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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4.19<이해학의 4.19 참여기>
이해학 목사(주민교회 원로목사) | 승인 2015.01.07 15:58

   
 
4.19혁명 55년째 해에 부상자 등록을 신청한 이유.

419혁명 발발 55년을 바라보면서 나는 지난해 12월 15일 새삼스럽게 4.19 부상자 신청을 수원보훈지청에 냈다. 그리고 26일에 보훈심사위원회에 4.19혁명 사상자심의를 의뢰하였다는 통지를 핸드폰 문자로 받았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의아해 할 것이다.
깨진 이마를 민주혁명의 흔적이라고 농담같이 흘리고 다닐 때 주변의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이발소에 가면 이발사들이 자주 “큰 사고를 당하셨나요?”하고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나는 “예, 나라 도둑놈들하고 박치기하였습니다.” 라고 아리송한 대답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청년 대학생들이 물어올 때면 진지하게 4.19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4.19부상자 모임에 등 돌리고 살아온 내가 뒤늦게 굳이 국가기관에서 인정받으려 한 이유가 무엇인가?
살아오면서 ‘4.19는 참으로 백성이 하늘임을 드러낸 사건’이었고 내가 거기에 동참하였다는 사실이 내 인생의 큰 축복이었으며 격동하는 한국의 역사의 주인으로 참여하였다는 의식이 선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부상당한 나를 초진하였던 의사가 나에게 “산 것이 기적”이라 고 한 말이 내 인새의 위기의 순간마다 내가 4.19 참여자라는 역사적 의식과 사명감을 일깨워주어서였다. 의사의 말처럼 인체에서 가장 강한 뼈인 앞머리의 뼈가 경찰 개머리판에 부서져 네 조각이 났고 그것들이 큰골을 눌렀는데 살아난 나 자신을 나는 하늘의 은혜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내가 당한 부상이 작은 것이 아니었으며 그런 위험한 상태에서 살아났다는 기적 같은 일을 세상에 알리며 4.19 증언자로서 기록을 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 동안 가난 속에서 힘들게 살며 모든 세월 보내고 난 지금에서 왜 신청하느냐고 물어온다. 나는 왜 내가 부상자회에 등을 돌리고 등록을 하지 않았으며 왜 등록에서 누락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전에 나는 내가 참여한 4.19에 대하여 증언해야 한다.

나와 4.19

1960년 나는 광주공업고등학교 2학년 시절 광주 지산동 딸기밭 동네에서 자취를 하면서 경향신문 배달을 하였다. 당시 어떤 구독자들은 이삼백 미터 이상 마중을 나와 신문을 기다리곤 하였다. 경향신문이 이승만정권의 독재에 도전하는 기사들을 많이 써서 휴간과 폐간을 반복하던 때였다.

종신집권을 획책하고 있는 이승만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자유당 정권은 썩을 데로 썩었고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저지른 갖은 만행은 가공스러웠다.

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반감을 확인한 자유당 정권은 순리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60년 대통령선거를 처음부터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다. 5월중에 실시해야 할 정부통령선거를 민주당 후보 조병옥박사가 신병 차 미국에 간 사이에 2개월이나 앞당겨 3월15일에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3.15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유권자 중에는 막걸리와 고무신을 안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투표장에는 자유당 완장부대를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고도 3인조가 동시에 들어가서 감시공개투표를 시키는가하면 옆 투표소와 내통하도록 하였다. 야당참관인을 강제 축출하고 투표함 바꿔치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개표시 반대표는 <빈대표>를 만들어 무효화 하였다. 득표수의 조작까지 무법천지 힘의 횡포가 극성을 부리던 암흑의 세상에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때 “못 살겠다 갈아보자” 란 구호가 온 국민들에게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더 크게 불을 지른 것은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의 사본을 공개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급기야 조병옥박사가 미국에서 급사하고 3월 17일 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어 이승만의 4선은 확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반감은 거세져서 2월부터 시작된 저항운동이 산발적으로 전국으로 들불같이 번지고 있었다.

그 무렵 어떤 학생은 극장 변사 흉내를 내며 6.25당시 이승만대통령 혼자 대전으로 피신하고 한강다리를 끊어버려 무수한 국민을 몰살시킨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연기를 해서 학생들 사이에 반정부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신문을 접하기에 지나간 부산파동이나 정치깡패인 “백골단”이나 “민족자결단”의 행패가 국회의원들을 협박하고 사실상 국회를 마비시켜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학생들 사이에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4.19 전 국민항거로 폭발하다.

4월 11일, 마산에서 터진 3.15부정선거 규탄 데모 중 최류탄에 희생되어 경찰이 수장시킨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 떠오르자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저항의 도화선에 불이 붙어 4.19혁명의 시위가 전국에서 폭발되었다. 당국에서는 학생들의 가방에서 이북을 찬양하는 삐라가 나왔다고 선전하며 시위를 억압하려고 하였으나 저항의 봇물은 터지고 말았다.

우리 광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문 앞에 모이자 선생들이 막아섰지만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교문을 뛰어넘어 시작하여 서석초등학교 네거리에서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학생들과 만났다.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광주여자고등학교 여학생들에게 나오라고 소리칠 때 경찰 간부가 손확성기로 우리 학생들에게 이성을 찾으라고 설득을 하였으나 누군가가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하자 줄행랑을 쳤다. 우리들이 광주여고의 판자로 된 담을 밀어 제치자 여고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도청 앞에는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였는데 소방차가 물대포를 쏘고 있었다.

