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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따르라 부르는 신호 여덟 번째: 우박<정현진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⑪-1> 출애굽기 9장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 승인 2015.01.27 13:44

이번 <정현진 목사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열 한번째 순서는 분량상 두차례에 나눠서 싣습니다. - 편집자 주

이 부분은 이제까지 나온 표적을 다루는 이야기들보다 그 내용이 자세하다. 그 길이도 유월절에 관한 열한번째 표적의 기록 다음으로 가장 길다. 이 부분에는 ‘전체’를 가리키는 ‘’이란 낱말이 12번이나 쓰였다. 이는 하나님의 표적이 이스라엘 자손과 그 지역을 제외하고, 이집트의 왕실과 귀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신호탄일까? 우선 이 표적을 예고하시면서,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자신의 판단과 입장을 파라오에게 전달하게 하셨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이다(9:14-17):

진실로 이번만큼은 내가 나의 모든 재앙을 반드시 너(히: 네 마음 / 심장)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보내리니 이 모든 땅(이 모든 나라)에 온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출 9:14 직역).

재앙이란 말(막게파)이 출애굽기에서 여기에 처음이자 유일하게 나온다. 민수기에 9번, 역사서와 예언서에 몇 차례 나오는 이 말은 자연사나 사고가 아닌 죽음에 이르는 재앙(재난)을 가리킨다. 여기서 '모든 재앙'이 이번 것을 포함하여 앞서 나타난 일곱 가지 표적을 가리키는지, 그 후에 일어나는 것까지 포함하여 열한 가지 표적을 다 가리키는지, 아니면 지금 내려질 표적과 그에 따른 고통을 강조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 표적이 지향하는 첫 번째 대상은 파라오의 마음(레브 = 심장)이다. 이 낱말은 단순히 신체기관인 심장 또는 그것의 작용들 중에 하나인 마음(감정 등 마음의 상태)만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통일체로서의 한 인간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이런 뜻에서 여호와의 여덟 번째 표적은 한 인간인 파라오 전체, 곧 그의 심장(마음 상태, 심리적 불안감, 영적인 혼돈)과 몸 전체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심각한 증상이 될 것이다.

15-16절에는 여호와께서 파라오와 그 세력을 단숨에 물리치는(멸망시키는) 일 정도는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그리 하지 않는 이유를 밝혀준다. 15절은 ‘나는 ... 할 수 있다’ 라고 옮기거나 ‘나는 ... 하련다’로 옮길 수 있다. 앞엣것은 할 수 있음을(공개, 천주교 새번역 참조), 뒤엣것은 의도나 당위성을 나타낸다(개역개정, 표준새번역). 여기서는 뒤엣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Hamilton, Exodus, 150쪽). 출 2:16이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하여, 곧 내 힘을 네게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내 이름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려고 내가 너를 세웠노라(직역)

15절에서 파라오를 멸망시키지 않은 이유가 16절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곧 하나님께서 파라오를 이집트(온 땅)에 세운 것은 자신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세상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파라오가 아니라, 여호와가 역사와 세상의 대주재요, 우주만물의 주인이심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출 9:29 참조):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시 95:3)

17절에 교만이라 옮겨진 말(미스톨렐)은 '세우다, 높이다'는 말(살랄)에서 나왔다. 이는 파라오가 자신을 스스로 높이며 거만하게 군다고 옮길 수도 있고, 파라오가 자신을 내세워 이스라엘이 갈 길을 가로막는다(방해한다)로 할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17절을 칠십인역에 따라 롬 9:17에 인용하였다. 이집트 역사에 유례가 없는 거대한 우박을 준비하시며 (18, 24절), 하나님은 이에 대한 대비책을 일러주셨다:

이제 사람을 보내어 네 가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9:19).

