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은 ‘국내시장’으로 전락한 골동품적 역사를 통해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개인의 무능’과 ‘기억하지 않고 망각하는 전체의 무지’를 잘 보여준다. 아버지 세대에게 바치는 윤제균 감독의 헌사가 국제적이 아니라, 2014-5년 불통과 편견의 국내적이라 안타깝지만 ‘기억의 힘’과 ‘역사와 해석’에 관한 우리의 생각들을 다시금 돌이켜 보게 만든다.

1. 세 종류의 역사

일찍이 니체(F. W. Nietzsche)는 역사를 세 종류로 정리한 바 있다. 곧, 과거에 매달리는 ‘골동품적 역사’와 미래의 비전을 정치적으로 고취시키는 ‘기념비적 역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명을 사랑(Amor Fati)’하는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끌어안으려는 ‘비판적 역사’가 그것이다. 니체는 이 골동품적 역사를 비판하는데, 그것은 과거의 회상에만 매달려 지금 살아 있는 삶, 뛰는 심장과 흐르는 피, 대지와 자연과 맞서는 현재 거친 살결 속 주름의 의미를 가진 인간의 주체적 삶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에만 매달리면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추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는 그 유명한 선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그 의미를 온전히 회복한다. 곧, ‘기억의 뿌리’, 혹은 ‘회상의 원인’이 되는 저 초월적인 모든 것(가령, 이데아적인 것)의 죽음이 바로 신은 죽었다는 명제로 표현되는 것이다. 다음의 니체의 말대로 인간은 망각을 통해 실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뭔가 올바른 것, 건강한 것, 위대한 것, 뭔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는 어느 정도는 망각할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이 능력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원적인 능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망각을 부정한다면 삶 또한 소멸되고 만다. 이 망각의 힘에 의해서 비로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니체는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 곧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적인 인간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인간들이야말로 이 대지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갖추어야 한다. 망각한다는 것은 이미 없는 과거와 아직 없는 미래를 뜻하며, 사랑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삶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의 어머니는 어느 겨울날 추위에 떨고 있는 마르셀에게 따뜻한 차와 ‘마들렌’이라는 조그만 케이크 하나를 권한다. 마르셀은 마들렌 한 조각을 차에 담갔다가 차를 마셨는데,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매혹적인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차에 섞인 마들렌 부스러기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느꼈던 감각이, 어린 시절 아침 인사를 하러 레오니 숙모에게 갔을 때 숙모가 따뜻한 보리수꽃차에 마들렌 한 조각을 담가 준 일과 그 당시 콩브레(Combray; 소설의 공간적 배경)에서의 기억들을 연이어 떠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마르셀의 고백이다.

“이윽고, 침울했던 그 날 하루와 내일도 서글플 것이라는 예측으로 심란해있던 나는 기계적으로 마들렌 한 조각이 녹아들고 있던 차를 한 숟가락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던 그 한 모금의 차가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내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곤 소스라쳐 놀랐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 매혹적인 쾌감은 사랑이 작용할 때처럼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면서, 즉시 나를 인생의 변전 따위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었고, 인생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했으며, 인생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초라하고 우발적이며 죽어야만 할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회상을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라고 불렀다. 마르셀을 매혹적인 쾌감에 빠뜨린 것은 무엇일까? 프루스트는 그 답을 3,000쪽이나 되는 방대한 장편소설(7부작)로 제시하고 있다. 곧, 소설이 진행되면서 부단히 반복되는 이러한 회상들을 통해 마르셀은 결국 잃었던 정체성을 회복하고 허무에 빠졌던 자기 자신을 구하게 된다.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게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고 결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다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게 된다. 희망이 생긴 것이고, 결국 그의 삶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화 <국제시장>에서 윤제균 감독은 ‘의지적 기억’으로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를 오열에 빠지게 만들었는데, 그 답을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2시간 정도의 영상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망각과 기억 속에 인간 존재(와 사회정치)는 어떠한 위치를 점유해야 하는가?

1950년 12월 한국전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주인공 덕수네 가족은 1.4후퇴, 곧 ‘흥남철수’때 피란을 떠난다. 그리고 아버지와 막내 동생 막순이와 흥남부두에서 생이별을 한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현인의 노래와 같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 봤지만 아버지와 막순이를 찾을 수 없었다(첫 번째 기억).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일가친척 없는 몸이 국제시장 장사치기’가 되었다. 잡화점 ‘꽃분이네’를 운영하는 고모 일을 도우며 생활하게 된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을 때, 고향꿈도 그리워한다. 이후 선장이 되고 싶었지만 공부 잘하는 남동생의 서울대학교 입학금을 벌기 위해 파독 광부가 되고(두 번째 기억), 아버지가 꼭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삶의 터전인 잡화점 꽃분이네를 지키기 위해 대학입학을 포기하고, 기술 노동자로 베트남전에 참전한다(세 번째 기억).

