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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인(天下無人)<김명수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5.01.08 16:5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27.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28.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눅10:25-28; 새번역)
 
And a lawyer stood up and put Him to the test, saying, "Teach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26.And He said 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does it read to you?" 27.And he answered,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28.And He said to him, "You have answered correctly; DO THIS AND YOU WILL LIVE."(Luke10:25-28; NASB)
 

새해를 맞아 어느 언론기관에서 실시한 특별 여론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한국사회가 앞으로 어떤 사회가 되길 바라느냐?’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빈부격차가 적고 사회보장이 잘돼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는 의견이 1위를 차지했고요, ‘힘없는 사람들도 평등하게 보호받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는 의견이 2위였어요. 경제가 성장하여 풍요로운 사회가 되길 바란다는 의견은 3위에 그쳤습니다. 사회를 보는 시민들의 인식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징후로 읽힙니다. 경제전문가 10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86%가 지금‘우리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었어요.

경제 성장을 하려면 법인세를 비롯하여 부자들 세금 깎아주어 그들이 활발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일단 파이를 키워놓은 다음에 분배를 생각해야하고, 경제성장 다음에 경제민주화를 말해도 늦지 않다. 그 때까지 국민들은 세금을 올려도 참고 감내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과 현 정권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러한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에 대한 환상이 더 이상 국민 대다수에게 호소력이 없음을 금 번 여론조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론조사의 결과는 또한 사회 양극화, 청년실업의 증가, 비정규직 6백만 시대, 외국인 노동자 4백만 시대, 금 번 땅콩회항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갑의 횡포가 사회 전반에 걸쳐 내면화되어 있는 부정과 불의와 비리로 얼룩진 한국사회 전반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경제성장 타령은 박정희씨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듬해인 1962년부터 시작되었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이지요. 저는 55년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어요, 그래서인지 성장이데올로기는 저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내면화되어 있어요.

우리사회는 국민 1인당 연소득이 3만불 시대에 접어들었다고들 합니다. 경제 규모면에서 세계 10위권에 들어간다고 해요. 맞습니다. 파이는 엄청 커졌지요. 헌데도 현 정권의 새해 경제정책은 어떤가요? 경제안정과 경제성장입니다. 커진 파이를 나눌 생각은 뒤로 하고, 새해에도 계속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정책입니다. 커진 파이를 누가 독식하고 있나요? 1%의 특권계층입니다. 겨에성장의 주체인 국민의 99%는 파이의 분배로부터 배제되어 있어요. 저는 경제전문가는 아니지만요, 이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구조화가 앞으로 한국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지요.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이 예견하고 있어요. 앞으로 불평등이 선진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합니다. 빈부격차, 실업·고용 불안정, 집단·세대 간 갈등, 사회적 양극화는 점점 심화되고 있어요. 헌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밑바탕이 되는 민주주의는 오히려 퇴행退行하고 있어요. 지금 절개다수의 지식인들이 느끼고 있는 한국사회의 위기의식은 결코 우연이 아니지요. 

금 번 여론조사에 따르면, 10년 전에는 국민들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통령상 像을 선호했는데요, 지금은 민주적 의사결정을 중요시하는 대통령상像을 선호한다고 해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선호도가 절반으로 떨어지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선호도가 뛰어올랐어요.

새해를 맞이하여 정치지도자들은 이러한 시민사회의 인식 변화와 민심의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이에 합당한 정책을 펼쳐나가야 국민의 마음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요. 지금까지 평생 동안 한국 개신교의 변두리에서 하나님의 발길에 이리저리 채어 살아왔고요.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삼위일체 교리(trinity doctrine)나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에서 찾지 않습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런 입장에 서서 신학과 신앙의 길을 걸어왔어요. 어떤 형식으로든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의해 지지支持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이와 동떨어진 일체의 기독교교리는 공허空虛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기원후 1세기 중엽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여 갈릴리와 시리아 농촌지역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벌였던 초기그리스도교 종파 가운데 큐교회공동체(Q church community)가 있었는데요. 이들은 예수를 믿는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동질성identity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그를 따라 사는데서 찾았어요. 큐(Q)교회는 예루살렘교회나 바울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회중 중심의 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아니었어요.

