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문화 주대범의 <교회음악산책>
코랄 이야기 1 : “내 주는 강한 성이요”<주대범의 교회음악 산책 9>
주대범 장로 (중앙루터교회 성가대 지휘자) | 승인 2014.10.28 15:28

497돌을 맞는 종교개혁절이다. 3년 후 500돌을 맞이한다고 온 세계가 떠들썩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교단마다 행사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념사업들을 벌이며, 독일 관광청은 순례단도 모집하고 있다. 모두 귀한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지만, 얼마나 그 본질에 접근할까 싶어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지난 주일 공동예배 설교에서, 우리 교회 최주훈 목사는 지난 종교개혁 100주년 때마다 종교전쟁인 30년 전쟁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 전역을 피폐화 시키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큰 전쟁들이 일어났음을 상기시키면서 평화로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교회 개혁의 목소리는 루터 이전에도 충분히 있었다. 궁중사제였던 영국의 존 위클리프(1320?~1384)는 교회의 세속적인 부(富), 성직자들의 타락,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다. 화체설과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의심했던 그는 라틴어 불가타역을 기초로 하여 성경을 영어로 번역, 발간하기도 했다. 그나마 영국의 정치적 힘에 의해 온전히 제 명을 채우긴 했지만, 결국 부관참시를 당했다.
보헤미아 프라하대학의 총장이었던 얀 후스(1372~1415)도 그의 뒤를 이었다.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고 교회의 권위를 비판했던 그는 공의회에 불려가 결국 1415년에 화형을 당하고 그 재는 라인강에 뿌려졌다.

가톨릭교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일개 무명 수도사인 마르틴 루터에게 있어 교회 개혁 촉구는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신앙 양심>과 <죽음과의 직면>이 늘 교차되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아마도 그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대자보를 붙인 자신의 경거망동에 대해, 수도 없이 후회하였을지도 모른다.

   
 
“내일 심판의 날이 온다 해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며 백 번 천 번 믿음으로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루터는 소화불량, 두통, 통풍, 우울증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렸으며, 스스로 고백한대로 <죽음과 지옥>을 헤매면서 신성모독의 지경까지 이르는 고통 속에 있을 때, 주님은 놀랍게도 그의 입술과 마음에 찬송을 주셨다.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다.

<시편>은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구원의 희망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 1513~1515년, 비텐베르크대학에서 한 <시편 강의>는 종교개혁을 수행하는 동안 루터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 예는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에게서도 확인된다. 1938년 그가 집중적으로 연구한 시편 119편을 비롯하여 그의 서신 등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시편 명상>은 그의 신학과 삶의 그루터기가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루터가 시편 46편을 기초로 쓴 <내 주는 강한 성>은, 대부분 단조 가락이 많던 시절에 강한 장조로 승리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확신 속에 노래하고 있다. <진리>를 위한 <순교>도 불사한다는 이 위대한 코랄(choral)은 바흐, 마이어베어, 멘델스존, 바그너, 니콜라이, 라프 등의 작품에서 두고두고 살아 외쳐지고 있다.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3절로 번역하였으나, 원래 4절 가사의 악보를 싣는다.
 

   
 
위클리프, 후스 등, 전(前)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별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루터에게도 이어지지만, 루터의 개혁 운동이 성공하게 된 가장 중요한 근본 원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하고도 당연한 말인 것으로 치부되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주장이었으며, 그것은 <본질>이었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루터에게는 <음악>이라는 새로운 병기가 있었다. 루터에게서 음악은 <생존>을 위한 위로를 넘어서, 확신하는 믿음 가운데 그를 충만하게 이끌었다. 이 확신은 여러 면에서 교회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특히 사제만이 아닌 모든 회중이 주님의 은총을 직접 맛보는 예배가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당시 교회 음악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평가하여 개혁하려는 노력도 포함시켰다.
 이러한 <모든 이가 주님 앞에서 사제이다>라는 명제는 교회 찬송 <코랄>을 탄생하게 했거니와, <코랄>은 새로운 루터파 음악인 칸타타, 오라토리오, 수난곡 등 교회 음악의 단단한 장르를 세울 수 있는 넓은 뜨락이 되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음악은 미사를 위한 전례음악 위주였고, 그것은 사제와 사제에 준하는 성가대원들만의 음악이었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끼어들 틈이 없었고 오직 듣는 위치에만 있었다. 물론 음악의 모든 언어는 라틴어였으며, 지난 2세기 동안 급격히 발전된 화성법과 대위법을 통해 여러 성부가 진행되는 다성음악Polyphony인 모테트Motet(영국에서는 앤덤Anthem이라 부른다)가 유행하였다. 그것은 단조롭게 순차적 진행을 하던 단선율의 그레고리안 찬트에서의 당연한 발전으로서 음악의 예술성을 한층 높였다. 그러나 이 음악은 너무 인간의 인위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 하나님께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도 흔했고, 회중들이 가사를 알아들어 음미하며, 나아가 은혜를 깨닫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지적을 받아왔으며 오히려 그 기교가 음악의 고상함을 저해시킨다는 의견들도 제시되어 왔다.
 