이로써 하나님께서 15-16절에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졌다.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에 파라오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 우리는 모른다. 출 9:20-21절은 그의 신하들 중에 작지만 동요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살짝 언급할 뿐이다. 그들 가운데 몇몇이 모세를 통한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모세가 충고한 대로 따랐다. 그들은 지금까지 일어난 표적을 직접 경험하면서, 여호와의 권능을 다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나마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말(하야레)은 야레 동사의 분사형에 정관사가 붙은 것이다. 이 동사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첫째로 여호와를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의 가슴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경외심(창 22:12 참조)이다. 둘째로 어떤 사람이나 일이나 현상에 대한 두려움이다. 여기 나오는 두려워하는 자들은 미약하나마 여호와를 향한 두려움과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강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어지는 말씀을 심장(레브, 마음)에 두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종들과 가축을 들판에 그냥 있게 하였다(출 9:21). 말씀을 마음에 둔다는 표현은 신 11:18; 32:46; 삼상 9:20; 20:25; 욥 1:8; 학 1:5, 7; 2:15, 18[2x]) 등 여러 곳에 나온다. 이런 구절들에서 하나님 말씀을 허술하게 대하는 자와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 곧 하나님 뜻을 떨림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는 자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자는 자신의 태도에 걸맞게 서로 상반된 결과를 맞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라(들라) 하셨다(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손을 들게 하신 일은 11번이나 기록되었다). 표적을 일으키실 때, 하나님께서 모세 (또는 아론)의 손을 들게(뻗게) 하신 일을 출애굽기에 여러 차례 나온다. 여기에 쓰이는 동사는 주로 나타(hjn), 파라스 (vorp), 샬라흐 (xlv). 우리말 성경은 이것들이 '(손을) 펴다, 들다'로 옮겼다. 출애굽기에는 이 가운데 나타가 가장 많이 쓰였다(출 6:6; 7:5, 19; 8:5, 6; 8:17; 9:22, 23; 10:12, 13, 21, 22; 15:12). 파라스는 주로 기도드릴 때 손을 드는 모습을 나타내곤 한다. 이를테면 파라오의 부탁을 받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사용된 것이다(출 9:29, 33). 샬라흐가 이런 뜻으로 쓰인 것은 15절 여기뿐이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대로 손을 드는 것에 맞추어 하나님은 우박을 사람의 위에, 짐승의 위에, 그리고 들판의 모든 풀(곡초) 위에 내리게 하셨다. 내리셨다는 말(마타르)은 분사형(마므티르) 으로 되어, 이것이 잠시 동안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길게 지속되는 사안임을 나타낸다. 성경에서 우박은 하나님이 쓰시는 심판의 도구로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이것은 죄인과 악인을 심판하는 도구인 동시에(사 28:2, 17)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수단이었다(겔 38:22; 학 2:17).  아울러 하나님은 우박과 함께 소리(하나님의 음성? 천둥?)도 주셨으며 불(번개?)도 내리셨다(출 9:20-25).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엘리야에게처럼 조용이 속삭이는 분으로(왕상 19:12), 그리고 여기처럼 매우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분으로 나타나신다. 성경에서 소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권능과 계획을 전제로 한다(출 19:16:  20:18). 이를테면 사무엘이 하나님께 청하자, 하나님은 소리들(의미강화의 복수형?)을 보내셨다(삼상 12:15). 그리고 우레와 비도 함께 내리게 하셨다(삼하 12:17-18).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 분이 세례를 받으실 때(막 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변화산에서 변모되실 때(막 9:7 ...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행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등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요한계시록에는 들려오는 소리에 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온다(계 1:10; 21:3 등). 

하나님은 이 표적도 이스라엘 자손에 사는 고센지역에는 발생하지 않게 기적을 베푸셨다(9:26).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시 93:7)

   
 
사태가 이리 되자, 파라오는 기겁을 하였다. 그는 모세와 아론을 당장 불러 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직역: 내가 죄를 지었노라, 이번만큼은; deictic particle 렘 28:16 참조). 여태까지 그는 매우 당당하였고, 또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왕에겐 잘못이 없다’는 말이 있다. 아마 그는 자신의 행동이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아니 왕이 하는 일은 다 옳다고 여겼으리라. 그러다가 거듭되는 하나님의 표적들로 인한 피해가 자신과 백성에게 피부로 다가오자,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한 것 같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막내 아들 셀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방치하였다. 이에 며느리가 교묘하게 꾀를 내어, 자신과 관계를 갖고,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다. 이런 내막을 모른 채 잉태한 것만 가지고 며느리를 응징하려던 유다는 자신이 그 아기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며느리에게 “그는 나보다 옳도다” 라고 말하였다 창 38:26).

사울 임금도 이런 예에 속한다. 아말렉과 싸울 때, 그는 사무엘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일로 사무엘에게 책망을 들자, 그는 “내가 범죄하였나이다”(삼상 15:24) 라고 고개를 숙였다.

