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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태어남<김명수의 성탄절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4.12.12 13:21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에 가시니, 제자들도 따라갔다. 2.안식일이 되어서,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3.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막6:1-3)

1.Jesus went out from there and came into His hometown; and His disciples followed Him. 2.When the Sabbath came, He began to teach in the synagogue; and the many listeners were astonished, saying, "Where did this man get these things, and what is this wisdom given to Him, and such miracles as these performed by His hands? 3."Is not this the carpenter, the son of Mary, and brother of James and Joses and Judas and Simon? Are not His sisters here with us?" And they took offense at Him.(Mark6:1-3; NASB)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일컬어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헌데 초기기독교 세계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눈은 하나로 통일되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삼위일체기독론과 양자기독론을 들 수 있는데요.

삼위일체기독론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믿고 숭배하는 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교리가 형성된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는 4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 이전의 기독교 역사에서는 성자聖子 하나님 신앙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일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니케아에 있는 황제 별장에 세계교회 대표자인 감독들과 장로들 318명을 초대했어요. 그리고 회의를 거쳐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통일된 신앙고백 문서를 작성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통일된 그리스도 신앙을 만들어, 통일 로마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사용하기 위한 의도에서였지요. 이 회의의 주제는 그리스도론Christology이었어요.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보아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문제였지요.

이집트교회를 대표했던 장로 아리우스는 예수그리스도를 시대의 예언자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예수는 하나님을 닮은 분이고,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다. 허나,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거나 하나님 자신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예수의 신성神性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더는 이와 다른 입장이었어요.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는 회의 도중 죽었어요. 그래서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입장을 대변하여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지닌 분이라는 입장을 밀고 나갔습니다. 성부聖父 하나님과 성자聖子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는 것이었어요. 예수그리스도를 성자聖子 하나님으로 보는 예수 신성神性 신앙이 공식화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콘스탄티누스는 예수 신성神性 신앙에 보다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로마황제의 통치를 인간이 아니라 신적인 예수그리스도의 권위로 보장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이 회의에서 예수 신성神性 신앙이 승리를 거두었고, 아리우스파는 추방되었어요. 그 결과로 이른바 ‘니케아신조’(Symbolum Nicaenum)가 만들어졌는데요. 예수 신성神性 신앙이 근본 뼈대를 이루고 있어요. 이 신조는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가 주일 예배 때마다 공동으로 고백하는 사도신조(Symbolum Apostolicum)의 전신前身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회의(381), 에베소회의(431)를 거쳐 칼케톤회의(451)에서 삼위일체 교리(Trinity doctrine)는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어요. 성자와 성령도 성부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본성을 지닌 분이라는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기독론이 완성되기까지 무려 150여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지요. 그 후로 삼위일체 교리신앙은 서방기독교 1500년 역사에서 이단異端과 정통正統을 구분 짓는 중요한 잣대로 이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보는 또 하나의 다른 시각으로 양자기독론Adoptionism이 있어요. 이 기독론에서 보면,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지요. 어떤 특정한 역사적인 계기를 통해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入養되고 확정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어요.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롬1:3-4)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고 확정된 것은 어디까지나 부활 이후의 일이라는 주장이지요.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는 장면을 동일하게 보도하고 있어요. 30세쯤 되어서 출가한 예수는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지요(마3:13-27/눅3:21-22Q; 막1:9-11).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올 때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첫째로 하늘이 열렸다고 하고 있어요. 예수의 수세受洗는 일종의 개천開天사건이라는 말이지요. 둘째로 비둘기 모양을 한 성령이 내렸다고 하고 있어요. 성령 내림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시장의 언어로 번역하면 일종의 ‘신 내림’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셋째로는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다고 하고 있어요. 천어天語를 들은 사건이었지요.

예수께서 들은 천어天語는 무엇인가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너는 내 기쁨이다”라는 말씀이었어요. 자기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며, 새로운 자기 각성이지요. 자기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예수의 새로운 자기이해는 붓다의 천상천하유아독존적天上天下唯我獨尊的 깨달음에 비견할만해요. 공인公人으로서의 자기 각성은 예수로 하여금 공인公人으로 살게 했어요. 그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았습니다.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는 3년에 걸친 예수의 공생애公生涯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의 그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생애公生涯 이전의 예수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요한복음은 서두에서 태초에 말씀Logos이신 그리스도께서 있었다고 쓰고 있지만, 그것은 제가 보기에는 어디까지나 요한교회 신도들의 ‘신앙고백의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에요.

마가복음은 제일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데요. 예수의 유년기나 소년기의 이야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요. 마가저자는 복음서를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과 인연 맺는 이야기로 시작하지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어떤가요? 예수의 어렸을 때 이야기가 딴 한 번씩 나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신했다는 이야기(마2:13-15)와 12살 쯤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 갔었다는 이야기(눅2:41-49)가 전부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자의식을 갖고 공생애를 살았던 그 이전의 예수는 우리와 다르지 않게 유아기, 유년시절, 소년기, 청년기를 보냈을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젖을 빨지 않으면 단 며칠도 살 수 없는 유아기 시절도 있었을 것이고요. 부모의 돌봄을 받고 자랐던 유년시절과 소년시절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나사렛 농촌마을에서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평범한 시골 청년으로 자랐을 것입니다. 

