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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은총이다<이정배 칼럼> 법과 하느님 정의 사이에서 세월호 참사를 읽다
이정배 교수(감신대) | 승인 2014.11.13 14:16

우여곡절 끝에 세월호 특별법이란 것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유족들의 뜻과 한(恨)을 풀지 못한 정치적 야합의 결과였기에 기쁨보다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그것이 특별법일 수 있겠는가를 회의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나마 200여일에 걸친 이 땅 시민들의 투쟁과 단식의 산물이었기에 애써 위로를 받으며 법정신이 옳게 실행되어 가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피로감보다 궁금증이 더한 백성들의 눈과 귀를 막아 기억을 지우고 사실을 왜곡하려 든다면 정권의 존립자체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다이빙 벨 영화를 통해 귀로 들었던 것이 눈으로 확인되듯 해경을 비롯한 정부의 의심스런 행태가 너무도 많았던 탓이다. 비록 특별법을 위한 일천 만 명의 서명이 성사되지 못했으나 이 영화를 그 수만큼 볼 수 있다면 진실을 밝히는데 큰 힘이 되리라. 아마도 정부가 이를 가장 두려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주지하듯 세월호 특별법의 요지는 유족들 또는 그를 대변하는 이들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자식들 죽음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온갖 의혹과 비리로 점철된 세월호 참사의 특별함에 견줄 때 의당 그리하는 것이 옳다고 시민들은 생각했다. 몇몇 신문들이 특별한 경우 기존 실정법 자체를 수정했던 가장 민주화된 영국의 사례를 들어 특별법 논리를 지지했으나 우민화(愚民化)에 바탕 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여론화 되지 못했다.

주지하듯 새누리당, 아니 청와대 쪽의 저항이 너무 컸고 이를 위법 화시키는 논리를 종편 등을 통하여 확산시킨 탓이다. 백성들을 어르고 달래며 웃기고 선동하는 방식으로 종편은 정부의 애완견 역할에 너무도 충실했던 것이다. 분리시켜 지배하는 정부의 술책으로 세월호 특별법을 입안한 민변의 힘 역시 상당부분 무력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슬픈 정황에서 종교적 차원의 역할이 있어야 했고 이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정의, 즉 하느님의 공의(公義)를 훼방하는 기존(실정)법 속의 폭력성에 대한 의문이자 고발일 것이다.

특별법을 실정법이 아닌 하느님 정의의 차원에서 바라봤어야 했다는 반성이다. 하지만 다수 교회와 성직자들조차 실정법 차원에서 세월호를 보았고 법을 능가하는 신앙 본연의 태도를 스스로 방기해 버린 것이다. 유족들, 본래 기독교 신앙인이었던 유족들에게서조차 교회와 하느님이 버림을 받은 것은 이렇듯 하느님 정의를 놓친 채, 그들 역시 기득권에 안주했던 까닭이다.

최근 로마서가 칭의론이 아닌 정의론의 시각에서 다시 독해되고 있다. 그동안 칭의(稱義)가 개인적, 종교적 차원에서 지나칠 정도로 협소하게 해석된 것에 대한 전폭적 교정인 셈이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시각에서 해방되란 요구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로마의 압제 상황에서 바울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익히 알 듯 바울은 당대의 실정법인 로마법과 모세 율법을 넘어서고자 했던 사람이었으며 희랍의 지혜마저 무력화 시켰던 장본인이었다. 법과 지식의 폭력성, 그를 지닌 존재를 특별하게 여기며 그 없는 상대를 홀대하고 핍박하는 실상을 너무도 잘 알았던 까닭이다.

바울은 예수가 유대법과 로마법에 의해 범죄자가 되었고 십자가에 달렸다고 기록한 최초의 성서집필자였다. 따라서 그는 다메섹 체험 이후 일체의 ‘법(法)’을 넘어서는 삶을 강조했고 그것을 믿음에의 복종이라 했으며 하느님 은총으로서 정의(칭의)라 여겼다. 법이 아닌 정의의 세상, 지식이 아닌 믿음의 현실을 이 땅에 구현코자 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구조주의 철학자 푸코 역시 이점에서 서구 근현대사 속에서의 법과 지식의 폭력성을 여실히 밝혀준 사상가라 하겠다.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서도 실정법에 의해 희생당한 의로운 인물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의문사란 이름하에 가려지고 덥혀진 억울한 죽음이 얼마나 부지기수일 것인가? 불의한 국가에 의해 희생당한 안타까운 주검이 온 산하를 덮고 있음에도 이 땅의 법은 국가란 미명하에 정부 편을 들어 주지 않았던가?

