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땔 감 1<안상님의 살아온 이야기-1997.1.26>
안상님 | 승인 2015.01.28 14:36

우리 동네는 주거환경 개선지구가 되어서 도시가스 시설 공사를 하는데 몇 년이 걸렸다. 아직도 우리 집과 같이 큰 길 가에 있거나 소방도로를 새로 낸 지역의 신축 건물에만 도시가스가 들어와 있다. 석유통을 나르는 것이 곧잘 눈에 뜨이는 것을 보면 석유로 난방을 하는 집도 많은 것 같고 경유를 쓰는 집, 연탄을 쓰는 집도 있다. 이 동네에 도시가스 시설이 다 되려면 몇 년이 걸릴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 따듯한 방 안에서 이젠 도시가스가 들어왔으니 땔감 걱정을 안 해도 되겠지 하면서 새삼스러이 고마운 마음이다. 어릴 때도 이렇게 따듯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면 온 몸에 번져오든 그 포근함을 즐겼다. 그리고 보니 땔감도 참 많이 변했다. 우리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일들이 아닐까? 어릴 때 장작을 싣고 가던 소 마차, 피난 가서 나뭇가지 몇 개 주워 다 밥 해먹던 일 등등...땔감에 얽힌 기억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아 이 기억들이 어느 뇌엽 갈피에 서려 있다가 이렇게 끝도 없이 풀려나오는 것일까? 나는 마냥 누어서 그 옛일들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니 오륙십년의 세월이 훌떡 지나간다. 땔감 걱정을 해본 일이 없는 그 애들이 내 머릿속에 서려있는 그 많은 이야기들을 어찌 상상인들 할 수 있으랴. 그러니 내가 잊어버리기 전에 모두 다 써두는 것이 좋겠다. 우리 세대가 다 떠나고 나면 아무도 그런 땔감 문제가 있었던 것을 생각조차 못할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너무도 기록을 하지 않는다던 말이 생각난다. 역사는 좋던 나쁘던 기록으로 남아야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이며 이런 생활사도 남겨야 할 것이다.

21세기 세계화라는 용어가 하도 흔한 요즈음 땔감 걱정이라니 그 무슨 잠꼬대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연탄을 못 사서 걱정하는 사람이 우리 이웃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래에 난방 문제로 하도 속을 썩이다 보니 땔감에 대해 새삼스러이 생각하게 되었나 보다. 결혼 후 줄곧 살림을 도맡아 왔던 나로서는 땔감에 얽혀 있는 일들이 참 많이 생각난다. 환갑이 넘었으니 아득한 어린 날까지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거의 60년의 땔감 역사를 추적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방이 다 벽으로 둘려진 이방은 우리 집에서 제일 따듯한 공간이다. 더구나 작년 이맘 때 불이 난 뒤로는 줄곧 이방 하나로 그 겨울을 나서 그런지 이 따듯한 공간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새삼스러이 느끼면서 불현듯 내 삶 속에 얽혀 있는 아련한 기억들이 하나하나 이어지면서 평소에 전연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그런 기억들이 어디에 서려있었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하다.

내가 어릴 때는 일제 강점기 이었는데 장작과 숯이 땔 감이였다.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 부뚜막에 걸린 솥에는 밥을 짓고 곁불로 국이나 찌개도 끓였다. 아궁이 뒤로 넘어가는 불은 구들을 통해 굴뚝으로 나가면서 방을 덥혀주었다. 불을 때고 나면 불덩어리들을 긁어내서 화로에 담아 방안으로 들여간다. 화로에는 작은 부삽과 부저가락이 있어서 불덩이를 이리저리 뒤적이기도 하고 된장찌개 같은 것을 올려놓아 자글자글 끓이기도 하고 또 뭉근하니 식지 않게 옆으로 밀어뇌두기도 했다. 화로는 방안의 공기를 덥히기도 하고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의 언 손을 녹여주었다. 또 그 불덩어리들을 꺼내서 헌 들통 같은 것을 엎어서 꼭 덮어 노면 불에 공기가 안 통하니까 그대로 숯이 된다. 그것은 뜬 숯이라고 하는데 숯불 피울 때 불쏘시게 로도 쓰인다. 물론 숯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나무를 때서 타고 남은 것 이여서 참숯보다 화력이 약하다. 참숯은 참나무로 숯가마에서 구운 것으로 싸리나무로 원통처럼 엮은 숯섬에 넣어 팔았다. 언제인가 한번 불고기 집에서 그 숯섬을 보았는데 아주 오래간만에 본 것이어서 참 반가웠다. 나무는 주로 시골 아저씨가 소 마차에 싣고 다니며 팔았다. 장작 한 마차 들여놓으면 한 동안 쓸 땔감 준비가 되어 뿌듯한 것 이였다. 가게에는 한 단씩 사다 때는 사람들을 위해 한 구석에 장작더미가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시골로 소개를 가다 말고 되돌아와서 집도 없어지고 동대문 밖 창신동에 셋방을 들어 살게 되었다. 그 때 땔감이 없으니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 가지를 꺾어다 땠다. 동네 사람들이 많이들 가서 꺾어오니까 나도 따라가기는 했어도 들키면 잡혀간다고 해서 무척 마음 조이던 일이었다. 생소나무는 송진이 많아서 탁탁 소리를 내며 잘 타다가도 불이 내면 연기가 다 아궁이로 쏟아져 나오면서 불이 꺼진다. 연기가 매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불씨를 후후 불면 불이 살아나곤 했다. 학교에는 석탄난로가 있었다. 무쇠난로인데 못 쓰는 종이들을 뭉쳐 놓고 그 위에 나무 부시 레기 불소시게를 얹은 다음에 석탄을 놓고 종이에 성냥불을 붙여서 불을 지핀다. 매일 아침 당번은 제일 먼저 와서 석탄을 가져다 불을 지펴놔야 한다. 그 불이 타서 교실이 더워지려면 한참 있어야 하니 어차피 교실은 추운 곳이어서 오버를 다 입고 수업을 했다.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놔서 밥을 덥히기도 하고 먹을 물을 데우기도 하고 양동이에 물을 데워서 청소할 때 쓰기도 했다.

