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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복의 삶과 구도의 삶<김명수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4.12.29 14:20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14.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분배자로 세웠느냐?" 15.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눅12:13-15;새번역)

Someone in the crowd said to Him, "Teacher, tell my brother to divide the family inheritance with me." 14.But He said to him, "Man, who appointed Me a judge or arbitrator over you?" 15.Then He said to them, "Beware, and be on your guard against every form of greed; for not even when one has an abundance does his life consist of his possessions." (Luke12:13-15;NASB)


갑오년 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20년 전인 1894년도 갑오년이었어요. 외세의 침략과 무능한 이조 말 봉건 정권에 항거하여 동학이 주축이 된 씨알농민 해방전쟁이 일어났던 해이고요. 노비제도를 비롯하여 양반과 상놈을 차별하는 반상班常제도를 폐지하는 등 사회개혁이 실시되었던 해이기도 합니다. 명실 공히 씨알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고 근대 시민국가의 시작을 알리는 해였어요. 

올해 갑오년을 맞이하여 저 개인으로는 이와 연장선상에서 민民이 주축이 된 평화통일 운동과 한반도의 미래역사를 밝혀주는 문명사적 대 전환의 기운이 일어나길 기원했습니다. 허나, 이러한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어요. 금년 들어 남북관계를 비롯한 국내 정치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요, 한국사회에서는 갈등과 분열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4.16 세월호 대참사 사건”은 무능한 정권의 늑장대응으로 300명이 넘는 고귀한 생명들이 희생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12.19 통합진보당 해체 사건”은 어떻습니까? 헌법재판소는 구체적안 법률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통합진보당 해체를 선고하고 소속 국회의원 5명의 의원직을 박탈했어요. 통합진보당, 물론 문제가 많은 당임을 온 국민이 알고 있어요. 허나, 국민에 의해 만들어진 정당이고,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국회의원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심판은 국민 손에 맡겨야 마땅한 일이겠지요. 헌데, 현 정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민이 맡겨준 법의 칼날을 마구 휘둘러대며 자기 입맛에 맡지 않는다 하여 국민의 권리를 이런 식으로 짓밟아버렸어요.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임을 망각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정권은 결국 민民에 의해 심판받게 된 것이 역사의 교훈이지요.

금년에 교수신문이 선정한 사자성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입니다. 기원전 2세기 최초로 중국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죽자, 권력을 잡은 신하 조고(趙高)는 후임으로 호해를 허수아비 황제를 세워놓고, 어느 날 그에게 사슴 한 마리를 선물했어요. “폐하, 천하의 명마名馬를 바치오니, 부디 거두어주소서.”황제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어요. “승상, 저건 분명 사슴이거늘, 어찌 말이라 하시오?” 그러자 조고가 엄숙하게 말했어요. “폐하, 저것은 분명 말입니다. 어찌 폐하께서만 사슴이라 하시는 것입니까?” 황제는 주변에 서 있는 대신들을 둘러보며 물었어요.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저것이 말로 보이오?”신하들은 조고의 눈치를 살피다가 대부분은 “예, 저것은 말(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조고는 말(馬)이 아니라고 대답한 신하들을 기억해두었다가 모두 처단했어요. 그 후 황궁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가 생겨났어요. 사슴을 말로 만든 것은 조고가 아니라 그의 말에 침묵하거나 동조한 신하들인 셈이었지요.

   
 
그런데 이것은 2200년 전 진秦나라 때 이야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한국사회의 정치현실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국정원 정치개입과 정윤회 비선 국정농단 사건으로 요약되는 권력실세들 간의 세력싸움은 이 고사古史를 상기시킵니다. 지금 현 정권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고 있어요. 제1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조차도 “사슴을 사슴이다”라고 말하는 의원이 하나도 없어요. 쿠데타가 혁명으로, 국민탄압이 국가안보로, 유신으로의 복귀가 자유민주 수호로, 세월호법 제정을 주장하는 자들이 종북 세력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정치현실이 아닌가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가 흔들리고 있고, 대통령 지지율이 30% 대로 하락되었어요. 