누군가가 “경찰서로 가자!” 소리를 지르자 우르르 몰려 경찰서 쪽을 향하였다. 내 앞에 분명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경찰서 쪽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경찰이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줄 알고 피하려고 하였으나 내 앞에 있었던 학생들이 다 도망가 버리고 내가 맨 선두가 되어있었다. 나는 옆으로 빠지려 하다가 뒤에서 미는 힘 때문에 오히려 앞으로 밀려나갔다. 다급한 경찰들이 총을 거꾸로 들고 돌리는 순간 나는 머리에 “팍” 하는 충격으로 눈앞에 새까만 막이 닫혔다. 마치 카메라 셔터가 닫치듯, 더 정확하게는 옛날 티브이 꺼질 때 가운데 하얀 점하나 남다가 꺼지는 순간 “아! 내가 죽는 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깨어났을 때 의사는 4시간이 지났다고 하였다. 옆에 환자들이 여럿이 있었다. 병원에서 깨어나니 의사가 내 인적사항을 물어 이해학, 18세, 광주공고라고 알려 주었다. 의사는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 인체에서 가장 강한 뼈가 이마 뼈인데 4조각으로 부서져서 큰골을 누르고 있어 바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반신불수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미리 와있던 경찰형사는 내게 “대학생 누구와 모의 했느냐?”고 다그쳤고 없다고 대답을 하자 “그러면 빨갱이와 손잡았다”고 몰아붙였다. 나는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린다는 두려움을 견딜 수 없어서 형사가 취조하다가 화장실 간 사이에 병원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쳐 서방면에 있는 자취방으로 도망하였다. 그리고 근처에서 자취하는 전남대 의대생이 불러 준 간호사에게 드레싱 받으며 치료를 하였다. 그리고는 붕대를 감은 채 마이싱 몇 알을 타가지고 어머니가 계시는 남원으로 돌아왔다.

4.26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하고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죽은 사람 추모와 부상자 돕기 모금 행사 등으로 호의적인 사회적 분위기여서 남원에서 광주 학교로 돌아왔다. 5월 어느 날 교정에 전교생을 모여 놓고 부상자 치하행사를 거행하였다. 전남여고 생들이 와서 위로금 선물 전달해준 기억과 그때 받은 문학전집 선물도 기억에 남는다.
5월 경(?) 전남일보(?)에 신문배달 부상자로 특별 인터뷰 한 기사가 사진까지 실렸다. (아직 못 찼고 있음)

   
 
4.19 이후 사건들 부상자 명단에서 빠지게 된 경위

고조된 4.19 분위기에서 나는 같은 광주공고 전기과(?)1년 선배 부상자인 박00과 부상자동지회가 만들어진 사무실에 다녔다. 어느 날 부상자회회장인 차00이 몇 사람을 데리고 광주시 도청 앞에 있는 당시로서 유일한 호텔(?)방에 우리를 대기시키고 자기는 부정축재자처벌 심사위원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 나타나 돈다발을 몇 개씩 허리춤에서 꺼내놓고 또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 하였다. 그리고 다른 친구를 시켜서 여자를 사오라고 하고 하루 밤에 여자 둘을 끼고 잔 것을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격노하였다. 내 양심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 이었다. 4.19정신으로 부정축재자를 색출하라고 들어가서 자기 치부를 위해 뇌물을 받는 불의는 용납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4.19부상자로 등록이 된 것은 고환을 다쳐 성불구가 되었다하여 부상자가 되고 그로인해 회장까지 된 사람이 여자를 둘씩 끼고 잔다는 것은 당시의 나의 젊은 의분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를 폭로하여 4.19 전체를 먹칠할 수도 없어 내가 발길을 끊기로 각오하고 다시는 부상자회 사무실 근처도 가지 않았고 넘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음에 다시 부상자 등록을 할 때에 내가 자연스럽게 부상자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4.19 의미

나는 4.19혁명 대열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충분하였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를 드렸다. 나는 남원친구 김주열처럼 죽을 번했으나 살아남았다. 그래서 해마다 4.19묘지 김주열 묘 앞에 가서 다짐하며 살아 난 내 인생의 의미를 물으며 깨달았으며 살아왔다. 하늘이 나를 살려준 이유는 미완된 민주화와 민족통일에 남은 생애를 바치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4.19가 나에게 좌표를 부여하였기에 방황할 새 없이 살아왔다. 4.19는 나에게 넘치는 축복의 계기였다.
그래서 나는 평생을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일본식민지청산운동, 인권운동, 외국인노동자 권리 찾기 운동을 하였다.
지역사회 대안운동으로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주민신용협동조합, 주민생활협동조합을 창립하여 오늘 성남지역사회에서 생명운동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고 본다.

내가 뒤늦게 4.19 부상자 신청을 하는데 같은 부상자 출신 선배는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했다는 말은 불이익을 줄 수 있으니 안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이것이 오늘 4.19단체의 현주소이다. 나는 생각한다. 4.19가 민주화를 빼고 통일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4.19가 될 수 있는가? 내가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누가 뭐래도 나의 이마에 함몰된 흔적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책상 위에 뉘여 놓고 내 이마 위에 계란을 세워보며 콜럼버스보다 더 완벽하게 계란을 세우는 놈이라고 놀려 댔는데 그들이 나의 증인들이다.

나는 비오는 날이면 자동적으로 오는 통증과 손 떨림으로 우울한 생애를 살았다. 그렇지만 내가 참여한 419는 영원한 민족의 정기가 표출된 혁명이다.

이해학 목사(주민교회 원로목사)  hebulg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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