1983년에는 막내 동생 막순이를 찾기 위해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출연하여 마침내 미국에 입양되었던 동생을 만나게 된다(네 번째 기억). 수많은 현대사 중에서 이 네 사건들을 선택(혹은 기억)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전략적이며 우리네 어르신들의 역사에 골동품처럼 각인된 것이다. 그 역사는 바로 이것이다.

한국전 당시 중공군이 참전하여 후퇴했고, 미군이 우리를 도왔다. 전쟁 후, 분단 생활에 살기 힘들어 서독에 광부로 돈 벌러 갔지만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결혼을 했고,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한국에 도움을 주었듯, 한국이 베트남에 베푼 호의로 병치되며 마침내 미국에 입양되었던 여동생은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현대사의 네 가지 기억을 통해 덕수의 고된 삶이 현실의 사건과 오버랩 되며 그려지고 있다. 

마지막 장면, 가족들이 모인 자리를 뒤로 하고 덕수는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 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라며 오열한다. 이런 덕수를 상상 속 아버지가 끌어안는다. “울지말라. 덕수야! 니 고생했는거 다 안다. 니한테 고맙다. 내 못한 것 니가 잘해줘서 고맙다”는 가족애로 결론을 맺는다. 가장의 책임감을 역사를 통해 불러온 것이다.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지극히 ‘가족적인 운명애’를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험한 일들을 우리 자식들이 아니고, 우리가 겪어서 다행”이라고 한다.

기억으로 불러온 과거의 덕수는 이렇다. 그리고 그 기억 속 덕수는 우리네 아버지의 표상이 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덕수는 어떤가? 세상, 혹은 사람들과 불화하는 인물이다. 해외여행을 떠나며 손주들을 맡기고 떠나는 자식들에게 “우리도 여행 좋아하는데”라고 투덜대며, 삶의 터전인 국제시장에서는 이웃 상인들과 싸우고, 집 밖에선 외국인 노동자를 박대하는 고등학생들을 혼낸다(이 역시 자신의 서독 광부 경험으로 인한 것이다). ‘나훈아냐, 남진이냐’에 베트남전 당시 자신을 구해준 남진이 최고라며 외치는 그의 모습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살아가는 한 노인의 고집으로 보일 뿐이다.

골동품적 역사의 험난한 발생사적 이면을 영화는 보여주었지만, ‘아모르 파티’는 발생사가 아닌, 지금 이 시간의 충실성을 문제 삼아야 한다. 현실에서 고집불통인 덕수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과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하지만, 따라서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자’는 간단한 주제로 연결이 되지만, 이러한 현실적 ‘아모르 파티’의 부재와 골동품적 역사의 찬미에는 함정이 있다. 곧, 가족을 지키고 아버지란 이름을 갖기까지 덕수는 근현대사 속에서 철저히 사회정치적인 선택과 의견을 표출하지 않고 단지 생존을 위해 살아간 것이다. 그에게 미래는 가족의 상봉이고, 과거는 아버지의 유언을 수행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없었던 주체의 부재, 아모르 파티가 없는 상징체계의 강화가 역으로 현실에서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는 것이다. 부부싸움 중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던 것처럼, 혹은 조갑제가 “영화 <국제시장>은 한국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영화”라고 극찬했던 것처럼...

4. 기억의 날

이스라엘은 430년간 제국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하나님의 인도로 해방되었다. 출애굽기 12장은 유월절의 유래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나오는 장면을 잘 묘사해 준다. 그리고 애굽을 벗어나는 그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 ‘여호와의 밤’이라고 부르며 기억하자고 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하였으며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효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출애굽기 12:37-42).

인간에게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 준다. 프루스트처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며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들지만, 역으로 현실 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기도 한다.

<국제시장>이 ‘여호와의 밤’이 아니라, ‘제국 미군의 밤’을 외칠 때, 성서는 침묵한다. <국제시장>이 골동품적 역사를 들려줄 때, 우리의 삶은 아모르 파티를 멈춘다. <국제시장>이 조갑제의 극찬과 같이 국내용으로 머물 때, 우리의 삶은 비극으로 다시 돌아오는 역사의 순환에 또다시 고난을 맛보아야 한다.

다시 니체로 돌아가 보자. 니체는 골동품적 역사의 철저한 망각만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 삶을 위해, 지상의 삶을 사랑하기 위한 기억만은 인정하고 있다. 과거도 미래도 삶의 시간은 아니다. 현재, 지금 내가 대지를 디디고 선 순간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아버지 세대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기억하며 2014년의 냉혹한 현실과 2015년의 혹독할 현실을 ‘기억하지 않고 망각하는 전체의 무지’에 빠져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국내시장으로 전락한 골동품적 역사를 통해 ‘망각하지 않고 기억해내는 개인의 무능’을 그 역사적인 맥락 없이 비판하는 오류도 범해선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 <국제시장>은 기억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마들렌 한 조각이 담긴 차 한 잔이 없어도...

최병학 목사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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