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먼저 <에큐메니안> 편집진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미 현역에서 퇴임한지 10년이 가까웠는데, 새롭게 필자의 자세를 가다듬고 역사와 곧추 대면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에큐메니안>에 「함석헌·장준하 그리고 박정희」라는 주제의 글을 싣게 된데는 우선 편집위의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만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죄악의 한국현대사」에 울면서 살아가고 있는 필자 스스로를 위로하고, 아슬한 이 땅의 민주주의 회복, 그리고 인민(국민이 아닌)의 역사주체의식(歷史主体意識)의 고양의 희구(希求)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오늘의 현상을 사람세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의 모든 쓰레기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은 이 나라꼴, 내 살림꼴, 죽기를 각오하고 재생해내야 하는 책임감 같은 것을 아니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현대사가 이렇듯 처절하게, 추하게, 그 정화마저 불가능하도록 엉망진창이 돼버린 원론적인 책임은 박정희의 5.16군사반란에 있습니다. 정치적인, 경제적인, 사회적인, 문화적인 모든 패악의 근원이 5.16군사반란의 주범 박정희요. 또 하나의 주범이 「한국교회」입니다.

박정희 군사쿠데타를 반역사, 반민주, 반인민(국민이 아닌)의 적으로 규정해야 하는 한, 「한국교회」 또한 그 같은 역사적 정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통치(?) 기간에 한 민족, 민중들에게 하나님의 큰 지배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군(軍)에 맞선 민(民)의 사람, 민중(民衆)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함석헌(咸錫憲)과 장준하(張俊河), 두 선각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민주주의는 종교다

민주주의는 종교입니다. 아닙니다. 민주주의야말로 종교입니다. 종교에 큰 종교, 작은 종교, 우리 종교, 너의 종교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굳이 큰 종교, 참 종교를 말하라 한다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야말로 궁극적 실재를 절대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절대전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어떤 경우라도 절대적 의지에 의해 진행됩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하나님께서 손수 이끌어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크고 작은 일들을 손수 행해가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위임합니까? 이전에는 왕이라, 군(軍)이라 하는 것, 영웅호걸이라는 것, 조금 더 나은 경우 ‘성인(聖人)’등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죄의 시대를 살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위임하는 대상은 그런 따위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 교수요, 목사요, 신부요, 승려요 하는 이들입니까? 역시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그 위대한 역사(役事)를 위임 받은 이들이 따로 있습니다.

‘민(民)“, 민중이 바로 그 피 위임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것입니다. 해서, 그 민(民), 그 민중(民衆)을 섬기는 것이야 말로 종교 중에서도 종교라 하는 것입니다.

한문학자들 중 특별히 어원을 설명하는 말을 들으면, ‘民’자는 ‘母’자에 한 획을 더한 것으로 변형되어온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母’자의 뜻은 어미라는 뜻이 아니고 그저 사람, 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저 그렇게 있는 사람, 첨 그대로 있는 사람, 특히 누구에게 기댈 줄도 모르고 누가 기대는 것을 버틸 수는 더욱 없는 사람입니다.

“한문자에 사람을 표시하는 글자가 ‘인(人), 민(民), 민중(民衆)’, 여럿 있습니다. 우선 인(人)입니다. 그것은 본래는 , 이런 모양으로 썼는데, 사람이 일어선 것(일어서려는 것, 필자주)을 왼편에서 보고 그린 것입니다. 바른 편에서 본 것은 , 이렇게 썼습니다.”

대(大)자는 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땅 위에 어엿이 서있는 모습입니다. 이 사람 인(人)자의 어원, 어형의 해설이 주는 기본적 의미는 사람(人)이란 눌리거나 밟혀서는 살 수 없는 생물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다’하는, 그래서 기어이 일어나 꼿꼿이 서야만 하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태초의 이 인(人)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었습니다. 한 곳에 웅거(雄據) 하면서도 공존이라는 의식엔 이르지 못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왕(王)이요, 군(君)이요, 따라서 신(臣)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내가 ‘나대로’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왕이란 그야말로 괴물이었습니다. 왕(王)이란 셋을 하나로 꿴 것인데, 그 셋이란 하늘(天), 땅(地), 사람(人)을 의미합니다. 天地人 3덕(德)을 다 지녔다는 것입니다. 해서 왕은 괴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군(君) 역시 괴물 자리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임금 군(君)과 아비 부(父)는 같이, 같은 의미로 썼습니다. 그 본래의 생김새는 과 이 엮어져서 , 이러했습니다. 은 손이고, 은 몽둥이입니다. , 이것은 몽둥이를 치켜든 손, 곧 폭력의 지배입니다. 이 힘으로 통치의 수단을 삼은 자들을 향해 ‘나는 나다’, ‘나는 나야’하는 인(人)이 연대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민(民)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들입니다. 모두가 그저 ‘나’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문자로 나타난 최초의 민(民)자는 , 이렇게 썼습니다. 여(女)자에 젖통을 표시하는 두 점을 찍어서 젖을 먹이는 여자, 곧 어머니란 뜻을 표시한 것이 모(母)자고, 거기 한 획을 그어서 거기서 나왔다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민(民)자의 원형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민(民)은 언제 어느 때도 사람의 아들입니다. 사람인 것을 선언하고 그 사람의 자리를 지켜내기에 피흘리는 자리까지도 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의(폭력)의 악용 또한 더해갑니다. 여기서 역사는 한 차원의 진화를 이룹니다. 「민(民)의 연대」 말입니다. 그것이 민중(民衆)입니다. 사람의 자리를 지켜내기에 죽음까지도 말없이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사람의 자리를 지켜냄으로써만 새역사 구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오로지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 눈을 부릅뜨고 함석헌과 장준하를 배워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저들이 죽기로, 혹은 죽을 때까지, 민을 찾을 때까지 찾았고, 품었고, 믿고 지켜낸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를 유일한 종교로 끌어올린 사람들! 그래서 저들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맨몸으로, 혼만으로 온몸을 내대어 민중을 지키며 민중으로 살아서 간 사람들! 우리가 그들을 배우는 것은 이 죄된 역사 속에 다시금 그들을 불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를 <에큐메니안>에 연재하겠다고 맘먹던 처음엔 두려움까지는 아니었다 해도 상당한 걱정이 없지 않았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에큐메니안>들의 실력을 제가 알고 있고, 또한 저의 변변치 못한 실력이며, 문필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들어가는 말」을 시작하고는 그런 걱정은 깡그리 접기로 했습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반편의 제 마음은 스스로 크나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독재자, 폭력적 지배자의 탄압이 온다고 해도 민을 주로(民主) 섬기는 에큐메니안 형제와 자매들을 끊임없이 만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데서 그렇습니다.

아무쪼록 <에큐메니안>을 통해 전해지는 필자의 「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를 통해 우리도 함석헌 같이, 우리도 장준하 같이 민(民)을 주(主)로 섬기는 감격을 엮는 그런 역사(役事)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귀한 기회, 지면을 제공해 주신 편집위원들,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본 주제의 연재를 위해 수고해 주실 기자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내내 함께하시기를 빌며, 「들어가는 말」을 닫습니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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