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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학살과 통진당 사법학살<전순란의 휴천재일기-2014.12.19>
전순란 | 승인 2014.12.22 13:08

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맑음

지리산 청학동의 하룻밤은 정말 추웠다. 방에 들어가니 실내 온도가 11〬 여서 난방이 오르기까지 내복 위에다 잠옷을 입고 양말을 신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한기가 가시질 않았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머리맡의 자리끼가 쨍 소리 날만큼 얼어 있고 방바닥을 닦고서 윗목에 던져 둔 걸레 끝자락을 들면 동태처럼 번쩍 들리곤 했었는데... “여보, 춥다. 그냥 짐 꾸려서 집으로 갈까?” “안 돼. 오교수님이 아침에 일어나셔서 우리가 야반도주했다고 흉보실 거야.”

   
▲ 지리산 청학동의 새벽
그렇게 잠들었는데 아침 기상 시간에는 실내 온도가 20〬   로 올라 있어서 응신을 할 수 있었다. 교수님 댁으로 올라가니 정성스레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우리가 추웠다니까 임봉재 선생님은 당신은 침낭을 갖고 다닌다면서 남의 집에 가서 자기가 잔 이불 빨래를 해 주고 올 수도 없어서 아예 자기 잠자리는 들고 다니신단다. 남이 자던 시트가 꺼림칙하여 여행 중에도 시트를 차에 넣고 다닌 적 있었던 나의 깔끔떨기에 비해서, 임선생님의 생각은 얼마나 이타적인가!

오교수님댁 창가에 걸어 양파망을 씌워 둔 곶감이며 길다랗게 줄을 묶어 마당 전부로 종횡무진하는 세 마리의 강아지는 집주인의 너그러운 성품을 엿보게 한다. 보스코가 12시에 칠선계곡 입구에서 지리산 댐에 관한 함양시민신문 좌담회가 있어 아침만 먹고서 묵계리를 나섰다.

   
 
   
 
   
 
   
 
중산리 계곡으로 내려오는데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을 헌재가 내렸다는 뉴스가 떴다. 보스코의 옆얼굴을 보니 그의 한없는 절망감이 그곳의 기나긴 터널만큼 어두워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다. 우리 둘 다 말이 없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엘리사벳씨의 절망과 눈물이다. 그니의 길이 너무도 절망적이고 20여만 명 통진당 당원들과 진보세력이 걸어야 할 가시밭길이 너무도 어둡다.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언도 하룻만에 집행을 해버린 애비! 보도연맹 수십만 명을 학살해 버린 사건에 못지 않게 엄청난 사법학살을 마련해준 사법부(21세기 개명천지에 말이다)! 국정원이 개입한 부정선거로 당선된 2주년에 이토록 유린된 법정의에 건배를 들고 있을 "독재자의 딸"!

요즘 청와대를 들끓게 하는 모든 사건을 단번에 덮어버리는 이 엄청난 정치적 충격! 국민 전부에게 칼끝을 들이댄 사건이다. 국정원부정선거개입을 세월호 사건으로 덮고, 세월호와 국정농단은 통진당 해산으로 덮고... 앞으로도 살아갈 3년을 이런 비극적 파고 속에서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출구가 안 보인다.

   
▲ "산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얻으려고 저 눈 덮힌 산에서 버티며 죽어갔을까? (지리산 천왕봉)
오후에는 보스코와 가장 친하게 지내온 박노헌 신부, 신학교 시절의 우정을 유일하게 이어온(유병일 신부, 오창선 신부와도 연락은 있었지만) 박노헌 신부가 사경을 헤맨다는 이메일이 떴다. 그 사람처럼 건강하고 호탕하고 주변 사람들 말로는 한 성깔 한다는 친구를 위해서 보스코랑 말없이 저녁기도를 바쳤다. 또 한 사람의  벗이 세상을 떠나는구나...

   
 
내일 느티나무독서회 여성동지들을 맞이할 준비로 오후가 바빴다. 피자와 파스타만 하기로 했지만 일손은 늘 분주하다. 회원 중 딸만 둔 사람만 딸과 함께 우리 집으로 초대하였다, 성탄축하 겸 망년회 겸.

밤 11시 30분에 일기장을 들고 자리를 잡았는데 말남씨가 거나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니 남편 같은 홀애비 하나 구해도!” “난 못 찾겠으니 우리 남편 너 가질래?” “난 의리가 있어 그린 몬한다. 그 스님 계신 곳 좀 알아도! 하루 죙일 고생하고 나서 ‘그래 잘 했어.’라는 한 마딘 들어야 사는 거 아냐?”

그렇다. 옆구리가 각별히 시릴 이 겨울 밤, 종일 수고한 얘기들을 나누고 다독이고 가만히 등대고 자는 게 고작이지만 여의고 보면 그게 가장 소중한 부부애였음을 깨닫게 해주는 그니의 하소연이다. “여보, 등 좀 긁어줘.”라는 가장 평범한 한 마디가 절대로 평범하게 들리지 않을 그런 시간이 우리에겐 멀지 않다. 아니, 문 저편에서 지금 기다리고 있을 게다.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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