본문은 공생애公生涯 이전의 지극히 평범한 예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전역을 돌아다니며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실 때 일이었어요. 안식일이 되자, 예수는 가족도 만날 겸 고향마을인 나사렛에 잠깐 들렀던 것 같아요. 예수께서 마을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는데요. 동네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가 전한 지혜말씀이 비범하고 권능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의 말씀을 듣고 동네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어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저자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지금도 이 동네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아니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서 우리와 함께 농사짓고 목수일 하던 예수가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었기에 저런 메시아의 지혜와 능력이 생겼을까?

예수가 살던 시대의 유대인 대부분은 메시아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메시아가 와서 로마의 압제 하에서 고통을 당하는 그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살았어요. 허나, 가족들도, 동네사람들도, 심지어 예수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조차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이샤리아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묻지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입니다.”(마16:16) 베드로가 고백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몰랐다는 말이지요.

성탄절에 태어난 아기 예수 안에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자라날 수 있는 씨알이 내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안에 내재되어 있던 메시아의 씨알이 그가 자라면서 싹이 트고 자라났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아기는 자라나면서 튼튼해지고, 지혜로 가득 차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하였다.”(눅2:40)

   
 
그러면 언제 예수 안에서 메시아 됨이 온전하게 드러났을까요? 세례를 받을 때였을 것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내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를 하늘로부터 듣고, “아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는 사실을 지각知覺했을 때일 것입니다. 내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삶을 살았어요. 생각이 존재를 바꾸어놓았던 것이지요. 그는 사적私的인 삶을 포기했어요. 혈연, 지연, 소유에 매이지 않고 살았어요.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에 얽매인다는 것을 뜻하지요.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때, 모두를 얻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노자는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도덕경2장>를 말했어요. 공을 세우고 나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의식을 가졌던 예수는 자기 한 몸이나 가족에게 국한시켜 자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갈릴리 농촌에서 사람다운 삶을 빼앗긴 채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씨알민중에게서 또 다른 자기 모습을 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씨알민중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동반자로써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최상의 계명이 무엇인가요? 경천애인(敬天愛人)입니다(막12:30-31). 하나님을 공경하고 씨알민중을 사랑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내 안에 하나님의 유전자와 씨알민중의 DNA가 공재共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메시아 사건은 예수 한 분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맞아들이고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될 수 있는 각별한 권능이 주어졌다고 요한복음에서는 말하고 있어요(요1:12). 마태복음이 전해주고 있는 예수말씀에는,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해야 한다”고 합니다(마5:48).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하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도록 하라는 말과 통하지요. 그리스도의 탄생은 지나간 과거사건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every day 우리 가운데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지금-여기’(hic et nunc)에서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수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기도 어려운 일인데요, 그리스도처럼 완전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본을 따서 창조했다고 되어 있어요(창1:27). ‘하나님의 본’(imago dei)을 지니고 있기에,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닮은 구석이 있다는 말이지요. 기독교 복음은 이러한 인간에 대한 대 긍정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은 가능성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요한교회 신도들의 믿음이었어요(요1:12).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씨알이 주어져 있다는 얘기이죠.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메시아의 씨알에 물을 주고 싹을 틔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싹을 정성들여 잘 가꾸세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하세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능성을 현실화시켜나가십시오. 그것이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씨알을 태어나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기예수의 탄생은 그러한 희망과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사건이었어요.

금년에는 12월 22일이 절기상 동지冬至입니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지요.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첫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로마는 동짓날(로마시대의 달력으로는 12월25일)을 태양신의 생일로 잡아 축제 판을 벌였어요. 354년 로마의 황제 리베리우스Liberius는 이 날을 선정하여, 예수그리스도의 탄신을 축하하는 교회 절기의 하나로 삼았어요.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몇 년 몇 월 며칠에 태어나셨는지는 모르지요. 12월 25일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아니라, 그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영어로 크리스마스Christmas이지요. 마스mas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미사missa입니다. 미사는 ‘기념일’을 뜻하지요. 그리스도의 탄신을 기념하는 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아기예수의 탄생은 어둠의 시기가 끝나고, 태양이 밝아오는 희망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로마교회는 이 날을 지켰고요,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절기 중 하나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변화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를 지탱하는 근본원리이지요.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닙니다. 단지 내가 이를 체감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힘든 일, 지나갑니다. 궂은일, 지나갑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 지나갑니다. 박정희 시대도, 이명박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현 정권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지나갑니다. 우리가 암울한 정치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얼음 조각을 보면서 그 너머에 있는 물을 동시에 보는 것, 추운 겨울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봄의 따스함을 보는 것, 어둠 속에 있으면서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것을 가리켜 통찰력이라고 해요, 관상觀想이라고도 합니다. 불교 언어로는 조견照見이라고 합니다.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님을 보듯이 진리의 세계를 보는 것이지요. 아기예수의 태어남은 어둠 속에 잠긴 인류역사에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 살아가던 갈릴리 씨알민중에게 한 줄기 희망이었습니다.

비록 사회의 외형적인 모습은 달라졌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세계 10위권의 경제선진국이 되었음을 자랑하지만, 그것은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체감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부패와 비리 온도는 거의 절망적인 수준입니다. OECD 국가 중 청소년과 노인 계층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어요. 

이런 암울한 사회현실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을 닮은 구석이 있고, 그리스도의 씨알이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씨알의 싹을 틔우고 잘 가꾸어 꽃 피고 열매 맺도록 하는 일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마음이 되어 세상을 관觀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눈이 되고 귀가 되어 세인世人의 고통소리를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씨알민중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꿈을 이루어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난 절기를 축하하며, 어둠 속에서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씨알민중에게 빛과 희망을 주는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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