현대적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당시 교회 음악은 풍부하고 흥분할 만하며 독특한 다성음악을 통해 창조적이고 자극적이며 적극적인 발전이 있었으나 그것은 중세 교회의 부끄러운 영적 하락과 오히려 대조되어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실정이었다”라는 말이 객관성을 얻을 것이다. 즉, 음악은 진보하였으나 교회의 영성이 쫓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기존 교회 음악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평가와 의견은 공통적인 면도 있었고 전혀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공통적인 면은 음악을 통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경우에 따라 위협 당한다는 인식과 따라서 악한 영향을 피하도록 음악을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공통되지 않는 부분은, 그러면 어느 정도의 음악을 교회가 전승하고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과 태도였다.
 
“찬송이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찬양한다 해도 노래없이 한다면 찬송한 것이 아니다. 또한 노래한다 해도 그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없다면 찬송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찬송의 세 요소는 노래, 하나님, 찬양이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è, 354~430)의 말은 4세기 당시 기악은 향락적인 음악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지만, 교회에서의 성악에 대해서도 종교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루터는 음악에 대하여 온건한 태도를 취했으나, 다른 이들은 극단적으로 움츠리게 만들었다.
루터를 제외한 나머지 개혁자들인 위클리프, 후스, 츠빙글리, 칼뱅은 교회 음악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었고, 그들의 영향을 받았던 지역은 루터교회와 가톨릭 영향권보다, 적어도 향후 2세기 동안 교회 음악 발전이 지극히 미미하였다. 또한 교파간의 교회 음악에 대한 견해 차이는 그 때로부터 150년 동안 좁혀질 줄을 몰랐다.
 
위클리프는 교회 음악의 화려한 전통을 허영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초대교인들은 그들이 감옥에 있을 때 복음을 가르치기 위하여, 또 나태함을 쫓기 위해, 그리고 시간을 더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경건한 노래를 불렀다고 지적하며, 현재 우리의 노래들은 그렇지 못함을 비판했다. 옛날의 노래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에 더 오래도록 머물게 인도하지만, 당시의 노래는 공허한 트릭으로 이루어진 음악적 테크닉들을 통해 흥청대게 하고 또 자만을 초래하게 했으며, 회중들은 그들의 가사 내용을 알아듣지도 못한 채 마치 바보처럼 쳐다보고만 있다고 말했다. 그의 뒤를 이은 후스의 보헤미아 교회도 실제적으로 다성음악과 기악을 교회로부터 추방하였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다음 해에 취리히 대성당의 민중사제로 임명됨으로써 스위스 종교 및 정치개혁을 주도한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는 상당한 수준의 음악교육을 받았고, 특히 악기를 다루는 데 재능이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예배에 음악이 강조되지 않도록 했다. 스위스 독일어 사용권에서 일어난 츠빙글리의 개혁은 프랑스어권인 제네바에서 장 칼뱅(캘빈, 1509-1564)에 의하여 강력하게 추진되는데, 기존 교회의 전통에 대한 칼뱅의 깊은 불신은 예배에서 가톨릭의 전례는 물론이고 문화, 예술 등 사람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가공적인 그 어느 것도 허락하질 않았다.
 
