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람이야기 사람과 교회 단신
잠이 모자라던 날 3<안상님의 살아온 이야기-1991.8.31>
안상님 | 승인 2015.01.22 14:35

이제는 정말 자야겠다. 이 잠은 일주일 내내 밀린 잠이다. 지난 주일 오후에 떠나서 기차로 목포에 가고 배타고 홍도에 갔었다. 목포 호텔에서는 더운데 냉방을 켜면 소리가 요란해서 잘 수 없고 하루 종일 열 받은 시멘트 덩어리 속에서 냉방 없이 통풍도 잘 안 되는 방에서 자려니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침 5시 반에 일어났고 또 홍도여행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남편이 사논 수요일 아침 기차표를 화요일 저녁 표로 바꾸려고 역에 갔었다. 홍도에서는 목포보다 시원했는데 이불 요가 모두 화학섬유라서 그 촉감이 싫어서 뒤척이고 관광지라 디스코택이며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초저녁에는 옥상에 자리 펴고 누워서 달 보고 별 보느라 좋았지만 잠을 잘 수는 없었다. 화요일 밤늦게 돌아왔으니 기차 여행이라 해도 피곤은 하다. 계속해서 배타고 차타고 기차 타고 다닌 여독을 풀 사이 없이 수요일 일직이 802호에 출근했고 오후에는 다음날 박순경대책위원회의 기도회 준비를 위한 대책회의였다. 이 바쁜 때에 박 교수는 구속되어서 어쩌다가 내가 대책위원장이 됐으니 생활 리듬이 엉망이 되는 것 같다. 이화대학교 대학원 때 내 지도교수였는데 그 연세에 구속을 당하셨다는 소식에 아무래도 내가 조급하게 서둘렀을 것이다. 그 와중에 2박3일 홍도 행을 빼내려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그야말로 남편에게 소홀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 때문에 남편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장할 권리가 있기에 나로서는 굉장히 무리한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행은 3년 전 약속을 내가 깨뜨렸기 때문에 금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남편의 입장을 세워주기 위해 양보한 것이다. 부부간의 인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또 여름 내내 서울에 꿀어 박혀 있었으니 좀 떠나 볼만도 하지만 하필 이때이냐?

3년 전에 3 목사부부가 홍도 여행을 계획했던 날 내가 손목을 부러뜨려서 기브츠를 하게 되었다. 그 여름에 아들이 왔고 우리는 아파트에서 한옥으로 이사를 해서 미국에 있던 아들은 이집에 처음으로 왔기 때문에 내 딴에는 꽤 신이 났던 모양이다. 부엌 싱크에서 물이 넘치는 것이 보이기에 얼른 가서 잠근다고 뛰어가는데 이미 바닥에 물이 흘러 있어 미끄러지면서 손을 헛짚어서 나동그라졌다. 거기에는 또 연유가 있다. 바로 그 전 해 그 때도 아들이 방학이 되어서 2년 만에 집에 온 때의 일이다. 8월 14일인가 파주여고 학생들이 여학생을 강간한 체육교사 해임과 이사진과 학교운영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40여일 싸우다가 140여명이 문교부에 항의하러 왔었다. 종합청사 뒤에서 하루 밤을 밖에서 농성하고 있으니 아침 6시에 여성단체 사람들 좀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어른들 좀 나오라는데 내가 가만히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학생들을 먹이려고 라면을 돌리고 있는데 전경들이 마구 들이닥쳐 여학생들을 마구 잡아끌어다 닭장(전경버스)에 밀어 넣는 바람에 나는 전경을 붙들고 실갱이를 하다 보니 나도 닭장에 실렸다. 그런데 내 엄지손가락이 직각으로 뚝 떨어진다. 별로 아프지는 않은데 바로 세워 노면 또 떨어지고 해서 이게 왜 이러나 했다. 파주여고까지 실려 갔는데 학생들만 내려놓고 우리 몇 사람은 내리지도 못하게 도로 태워다가 구파발 근처에 내려놓았다. 아들 성화에 못 이겨 병원에 가보니 그것은 인대가 끊어진 것으로 그냥 두면 엄지손이 굳어버려서 글씨를 쓸 수 없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전신마취까지 하고 엄지손 인대를 잇는 수술을 받고 기브스를 했었다. 그 이후로는 엄지손이 부실해서 힘을 못 쓰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넘어질 때도 엄지손이 제 역할을 못했거나 내가 쓰지를 않아서 팔목을 다친 셈이다. 그러다보니 아들은 자기만 오면 엄마가 기브스를 한다고. 맛있는 것 해준다고 오라고 오라고 해서 오니까 하나도 안 해준다고 장난 섞인 말로 나를 웃겼다. 그 때는 여신협 총무여서 기브스를 하고 사무실에 출근해서 왼손으로 글씨를 그리면서 일을 했다. 언젠가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그 때 썼던 일지를 떼어 놓은 것이 있어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의 큰딸이 뇌암 수술을 받고 오른 손의 신경이 미처 회복되지 않아서 왼 손으로 글씨를 그리던 생각을 하며 장애인은 얼마나 힘들까를 아파하던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잠을 자고 싶다는 투정을 하다가 어디까지 옆으로 새고 말았다. 3년 전 약속을 ‘89년에 지키려 했는데 그때는 세계개혁교회연맹 총회를 연세대학교에서 모이게 되었다. 장로교회로서는 한국에서 처음열리는 큰 행사였으니 자연스럽게 그 약속은 다음 해로 넘어갔다. 작년(’90) 여름에는 우리 아들이 군대 때문에 박사과정을 3개월 앞두고 8월에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다. 머리 깎기 전에 결혼하겠다고 해서 약혼식도 청첩장도 없이 한 달 안에 결혼을 했고 아들네가 집에 들어와서 살겠다니까 아들이 쓰던 방을 늘리느라 집수리를 하느라 공사 중에 결혼식을 하는 법석을 피웠다. 그러니 홍도여행은 또 밀린 것이다. 금년에는 더 밀어볼 수 없게 되었으니 그 기막힌 시간을 빼내려니 내 잠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원고는 밀어둘 수밖에 없다. 으슬으슬하니 감기기운이 있어서 아예 버파린 두 알을 먹고 겨울 이불을 꺼내 덥고 늘어지게 잠을 잤다.

왜 이렇게 잠도 모자라면서 뛰어다니나? 우리 딸이 엄마는 철도 없이 누가 나오라고 하면 허겁지겁 나간다고 놀려댄다. 내가 어린애처럼 뛰어다닌다고 할머니처럼 구르란다. 내가 왜 우리 집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여성들과 관련되는 일은 크고 작은 일 없이 쫓아다니나? 그날 하루와 연관된 일도 거의 다 여성들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윗세대의 여성운동이 전무한 셈이었으니 이중의 짐을 져야한다. 우리는 배우지 못한 것을 스스로 찾아서 길러내어 다음 세대에게 나은 것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우리는 이중의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여성의식이 생기고 여성신학을 하게 되면서 남자와 여자 다르다고 차별하지 않는 세상, 잘나고 못났다고 차별하지 않는 세상, 가지고 못 가졌다고 차별하지 않는 세상을 이루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이 고백 때문에 모든 사람이 소중하고 그 사람들이 사는 지구를, 자연을 창조질서대로 보존하는 일이 또한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 고백을 몸으로 살기 위해 오늘도 졸린 채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사느라고 애쓰는 것이다.

안상님  sangnima@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