큐(Q)교회는 농촌에서 마을 단위로 선교를 했고요. 혈연血緣이나 지연地緣에 매이지 않고 무소유를 실천하며 ‘예수 따라 살기 운동’을 펼쳤던 공동체입니다. 큐교회 신도들은 구전(oral tradition)으로 내려오던 예수말씀을 수집하여 책으로 펴냈는데요. 그것을 큐복음(Q-Gospel)이라 부르지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는 그들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큐(Q)복음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 주옥같은 예수말씀 240절 정도를 삽입했어요. 분량 면에서 보면 마가복음의 1/3에 해당됩니다. 만약 큐(Q)가 전해주는 예수말씀을 빼고 복음서를 읽는다면, 우리는 양과 질에 있어서 극히 한정된 예수말씀만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도 원래 큐(Q)복음에 속해있었던 것인데요. 누가복음 저자가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삽입했어요. 이 말씀은 내용이 약간 수정되어있기는 하지만, 마태복음(22:34-40)과 마가복음(12:28-34)에서도 동시에 나오고 있어요. 제가 보기엔 이 말씀에는 3년에 걸친 예수 공생애public life of Jesus와 가르친 말씀들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어떤 율법선생이 예수께 와서 묻지요.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영생 얻는 방법에 대해 물었어요.‘영생’은 그리스어 ‘조에 아이오니오스(zoe aionios)’의 번역인데요. 시간적으로 죽지 않고 산다는 양적量的인 개념이 아니고요. 하루를 살든 천년을 살든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질적質的인 개념이지요. 요즘 말로 바꾸면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서 물은 것 같아요.

예수께서 그에게 되묻지요.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이느냐?”유대인들은 매일 율법을 암송하는 습관이 있는데요. 그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으신 것이지요. 율법선생이 대답했어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우리말 성경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두 문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요. 헌데, 그리스어 원문에는 한 문장으로 되어 있어요. ‘사랑하라’는 ‘아가페세이스(agapeseis)’가 한번 만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에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선후先後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적同時的인 사태라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전혀 질적質的 차이를 두지 않고 있어요. 

십계명 1-4계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경신敬神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것이지요(신6:7-9). 반면에 십계명 5-10계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애인愛人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지요(레19:18). 이 율법선생의 대답 속에 십계명의 전체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지요. 아마 그런 뜻에서 마태복음은 “이 계명 안에 모든 율법과 예언이 들어 있다”(마22:40)고 했을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모든 율법과 예언사상은 경신애인敬神愛人으로 모아집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 한 마디에 구약성서는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는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고 전심전력을 다하라는 말이지요.

예수는 하나님과 이웃을 따로 나누어 보지 않았어요.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이웃사랑을 보았고, 이웃사랑 안에서 하나님 사랑을 보았어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관계로 보았던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본문에 나오는 ‘이웃’(레아; 플루시온)을 ‘씨알’로 번역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함석헌에 따르면 씨알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어있어요. “하나님과 씨알은 한 실오리의 두 끝과 같다. 위에서는 하나님이요, 아래서는 씨알이다. 씨알 중에서도 참 씨알이 예수였다.”(전집14, 91) 함석헌과 함께 만약 한 대롱의 두 끝을 하나님과 씨알로 본다면, 우리는 씨알에서 하나님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요? 씨알 정신에서 하나님의 정신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가 참 씨알이라면, 참 씨알 예수에게서 우리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예수의 양성론兩性論 교리(451년 칼케톤공의회)는 이러한 씨알사상의 이해지평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은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 시대라고 해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 능력 있다고 인정받는 사회이지요. 운전하면서 동시에 TV 보고 문자 날리는 사람들, 설교를 들으면서 생각은 어제 산 주식 시세에 가 있는 사람, 강의에 앉아 있으면서 여자 친구와 무슨 영화 볼까 생각하고 있는 사람, 화장실이나 찜질방에 신문 들고 들어가는 사람, 이런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들은 제가 보기엔 집중력이 떨어지고 한 가지 일에 성공할 확률이 그리 높지 않아요.