“악기를 사용한 음악은 오직 율법 시대에만, 그것도 인간들의 유치함 때문에 허용되었던 것이다.”라는 그의 말이 뒷받침하듯,  또한‘어떤 음악은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참된 경건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인용하여 기악은 말할 것도 없고 시편을 제외한 어떤 찬송도 허락하질 않았으며 그 영향은 200년 이상 칼뱅파 교회에 미친다. 따라서 칼뱅파 교회의 유일한 음악적 산물은 시편을 운율에 맞춰 번역하고 새로이 작곡되거나 일반성가에서 차용한 선율에 맞춰 부르는 시편가가 밖에는 없다.
프랑스어 시편가집이 1562년에 출간되었는데, 클레망 마로와 테오도르 베자가 번역하였고 루이 부르주아가 선곡과 작곡을 맡았다. 이 노래들은 기악 반주 없이 단선율로 제창unison되었는데 독일과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로 전파되어 번역 출판되고, 이제 우리가 본격적으로 돌아볼 독일 코랄에도 그 멜로디가 인용되는 등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음악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제한했던 시대의 시편가가 당대에 큰 영향을 미친 일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독일 코랄이 직선적이고 활기차며 리드미컬한 다양성이 있었던 것에 비해 시편가는 부드럽고 친근하며 엄숙하였다고 한다. 그 멜로디의 단순성과 직접성이 기억에 오래 남는 찬송으로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구디멜, 죈, 스벨링크 같은 작곡자들에 의해 그 시편가는 더욱 풍성해지지만 오늘날의 찬송가에서는 그 전래를 미미하게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주 신기한 일이며 루터파의 코랄과 대비되는 점이다.

   
 
여러 개혁자들 가운데 루터가 독보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은 그의 음악관에서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는 한 마디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굳게 확신했다.

루터는 성악에도 뛰어났으며, 류트를 비롯한 여러 악기들을 다룰 줄 알았다. 또한 화성법과 대위법에 대한 약간의 기술이 있어 다성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몇 개의 곡을 작곡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네덜란드 악파의 다성음악, 특히 조스캥 데 프레의 작품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였는데 그의 음악적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요소로서 음악의 힘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교육적이며 도덕적인 힘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의 세속화에 대한 경계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 내 젊은 친구여! 이 고상하고 건전하며 유쾌한 하나님의 창조물(음악)이 당신으로 하여금 찬양되도록 하시오! 그렇게 함으로 당신은 부끄러운 욕망과 좋지 않은 친구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동시에 당신은 창조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송하는 일에 익숙하게 될 것이오. 자연과 예술의 이 아름다운 선물을 호언장담하는 인간적인 사랑으로 팔아넘기는 비뚤어진 마음을 피하도록 특별히 주의하시오!”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음악은 가장 높은 칭송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음악은 인간 감정의 주인이며 지배자이다. … 음악은 인간을 조정하고 또한 자주 그들을 압도한다. … 슬픈 자에게 평안을, 경솔한 자에게 자제를, 절망한 자에게 용기를, 교만한 자에게 겸손을, 흥분되어 있는 자에게 차분함을,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자에게 유화(宥和)한 마음을 주는 데 음악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이들이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그것이 쓰레기건 보화이건 무조건 옛 것을 배척하고 부수고 밀어낼 때 루터는 생각 없이 그리하지 않았다. 가톨릭교회의 전례 음악도 존중하였고 오히려 그것을 개선하기에 힘썼다. 또한 모든 회중이 함께 찬송 드리기를 원했다. 이러한 토양에서 <코랄>이 나오고 하인리히 쉬츠나 요한 세바스찬 바하, 팰릭스 멘델스존, 요하네스 브람스가 배출될 수 있었다.
이번 종교개혁절에는 종교개혁 300주년 기념 헌정곡인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5번 <종교개혁>을 들으며 종교개혁의 참 정신을 명상해 봄이 어떠할까?

루터가 결코 원한 일은 아니었으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동방·서방교회 분열 이후, 교회는 두 번째 분열의 아픔을 감수했다. 유럽 전체가 종교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으로 큰 변혁을 수용하게 되는데, 특히 교회 음악의 변화는 엄청나다. 다음 산책에서는 루터 독트린에서 취한 구체적인 음악 정책을 살펴보자.

필자소개

   
▲ 주대범 장로
1955년 서울에서 출생, 교육에 종사한다.

대학에서 문학을, 개인적으론 작곡을 공부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10년 한 후, 출판사를 운영 했었다.

교회합창곡도 작곡하고, 글도 쓰면서

누가 부탁하면 목수 일도 하고, 시각디자인도 한다.

중앙루터교회 성가대 생활을 39년째 하고 있다.

주대범 장로 (중앙루터교회 성가대 지휘자)  bawee1004@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