그들은 제 손으로 발을 다시 동여매고 예전의 풍습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 보고 청나라 말 양계초(梁啓超)는 '애국론(愛國論)'에서 "부인네들이 십년간 전족(纏足)을 하다 보니 묶은 것을 풀어주어도 오히려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예전 걸음으로 스스로를 얽어매고 만다" 고 하였다. 여기서 고보자봉(故步自封)이란 말이 나왔다.

파라오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을 거부한 것, 그리고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이집트에서의 옛 생활을 그리워하는 것은 모두 이와같은 것이다. 익숙한 것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일은 간단하지만은 않은 법이다(고후 5:16-17). *

신앙생활에서도 예배나 기도에 익숙한 것과 신앙의 성숙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둘은 따로 놀 수도 있다. 오랜 신앙생활로 교회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평화와 성숙에 기여하기도 하는 한편, 그냥 익숙하게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정도, 곧 습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8) 번지수를 제대로 찾는 사람

자신들에게 가혹한 억압이 찾아오자,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는 비교적 출세한 사람들)은 즉시 파라오를 찾아갔다. 자신들을 학대하라고 명령한 사람이 다름아닌 파라오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에게 울부짖으며 간구하였으나, 냉혈한인 파라오의 피는 따뜻해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냉대와 핍박이 찾아오자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찾았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께만 하소연하였다.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받았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재확인하였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은 허탕을 치고 빈손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나, 간구해야 할 상대를 제대로 찾아간 모세와 아론은 격려를 받으며 확신을 안고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9) 하나님의 이름으로 ?

성경이나 교회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이 하는 일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기적이거나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 나가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들보다 더 잔인하고 가혹한 행동을 자행하기도 한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라는 말(구호)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psalm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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