저는 역사란 진보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사람인데요,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이러한 진보사관進步史觀에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역사란 퇴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세계역사를 두 가지 시각에서 바라보는데요. 이 세상에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요,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가깝다는 시각이 다른 하나입니다. 세상일에는 고정되어 있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좋거나 기쁜 일, 지나갑니다. 집착할 바 못 됩니다. 힘들거나 슬픈 일도 지나갑니다. 후회할 바가 못 됩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흘러가는 시냇물을 붙잡아둘 수 없듯이 내게 있는 것들도 잡아둘 수 없어요. 언젠가는 떠나고 맙니다. 다만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고 우리는 살고 있을 뿐이지요.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어둠을 바라보면서 “아하! 새벽이 가까이 와있구나”하는 징후sign를 읽을 수 있어야 해요. 1년에 밤이 가장 긴 날이 동지冬至입니다. 밤이 가장 긴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지冬至는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첫날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옛날 로마인들은 동지冬至를 태양신의 생일날로 잡아 기념했던 것이지요. 밤이 가장 긴 날에서 새해의 시작을 본 것이지요. 그래서 로마교회는 이 날을 크리스마스로 삼아 지키기 시작했어요. 모든 것은 변합니다. 성공했다고 해서 집착할 바가 못 됩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후회할 바도 못 됩니다. 성공이나 실패란 변화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이지요. 성공했을 때 실패했을 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이 바닥을 칠 때는,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구나!”를 꿰뚫어보며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성공과 실패라는 객관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지요. 다만 성공하거나 실패했다는 생각이 있을 뿐이지요. 그러한 생각에 갇히게 될 때 우리는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힘들게 살아가게 됩니다. 파도란 실체substance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않습니다. 파도는 단지 바람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바다물결의 출렁임에 불과하지요.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고통이나 괴로움도 이와 같습니다. 인생이란 바다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파도와 같은 것이지요. 후회하거나 집착할 바가 못 됩니다. 

본문을 보면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한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자기 형에게 말해서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 좀 나와 나누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어떤 사람이 재산을 많이 남겨두고 죽은 것 같아요. 자식들 간에 유산분쟁이 있어난 것이지요. 유대사회의 관행에 따르면 큰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의 2/3를 차지하게 되고, 나머지가 남은 자식들 간에 분배되지요. 헌데, 큰 아들은 욕심이 많아서인지 아버지 유산을 몽땅 차지한 것이지요. 그래서 형제들 간에 유산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예수께서 불쾌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를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인으로 세웠느냐?”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요? “보라! 모든 탐욕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 탐욕으로 번역된 ‘플레오넥시아(pleonexia)’는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서 사는 맛을 느끼는 마음이지요. 생명으로 번역된 ‘조에(zoe)’는 진리, 영생, 구원 또는 ‘참 나’를 등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개념이지요. 다석 유영모 선생께서는 늘 ‘얼 나’로 살라고 강조했는데요. 영적 자아로써의 ‘얼 나’가 본문에 나오는 ‘조에(zoe)’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나요?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요. 특히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사회구조입니다. 헌데 예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나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돈 가지고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생명, 곧 ‘참 나’로 산다는 것, 곧 구원받은 삶이란 돈 많은 것과 별개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양quantity이 아니라 질quality이며, 소유having가 아니라 존재being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본문에서 밝히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헌데 한국교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신앙행태는 어떤가요? 모든 신앙의 척도가 양적인 축복과 연결되어 있어요. 신앙이 좋은 것도, 물질축복으로 평가되지요. 구원의 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축복을 받았는가로 판가름 나지요. 일부 한국개신교에서 신앙생활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나요? 예수 믿고 부자되는 것이에요. 죽은 후 천당에 가서 열두 고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량적 소유에 근거한 허황된 신앙이 한국개신교에 널리 퍼져있어요. 비극이 아닐 수 없어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생활 공부와 인생 공부가 그것인데요. 일반적으로 생활 공부에는 성공했는데, 인생 공부에는 실패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제가 사회복지학을 공부할 때 매슬로(A.Maslow)의 욕구단계이론(Need Hierarchy theory)을 배운 적이 있어요. 그는 인간의 욕구를 생리적인 욕구와 영적인 욕구로 구분하고 있어요. 생존하려는(Physiological) 욕구와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전하려는(Safety) 욕구인 생리적인 욕구가 채워져야, 그 다음 단계인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 하고(Esteems) 자기를 실현하려는(Self-Actualization) 영적인 욕구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고 사람답게 살려면 영적 욕구가 채워져야 하겠지요. 