또한 그는 군사 삼천 명을 동원하여 다윗을 추격하였다. 그가 밤에 깊이 잠들고, 호위병들도 잠들었을 때, 다윗은 사울의 진영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그는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리하는 대신에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이튿날 그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것을 사울에게 보이며 소리치자, 사울은 다윗을 향해 “내가 범죄하였도다”(삼상 26:21) 고 인정하였다.

다윗도 그러하였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게 한 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 책망하실 때, 그는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하였다(삼하 12:13).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는 인구조사를 함으로 말미암아 재앙이 닥칠 때, 그는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삼하 24:10) 라 고백하였다.

이밖에도 이스라엘 백성 (민 14:40; 신 1;41, 삿 10:5), 아간(수 7:20), 다니엘(단 9:5) 등이 그런 예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체포된 후 자기가 그분을 판 것이 잘못되었다고 자책하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였다(마 27:4). 그리고 그는 옛행실을 회개하고 예수님 품으로 돌아오는 대신에 죽음을 선택하였다.  출 9:27과 위에 언급한 곳들에 쓰인 말은 카타이다. 이는 표적에서 빗나가다, 곧 목표(대상)을 잘못 선택하였다는 의미이다. 죄라는 딱지가 파라오의 완고함에 대해 여덟 번째 표적에서 처음으로 붙었다(출 9:34 참조). 세계적인 제국인 이집트의 통치자인 그가 방향을 잘못 잡음으로 해서, 대상을 잘못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사람과 동물과 식물에 엄청난 재난이 닥치게 된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엿보이듯이, 위 사람들이 죄를 인정한 것과 파라오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사실을 알게 할 뿐, 그 말이 진심은 아니었다.

이어서 그는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직역: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고, 나와 내 백성은 악한 자들이로다) 라 말하였다(모세의 장인 이드로 출 18:10-11; 모압이 불러들인 선지자 발람 민 22-24장;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 왕하 5:15; 느부갓네살왕 단 4:34-35; 다리우스왕 단 6:26 등 참조). 이런 외국인들 말고도 하스기야왕(대하 12:6), 에스라 (스 9:15) 등이 그런 고백을 하였다. 의로운 이란 말(챠디크)에 정관사가 붙어 있으며(핫챠디크) 악한(라샤ㅇ)이란 말도 그와 같으므로(호르샤임)이는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9:27-28) 로 미루어 보건데, 파라오가 여호와를 인정하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것은 그 뒤에 나오는 말을 하기 위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예수님을 향해 사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눅 4:34), 하나님의 아들(마 8:27; 막 3:11)라고 말하는 그 정도 비중의 말인 것이다. 모세는 그 속마음을 꿰뚫어 보았다(9:30 직역: 그러나 나는 당신과 당신의 신하들을 알고 있나이다. 아직도 당신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여기서 여호와의 앞에서 두려워한다는 말은 그분의 말씀과 계획에 따른다는 뜻이다.

이럴 줄 알면서도 그는 하늘을 향해 손을 펴(들어올려)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우박을 그치게 하셨다. 모세는 이렇게 약속을 지켰건만, 파라오는 마음을 다시 바꾸었다. 그의 심장은 무거워지고(완강해지고 = 카베드), 완고해져서(강해져서 = 카자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겠다는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표적 세 번째부터 이런 식으로 줄곤 자신의 약속(말)을 깨뜨렸다.

   
▲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이집트인
위와 같은 큰일을 겪고도 파라오와 그 신하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데,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고하셨고, 모세가 이미 예상한대로 “그리고 그가 가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신하들이” (출 9:34b 직역). 35절을 직역하면, “파라오의 마음은 완악하여졌다. 이에 그는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모세의 손에 / 손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라는 표현은 표적을 여러 차례나 되풀이 경험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는 바로의 행동을 설명할 때 자주 나온다(출 7:12, 22; 8:15, 19; 9:12, 35; 왕상 15:29; 16:12, 34). 그리고 하나님께서 대언자(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실 때에도 등장한다(레 8:36; 10:11; 민 4:37; 삼상 28:15; 왕상 16:7; 느 8:14). 아마르나 문서에도 u qa-bi-ti i-na qa-ti Pa-wu-ra a-wa-ta (나는 파우라의 손을 통하여 이 말을 하였다) 란 표현이 나온다(Hamilton, 149). 아마도 이는 단순이 입술의 말이 아니라, 실행을 향한 강력한 의지와 큰 권능이 포함된 말씀이란 뜻일 것이다.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psalm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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