오로지 정권유지를 위해 사실을 은폐, 호도했던 지난 독재정부의 과오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유족들을 향한 냉담함에서 들어나듯 ‘역사는 진보 한다’는 말을 부끄럽게 만들며 그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실정법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 이것이 바울의 고민이자 우리들의 현실적 난제일 것이다. 국가라는 체제가 존재하고 그 틀에서 사는 한, 법 없이는 정의가 실현될 수 없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탓이다. 그러나 법이 정의와 등가가 되고 그렇게 강요되는 순간 그것은 결코 정의일 수 없다. 참 정의는 하느님의 의(義)로서만 들어날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의 세계이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고민했던 주제가 바로 이런 실상을 반영한다. 법을 무시할 수 없으나 법으로는 원하는 선(善)을 행할 수 없었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할 수 없음을 알았으며 그들 눈물을 닦아주는 정의(正義)를 위해서는 오로지 하늘 은총의 필요성을 크게 자각했던 것이다.

성서가 말하며 믿음의 세계에 속하는 하느님 정의는 결코 법으로 실현될 수 없다. 국가적 법에 안주한다면 기독교란 종교는 애시 당초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비유가 적시하듯, 성서적 정의는 아침에 일하러 왔거나 황혼녘에 부름 받았어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같은 품삯을 주는 주인의 마음을 닮았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그래서 하늘의 은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교환과 보상, 자본주의 법에 익숙한 우리가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잇는 차원이 아닌 탓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교회는 이 땅에서 이런 식의 정의가 실현될 것을 기대했고 이런 삶을 수용하는 것을 신학은 믿음에의 복종이라 가르쳐왔다.

자신의 행위가 법적 차원에 머무는 것을 언제든 부끄러워했고 그 이상이 되지 못하는 것을 고민해왔던 것이다. 법으로는 죄인이 아닐 지라도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고백도 이런 차원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현실교회가 오독하고 있으나 ‘오직 은총으로만!’ 이란 종교개혁 원리는 어떤 유형의 법이든 법으로 정의를 실현시킬 수 없음을 적시한 것이다. 주지하듯 금번 세월호 특별법은 법(法)을 넘어서 정의를 실현시키고자하는 이 땅 민중들의 염원과 한 맺힌 유족들의 절규가 반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실정법을 앞세워 정의의 실현을 방해했고 은총의 영역을 무시했으며 믿음의 세계를 짓밟아버렸다.

끝까지 법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억눌렀고 그들 대신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현 정권은 옛적 로마를 닮았고 교회 성직자 역시도 예수를 빌라도의 손에 넘긴 옛날 대제사장처럼 되어 스스로 하느님 정의를 왜곡했으며 결과적으로 유족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 설령 위정자들이 그리했다 한들 이 땅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법으로 은총을 대신한 것은 진정 용서받기 어렵다. ‘화있을 자’들이 된 것이다. 세상 중심이 약자들에게 있고 그들을 편드는 것이 하느님 정의인 것을 배부른 교회들이 망각한 까닭이다. 따라서 이후 이 땅에 미칠 화가 두렵기만 하다.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을 수장시키는 것도 부족해 그 부모들조차 세상에서 고립시킨 정부와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심판이 두렵기만 하다. 이제라도 하느님 정의를 위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일은 이 땅에서 범법자가 되는 일이다. 예수가 그랬듯이 말이다. 법을 넘어서야만 하느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까닭에 우리가 할 일은 그것  뿐이다. 법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공의, 그것을 위한 험난한 길을 하느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7장을 통해 하느님 은총을 깨달은 바울의 심정일 것이며 그가 자랑코자 한 십자가의 길인 것을 확신한다. 그럴수록 우리의 믿음 없음에 용서를 구할 뿐이다.  

이정배 교수(감신대)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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