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몸으로 드리는 기도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말로 드리는 기도가 왠지 마음 깊은 곳과 연결되지 못한 채, 그저 형식적으로 드려서,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저 고요히 침묵으로 드리는 기도가 편하게 다가 왔습니다. 또한 이러저러한 상념에 붙들려 다니지 않고, 몸으로 단순하고 정직하게 드리는 기도나 명상이 더욱 기도의 중심에 이르게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펜들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레버린스(Labyrinth)를 만났습니다. 산책길 옆에 마련되어 있는 아담한 정원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설명을 읽어 보니, 원래는 고대 서양의 전통에서는 미로(迷路)나 미궁(迷宮)의 뜻으로 수많은 방과 통로로 빠져 나오기 어려운 구조의 길이나 건물 등을 의미했는데, 이것이 기독교 전통과 결합되면서, 인생과 신앙의 복잡하면서도 신비로운 여정을 상징화하는 영적 수행의 상징적 문양으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당의 지하나 정원 같은 곳에 다양한 레버린스가 설치되었고, 이 레버린스 위를 걸으면서 인생과 신앙의 신비와 역설에 대한 묵상과 성찰 등을 진행한다고 하였습니다.

▲ 펜들힐 레버린스

걷기를 좋아하기도 했고, 그 설명이 맘에 들기도 해서, 펜들힐 생활 동안 자주 레버린스에 들려서 걷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때로는 한 발 한 발 천천히 걷기도 하고, 맨발로 걷기도 했습니다. 래버린스의 구조가 참 묘합니다. 일단 직선이 아니고 곡선의 길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도 그저 직선적으로 돌진하는 것만이 아니고, 때로는 한 없이 정체되기도 하고, 뒤로 물러나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곡선의 길도 천천히 앞으로 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다시 뒤로 돌아 서기도 합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참 제 인생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제 인생에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참 힘겨운 경험이었고, 제 인생을 한 참이나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던 사건들이었지요. 그 인생의 아픈 상처와 기억들을 떠 올리며, 레버린스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뒤로 물러서는 듯한 곡선의 길은 갑자기 중심의 길로 들어섭니다. 물론 중심에 들어서기까지에도 몇 차례의 나아감과 물러섬의 곡선의 길이 계속됩니다. 그렇지만 그 길을 꾸준히 가다보면 마침내, 텅 빈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 중심에 앉아 봅니다. 그리고 고요히 제 안에 있는, 제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무한한 사랑과 자유의 품에 편안하게 안겨 보았습니다. 한 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이제 다시 중심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출발합니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마음에 담습니다. 그래! 앞으로의 나의 삶의 여정 또한 순탄치만은 않겠지. 곡선처럼 유연하게 나아가며, 뒤로 물러서는 것 또한 삶을 더욱 지혜롭고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좀 더 가볍게 남은 삶을 살아가리라고 마음을 모으면서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갑니다. 마침내 레버린스를 다 마친 후에는 돌아서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손을 모읍니다. 그러면서 마치 제 인생이 끝나는 시점에서, 한 생애를 살아 준 저 자신과 모든 이들, 그 한 가운에 있는 사랑이신 그 분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습니다.

▲ 스토니포인트(미국연합장로교회 피정센터) 레버린스

언젠가는 공동체 생활이 참으로 고단해서, 레버린스 길을 걸었습니다. 과연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가? 비싼 돈 들여가면서, 이렇게 고생고생 하면서, 여기에 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많은 생각들과 그 속의 고민들이 올라 왔습니다. 한 참을 걷고 있는데, 레버린스 길  수풀속에서 노란 나비 한 마리가 갑자기 출현했습니다. 그 나비의 출현으로 인해 저의 고민이 답을 구한 듯 했습니다. 그렇지!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저 나비처럼,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자신의 본색과 아름다움으로 마음껏 날아다니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인생이 되기 위해서지. 잔잔한 기쁨과 평화가 제 마음속에 찾아 왔고, 그 힘으로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이런 저런 공원을 보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공원 등지에 자연과 인생이 함께 어우러지는 레버린스 정원을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길을 걸으면서 자연의 기운도 듬뿍 받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기도와 명상의 시간도 가질 수 있는 일석이조의 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간이 있는 교회가 있다면, 교회에서도 레버린스를 설치하고, 교우들과 함께 걷는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찾아보니, 원주 영강교회는 이미 새로운 성전을 지으면서 주차장을 활용하여 레버린스를 설치했음을 확인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레버린스 걷기를 통해 걷는 행위 자체가 거룩한 기도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것이 점점 더 깊어지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있는 ‘걷는 기도’의 맛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몸으로 드리는 다양한 기도의 길들이 열려져서, 우리의 일상에서, 몸과 함께 이루어지는 평범한 활동들 - 걷기, 호흡하기, 보기, 말하기, 듣기 - 모두가 하나님과, 그리고 진정한 나와 더 깊고 풍요롭게 만나는 기도의 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레버린스 순례자의 기도

모든 길의 주인이신 하느님,
저는 오늘 레버스린스 앞에 서서,
주님께 이르는 인생 여정을 그려 봅니다.

지름길만 찾는 성급한 이 사람은
기다림을 싫어해
직선으로만 당신께 내닫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없는 인내의 하느님께서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전혀 색다른 길을
제 앞에 펼쳐 보이십니다.

가운데로 갈 때엔 벅차오르지만
이내 변두리로 빠져 나가는 이 길...
왠지 저의 인생과 닮았습니다.
한걸음씩 디딜 때
때론 목표에서 멀어지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늘 저를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놀라움과 신비이신 하느님,
이 레버린스는 그 신비에
저를 맡기고 따르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또렷이 알지 못해도
믿고 우러르며 가는 이 길은
굽이쳐 들고 굽이쳐 나가며
이내 만유의 중심이신 주님께
저를 인도합니다.

                                                         -진 존넨버그-

 

이진권 목사  ljkbar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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