4학년 때인가 청량리로 이사를 했는데 그 동네는 다 석탄을 때고 있었다. 청량리역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들어 나르는 석탄을 사서 때는 것 이였다. 기차에 쓸 석탄을 빼오는 것이었으리라. 석탄가루를 모았다가 진흙 같은 것을 넣고 반죽을 해서 주먹으로 떡 반죽 만지듯이 걀쭉걀쭉하니 덩어리를 만들어 말리면 또 숯처럼 풍로에 쓰는 연료가 되었다. 풍로에 불을 피울 때에는 풍로 아래쪽에 있는 동그란 구멍에 부채질을 하거나 풀무질을 해서 바람을 넣었다. 풀무는 대장간에서 쇠를 달굴 때 불길을 세게 하기 위해 바람을 내는 것이다. 그와 같은 원리로 집에서는 동그란 바퀴 같은걸 손으로 돌리면 거기 감겨있는 용수철 줄이 바람개비를 돌려서 바람을 내는 것이다. 그때는 집집마다 풍로와 풀무가 지금 혼수의 렌지처럼 필수품 이었으리라.

6. 25를 서울에서 지내고 1. 4 후퇴 때는 무조건 피난을 떠났다. 가다가 잘 곳을 얻지 못하면 들판에서 볏짚을 태우면서 그 둘레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남의 집 부엌 아궁이 옆에서 불을 쬐다 옷 입은 채로 그냥 잔 때도 있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서울에서 20일 만에 다다른 곳이 이리였다. 거기는 산이 멀어서 나무를 구할 수 없었다. 과수원 울타리에 석가래 크기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가시 철망을 쳐놨는데 피난민들이 그 기둥을 빼서 조그만 쏘시개처럼 패서 밥을 끓여 먹었다. 길가에서 나무라고 생긴 것은 아주 조그만 것도 다 주어다가 까치발처럼 앙상하게 쌓아서 밥을 끓이면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방에는 불을 땔 것이 없으니까 짚을 두둑이 깔아서 한기를 면하게 했다. 아예 난방이 없이도 얼어 죽지는 않을 정도의 날씨였나 보다. 그 여름이 지나고 서울로 돌아오니 자기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여러 학교 학생들이 남녀 한데 모인 종합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 때는 조개탄을 땠다. 석탄보다 그을음이 없어서 좋았다. 석탄을 조개모양으로 만들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구공탄이 생겼다. 처음에는 구멍이 아홉 개이던가 하던 것이 세월이 지날수록 많아져서 22개가 되고 연탄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 동안은 거의 모두 연탄을 써서 삼천리 표니 샘표니 하면서 연탄 산업이 아주 번성하였다.

1959년 내가 결혼하고 방 하나 얻어서 신혼살림인데 방에다 연탄 난로를 놓았다. 그 것이 난방과 취사를 겸한 우리 생활용품이었다. 부엌, 식당, 서재, 침실이 모두 그 한 공간 안에 있었다. 지금에 비하면 아주 초라한 살림이었다. 그래서 우리 신혼살림을 보러왔던 고등학교 친구가 “어머, 내 방보다 작지 않아?” 하며 놀라워했다. 그래도 우리는 별 불편 없이 오순도순 소꿉장난하듯이 재미있었다. 아마 지금 내 살림이 너무 거추장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내가 세상을 떠나면 거의 다 없어질 것들이라는 마음이 들어서인지 근래에는 별로 살림살이를 새로 사들이지 않는다. 추운데 연탄 가지러 밖에 나가기 싫으면 남편과 화투로 내기를 해서 지는 사람이 가져오기도 하면서 그 작은 방에서 깨가 쏟아졌다. 둘이 다 학생이었으나 난방시설이 없었던 학교는 12월 초순에 학기말 시험이 끝난 뒤 다음 해 3월에야 개학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긴 겨울이 우리의 37년 결혼 생활 중에 둘이서 만 함께 지낸 가장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짝을 지어 함께 살면서 한동안 부산하더니 이제는 다 떠나 빈 둥지 같은 우리 집에 또다시 남편과 단 둘이 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모든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한다.

안상님  sangnim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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