밥 먹을 때는 밥 먹는데 생각이 가 있어야 해요. 공부할 때는 공부에 생각이 가 있어야 하고, 일할 때는 일에 생각이 모아져야 합니다. 몸과 생각은 늘 같이 있어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요. 몸과 마음을 따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는 심신일여心身一如의 수련이 모든 명상수행의 기초이지요. 그런데 밥 먹으면서 생각은 화장실에 가 있고,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서 밥상에 생각이 가 있다면, 이와 같이 몸과 생각이 따로 노는 것을 무어라고 하나요? 유체이탈(遺體離脫; Out-of-Body Experience) 증상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고개를 숙여야 할 자리에서 아랫것들을 꾸짖는다든지, 자기가 직접 다짐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다그치고, 자신이 먼저 나서야 할 자리에서 남의 등을 떠미는 것이 전형적인 유체이탈자의 행태이지요.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이러한 유체이탈의 모습을 보인다면 결코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선생의 말을 듣고, 예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나요?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예수는 그의 대답을 일단 긍정합니다. 제대로 알고 있다는 말이에요. 헌데, 예수는 이어서 무어라고 말씀하나요? “그대로 행하여라.”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베이컨(F.Bacon)은 말했으나, 예수는 아는 것의 행함을 강조합니다. 아는 것을 실천에 옮겨야 산다고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지식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실천으로 검증된 지식이라야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사회를 구한다는 말이지요. 믿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검증되지 않은 믿음은 무기력하지요. 생명력이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일 뿐이다”(약2:17). 이러한 야고보서의 말씀도 큐(Q)의 위 본문과 서로 통하지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말씀(레19:18)에서 ‘이웃’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아(reah)’를 유대인들은 원래 동족同族에 한정시켰어요.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을 이웃에서 제외시켰습니다.  헌데, “누가 내 이웃입니까?”율법선생의 물음에 예수는 사마리아인의 행태를 들어 설명했어요(눅10:29-35). 결코 유대인의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인데도 말이에요.

   
 
강도만난 유대사람의 ‘이웃’은 누구인가요? 그를 외면했던 동족인 유대인 제사장이나 레위사람인가요? 그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그냥 지나쳤어요.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자 가던 길을 멈추었어요.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혼신을 다해 그를 보살폈어요. 강도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은 누구인가요? 동족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다! 예수는 이웃을 새롭게 정의했어요. 이웃은 혈연이나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응답하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을 얼마나 자기화(自己化)시키는가에 의해서 판가름 난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사람됨은 본질(what)이 아니라 행동(how)에 의해서 결판나는 사태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는 예수의 소중한 가르침을 전하는데요. 물론 큐(Q)복음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5:20) ‘의’로 번역된 ‘디카이오쉬네(dikaiosyne)’는 히브리어 ‘미슈파트(mishpat:공법)’ 또는 ‘체다카(tsedaqah:공의)’에서 유래하는데요. 법의 공정(公正)함과 분배의 공평(公平)함에 근거한 사회정의social Justice 실현을 나타내는 개념이지요. 바리새파의 ‘디카이오쉬네’가 율법 개별항목을 충실히 준수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디카이오쉬네’는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뜻하지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러한‘보다 나은 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공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묵자墨子가 있어요. 그는 ‘천하무인(天下無人)’을 말했어요. ‘세상에 남이란 없다’고 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내 살붙이임을 알고 살라는 권면이지요. ‘이웃 보기를 네 몸처럼 하라(視人其身)’는 것이 그의 윤리철학이었어요. 이웃사랑이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라는 뜻에서 천지애인(天之愛人)을 말하기도 했어요. ‘하나님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는 예수 가르침의  동양적 버전(version)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은 어떤가요? 이웃을 타자화(他者化)시키는 사회구조이지요. 한국사회의 모든 갈등과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관계 속에서 이웃과 사회를 보아야 합니다. 관계 속에서 세계와 자연을 보아야 합니다. 나를 이 한 몸뚱이로 국한시켜 않고, 이웃과 사회와 자연으로 확장시켜 나가야 해요. 그 속에서 ‘참 나’를 찾을 수 있어야 해요.

나와 이웃, 둘이 아닙니다. 인간과 자연, 둘이 아닙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도 둘이 아닙니다. 확장된 내 몸으로서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동일성self identity을 찾는 한 해가 되길 빕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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