생리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건강, 돈, 사람입니다. 몸에 좋은 것이라면 사족四足을 못 쓰는 것이 한국인들이지요. “인생에서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절반을 잃은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이러한 격언은 한국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도를 보여줍니다. 요즈음 한국남성들 중에 동남아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주로 몸에 좋다는 보양식을 위해서입니다. 물만 마셔도 살이 찐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먹지 않으면 살이 안찝니다. 간식을 자주하면 밥 적게 먹어도 살찝니다. 먹는 습관 바꾸지 않으면서 살빼기 위하여 다이어트하거나 휘트니스 클럽에 나가 열심히 땀 흘려도 별 효과가 없어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살 빼려면 식생활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물론 건강, 중요합니다. 허나, 건강한 몸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요. 건강한 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삽니다. 한국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어요. 온 국민의 80% 이상이 이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어요. 개인이든 회사이든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산을 모으는 수단이 정당하고 적법해야 합니다. 돈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은행통장에 돈이 쌓이는 재미로 산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번 돈으로 무엇 할 것인가를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잠언에 보면 아굴이 주님께 인생 공부에 필요한 두 가지를 구하는데요.“주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리니,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자 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잠30:7-9)

셋째는 사람이지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지요.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살다가, 관계 속에서 죽습니다. 사람은 관계적 존재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건강, 재물, 사람은 모두 나 밖에서 얻어지는 것들입니다. 헌데, 밖에서 얻은 것은 반드시 나를 떠나게 되어 있어요. 건강도, 재물도, 사람도 떠나가지요. 제가 금년 2월에 퇴직을 했는데요. 은퇴하고 나니 하나씩 내 곁을 떠나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이고요. 하루하루 현재 상태에서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며 살려고 해요.

제가 생활 공부와 인생 공부를 말했는데요. 생활이 무엇인가요? 옷 입고 밥 먹는 것이지요.  잠을 자고 대소변 보는 것입니다(衣食住寢). 가고 오며 앉고 눕는 것이지요(行住坐臥). 보고 들으며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지요(視聽言默). 이게 생활인데요. 생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어요. 첫째는 물질이 있어야하겠지요. 돈이 있어야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거든요. 둘째로 권력이 필요해요. 자기 뜻을 펴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명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서이지요. 돈을 벌거나, 성공출세하거나, 사회적으로 유명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일컬어 생활 공부라 할 수 있는데요. 생활 공부가 잘 안되어 있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생활 공부가 잘 되어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이나, 생활 공부가 잘 안 되어 생활고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 사이에 같은 것이 있어요. 사회적인 성공이나 출세를 떠나서 모든 인간은 결국 태어나서 늙고 죽는다(生老死)는 것이지요. 사람의 신체구조는 25세까지는 성장하고 자라지만, 25세가 넘으면 성장이 멈추고 늙어가기 시작하지요. 늙는다는 것은 조금씩 죽음을 향해 가까이 가고 있다는 뜻이지요. 생노사生老死는 사람으로 태어나 겪게 되는 인생의 길입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창조질서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생활 공부를 잘 해서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누리고 살기는 하지만, 불행해진 사람들 그리고 돈 관리나 건강관리에 성공했지만 인생 관리에 실패한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봅니다. 돈 벌고 출세하려고 평생을 죽자 살자 뛰어다니다가, 덜컹 한계상황에 부딪혀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돈 만이 벌고 출세는 했는데,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게 되지요. 이들은 모두 인생 공부에 실패한 사람들이지요.

생활고生活苦는 돈으로 해결될지 모르지만, 인생고人生苦는 지혜로 해결됩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아요.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리다 보면 인생 공부를 놓치게 돼요. 지혜를 얻는 것이 인생 공부인데요. 내가 무엇이고 누구인가를 깨닫는데서 부터 인생 공부가 시작됩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정된 삶을 산다는 것, 누구나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인생은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는 것, 내게 있다 하더라도 내 것이라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어떤 형편과 처지에 놓여있든지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살면 죽는 것도 유익하고 축복이라는 것(빌1:21), 생멸生滅의 세계 안에 있으면서 생멸生滅을 초월한 삶을 사는 것이 인생 공부이지요.

생활 공부에 지나치게 빠지거나 갇혀 살다보면, 인생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생활 공부를 하면 복을 얻게 되지만, 인생 공부를 하면 진리와 영생을 얻게 되지요. 하루 세끼 먹고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면, 인생 공부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삶에 여유가 생기고 스트레스를 덜 받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넘어, 지금 주어진 형편에서 만족하는 지족知足의 삶을 살게 되지요. 사람의 생명은 물질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구복求福의 삶에서 구도求道의 삶에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삶의 질質을 높이고 성공한 인생을 사는 여러분이 되길 빕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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