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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고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그 많은 것들...<전순란의 휴천재일기-2015.1.24>
전순란 | 승인 2015.01.26 12:00

2015년 1월 24일 토요일, 맑음

간밤에 벽난로에 마지막으로 넣고 올라온 장작이 새벽 6시까지도 아직 타고 있다. 휴천재 벽난로 불목하니로서 내 솜씨가 제법 궤도에 오른 셈이다. 새벽같이 난로 밑으로 재를 털어내고 나무토막을 하나 새로 밀어 넣는다. 어젯밤에 넣은 장작은 내 다리통만한 것을 넣었는데 아직도 타고 있더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내 다리가 그렇게나 굵은가 의아해 하겠지만 60대 할머니들의 평균 체중 이하로 나가는 몸매이니 걱정을 접으셔도 된다.

문제는 이층에 올라와 아침기도를 바치면서 코가 개코인 보스코(오감 중에 그가 나보다 예민한 유일한 감각이 후각이다)가 하는 한 마디. “여보, 당신한테서 연기냄새가 나.” “그래서 어쩌라구?”(보스코는 단 한 번도 난로불을 지피거나 손질한 적 없다.) “아냐, 그냥 그렇다는 거야. 참나무 타는 냄새가 그리 나쁜 건 아냐." “... ..."

   
 
얼마 전 합천 가야산 비탈에 있는 정한길 선생댁에서 마룻방 한가운데에 난로가 훨훨 타고 있었는데 막내딸이 학교 다닐 적에는 피우지 못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엄마, 선생님이 내 옷에 코를 킁킁 대시면서 ‘너 담배 피우냐?’고 통박을 주셔.” 하더라나. 막내 고딩 3년을 기다렸다 금년 겨울에 다시 난로를 피우는 거란다. 지난 12월분 휴천재 (심야전기)난방비가 40만원 넘게 나와서 아찔한 일에 비하면, 아래층 13평짜리 식당에서 벽난로를 피우는데 한 달에 10만원 정도의 나뭇값이라면 불 지피고 재를 치우고 장작을 날라 오는 수고쯤은 해볼 만한 난방이다.

점심에는 지인이 멀리서 보내주신 굴로 무채를 썰어 넣고 굴밥을 했다. 싱싱한 자연산 굴을 회로도 먹고 달래장으로 비벼 먹는 굴밥은 겨울철의 호사다. 더구나 마당에서 키우고 다듬어서 보내주신 시금치로는 냉이를 섞어 심심한 된장국을 끓이고, 보내주신 굴깍두기까지 곁들이니 두 분의 정이 우리 밥상 가득 물씬 풍긴다.

   
 
곶감 손질을 하면서 감기까지 걸려 고생한다는 체칠리아-스.선생 부부를 보고 싶어 벽난로에 갓 구운 고구마와 과자를 싸들고 도정까지 올라갔다. 걷기 싫다고 꾀를 부리던 보스코도 날씨가 좋고 바람이 없어 별다른 불만 없이 따라나선다. 오르면서 기욱이 엄마도 보고 기욱이와 점순이의 안부를 묻고, 강영감 마누라와 시비도 한번 붙고("와 간댕이가 커져 남의 동네까지 오가노?" "당신 한번만 더 깐죽거리다간 큰코다쳐, 알간?"), 장작을 패서 한 길가에 쌓고 있던 노부부도 보고, 오토바이로 쌩하게 달리던 강수영씨의 인사도 받고, 남편을 급작스레 여읜 뒤 도정집으로 일손을 보러오는 미망인도 만나보는 산보길이었다.

내 두 다리로 성하게 도정 길을 오르고, 내 눈으로 지리산 하봉의 눈을 바라보고, 내 귀로 물소리와 새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스럽다. 그토록 건강하셨던 우리 큰외숙모님이 환갑에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나시면서 “내 두 다리로 땅을 밟고 딱 한번만 걸어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던 탄식이 떠오른다. 거구의 여장부였던 분이 30킬로도 채 못되는 체중으로, 다시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셨다. 건강도 오관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우리가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게 되다니...

   
 
   
 
스.선생댁 덕장에서는 양주가 곶감 작업에 정신이 없었다. 유황처리도 않고 말렸는데 1월초에 너무 날씨가 풀리고 비가 오면서 곰팡이가 피고 말아 금년에도 본전을 건지기 글렀단다. 스.선생님으로서는 곰팡이 자국 하나를 가위질 할 때마다, 곶감 관리 잘못해서 그렇다는, 부인 체칠리아 선생의 타박을 들어야 하는 신세여서, 여간한 고생이 아닐 게다. 곶감농사 7년차인데 여전히 밑진 장사라니 언제쯤이나 달인이 될까 모르겠다. 스.선생님은 곰팡이 핀 곶감을 한 자루나 내게 주면서 손질하여 먹을 수 있으면 먹으라고 선물했다.

   
 
오늘은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축일이니 살레시안들에게는 수호성인의 대축일이자 우리 작은 손주 시우의 영명축일이기도 하다. 도정에서 내려오다 축하전화를 걸었는데 시우가 자기 영명이 무엇인지도, 영명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게 분명하다. 작은아들 빵고신부는 공동체의 축하미사를 성대하게 드리고 나오다 엄마에게 축하 전화를 해 왔다.

지난 여름과 가을에 우리 텃밭에서 뽑거나 전지해서 쌓아두었던 풀 더미와 나뭇가지를 드디어 오늘 저녁나절에 보스코가 모조리 태웠다. 난로를 지피는 내 몸에서 연기내가 난다고 타박하던 보스코도 어지간히 연기 냄새를 풍겼다.

   
 
   
 
   
 
새벽 2시까지 스.선생님이 준  곶감에 핀 곰팡이를 잘라내는 가위질을 하다 손에 쥐가 나고 눈이 침침해져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나머지를 시원한 한데에 내놓고서 일기장을 편다.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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