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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평안해야 고흥도 평안하다<박명철의 인생 삼모작 12-마지막 회>
박명철(전 연세대교수) | 승인 2015.01.02 12:02

퇴임 후 고흥으로 내려오면서 포기한 것이 있다면 다음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 하나는 고향인 제주도 귀향을 포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에서 내가 관계해온 거의 모든 모임을 포기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 회귀본능이 발동한다고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애정이 있었기에 나는 귀국한 이후 근 5년 가까이 여름방학만 되면 가족과 함께 제주도 화순 해수욕장에서 보내곤 했다. 이곳은 내가 태어난 모슬포에서 약 8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가기도 하고 해수욕하러 찾아가곤 했던 곳이다. 또한 나는 귀국 후에도 계속해서 제주노회에 적을 두고 정기총회가 되면 의무감을 가지고 참석했다. 찾은 길에 성묘도 하고 죽마고우를 만나보곤 했다. 이 모두는 내 맘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는 애향심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퇴임 전 나는 후배 동역자에게 제안했다. ‘퇴임 후 내가 제주노회에서 무임목사로 있으면서 목회자가 자리를 빌 경우 무보수로 봉사하는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이에 대해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또한 나는 고향 벗들에게 제안했다. ‘퇴임 후 고향에서 보내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들의 반응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돈 가지고 온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오지 마라. 너는 우리지방에서 배출한 인물인데, 조경사 쫓아다니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 타령하면서 포기해야 했다.
 
다음으로 나는 귀촌하면서 서울에서 관계했던 그 모든 모임과 사귐의 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다니던 교회와 학술모임, 시사토론회, 동창회, 간간이 참여했던 광화문 촛불시위 등 어느 하나 제대로 가볼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내가 시골에서 편히 보내고 있지만 나에게는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그늘진 곳이 있다. 그것은 삶의 거처를 서울에서 시골로 옮긴 것이 마치 내가 고난의 소리를 외면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책감이다. 이따금씩 나의 내면의 소리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이곳을 도피처로 삼은 것은 아닌가?’, ‘정년퇴임은 그 구실이 아닌가?’, ‘바다가 좋고, 낚시가 그렇게도 좋은가?’ 등등. 혼자 즐기는 이면에는 이 같은 질문과 자책이 드문드문 뒤따른다. 지난 9월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의 아픔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40여 일간 단식에 들어갔던 김홍술 목사는 그의 외로운 심정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이것은 나의 마음 그늘질 곳을 휘젓는 호소이기도 했다.

“아~ 앞이 캄캄하다. 백 수십 명의 거대 야당은 지리멸렬이요, 민주화 거리 투쟁 화려한 옛 용사들과 후예들은 어딜갔단 말인가? 모두 한 때의 친근한 정권의 단맛에 주저앉더니 일어설 줄 모르는 앉은뱅이가 되었단 말인가! 새역사 새세상을 바로 세우자며 동지의 꿈과 고난을 함께하던 자들이 초야에 스스로를 묻어버리고 초연한 생의 노래에 취해있단 말인가!”(광화문광장에서 2014년 9월 15일)

 지난 대선 때, 나의 아들과 시사토론이 있었다. 누가 당선될 것이며, 그 당락의 주변수는 무엇이 될 것인가 등, 자유스러운 의견 나눔이었다. 정치사회학을 전공한다는 내 아들은 “박이 될 것이라” 한다. 내가 아들에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왜 조용한 거야!” 하고 힐책하자, 하는 말이 “아빠 세대는 거리에서 시위하며 싸웠지만, 그런 눈으로 젊은이들을 보지 마라. 나도 금번 선거에 참여하지만, 우린 우리 나름대로 우리 할 일을 하고 있어!”하고 대꾸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시대는 갔구나. 너희(젊은 세대)가 해야 할 일까지 우리가 할 것은 아니지.’ 하고 맘먹은 적이 있다. 이런 것들이 나를 시골로 훌쩍 떠나게 하는데 일조하기도 했지만 서울이 평안해야 내 마음도 평안한 것은 사실이다.

   
▲ 방인성, 김홍술 두 목사님의 모습. 광화문에서 40여일 간의 단식을 마치고 회복기간 중 고흥 우리집에서 머물다 떠나시면서 찍은 사진. 얼굴에 윤기가 나고 밝게 보인다.
   
▲ 싱크대 위에 놓인 야채꽃? 두 분 목사님이 드실 죽에 들어갈 잘게 썰어놓은 야채들. 다양한 색상이 꽃같이 예쁘다.

얼마 전 우리 집에 두 분의 손님을 모셨다. 광화문에서 연대 단식을 40여 일간 하셨던 방인성 목사님과 김홍술 목사님이다. 단식 농성 중이었던 두 분의 목사님을 광화문에서 만나 초대했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두 분은 아직도 단식 후유증이 남아 있어, 밥은 못 드시고 죽으로 대신 하는 중이었다. 우리 집에서 제공한 자연산 음식물들을 두 분 목사님은 맛있게 잘 드셨다. 이것을 보며 나는 위로를 받았다. 시골에 묻혀 있지만 이곳에서도 내 할 일이 남아 있구나, 생각해 보았다.
방인성 목사는 광화문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단식농성장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초라한 곳이며 낮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낮고 배고픔의 자리에서 분명하게 보게 된 것은 돈의 노예가 된 야만성이었다. 우리의 경제구조가 얼마나 생명과 인권을 경시하는지를 세월호 가족들을 대하는 권력층과 일부 시민들의 태도를 보며 몸서리쳤다. 낮은 사람을 일으키어 함께 더불어 사는 새로운 경제구조를 세우지 않으면 평화는 없고 생명은 존중되지 못함을 깨달았다.”(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인연대 기고 글, “평화의 자리는 낮다”에서. 2014년 11월 25일)

   
▲ 눈 덮인 우리 동네. 두 분 목사님은 고흥에 하얀 눈을 가지고 오셨다. 해가 뜨면 녹아버리기에 새벽에 마당에 나가 찍었다.

오늘의 글 제목, “서울이 평안(平安)해야 고흥도 평안하다.” 이것은 내 마음의 표현이다. 서울은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처럼 불의의 집합체요 고통과 갈등의 집합체다. 최근 광화문 광장과 덕수궁 대한문 앞은 고통당하는 자의 신음 장소이다. 청와대가 지척에 있음에도 그 울부짖음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들을 수 있는 것은 “낮고  배고픔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고 직접 체험해 보는 자의 몫이다. 방 목사님은 이 일을 하셨다. 낮은 자의 자리로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는 서울 이든 고흥이든 지역을 넘어서서 인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새해에는 제발 서울이 평안해지기를 희망한다. 그래야 고흥에서도 덩달아 평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고흥군 남열해수욕장에서 맞은 새 해의 첫 해돋이. 지평선에 깔린 구름을 뚫고 금년 첫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밝은 태양과 함께 어둠을 몰아내는 새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 12회에 걸쳐 고흥에서의 귀촌 경험을 연재했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시골생활 3년간의 보고를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애독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박명철(전 연세대교수)  mcpark@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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