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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무식(至誠無息)의 삶<김명수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5.01.29 14:51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립보서3:12-14; 새번역)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it or have already become perfect, but I press on so that I may lay hold of that for which also I was laid hold of by Christ Jesus. Brethren, I do not regard myself as having laid hold of it ye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reach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I press on toward the goal for the prize of the upward call of God in Christ Jesus.(Philippians3:12-14; NASB)

신약성서는 27권의 서로 다른 책으로 되어있습니다. 대략 2백년에 걸쳐 쓰여 진 것들이지요. 그 중 13편이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는데요. 13편의 편지 모두가 바울이 직접 기록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하여튼 절반이 바울의 이름으로 쓰여 진 것은 분명하지요. 이것은 초기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바울의 비중이 얼마나 컸나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 중에 옥중서신獄中書信이라는 것이 있어요. 말 그대로 그가 옥獄에 갇혀 있으면서 쓴 편지들인데요.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서너 차례에 걸쳐 수형受刑생활을 했어요. 그 때 쓴 편지들이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한 사도가 되었나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목에서였어요. 한 낮에 벼락을 맞아 눈이 멀어버렸어요. 그 때 바울은 부활한 예수의 하늘음성(天語)을 듣게 됩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많이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일 것이다.”(행9:15-16) 이 천어를 듣고 바울의 인생은 180도로 바뀌게 되었어요. 예수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그였는데요. 이제 예수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변신變身했던 것이지요. 이 하늘 소리를 듣고요. 그는 이방선교를 위한 선교사로 부름을 받게 되지요. 그의 나이 서른 살 즈음에 일어났던 일이지요.

그 후로 바울은 64년경 네로황제 시절 로마에서 교수형을 당할 때까지‘오직 한 길’을 갔어요. 이방 지역에 예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어요. 예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던 기간이 1년에서 3년 정도였다면, 바울의 이발 선교 기간은 그보다 열배 이상 길지요. 30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면서 바울은 7,8년 동안을 옥살이했어요.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의 인생길은 평타한 길도 아니었고요. 3박자 물질축복 받는 길도 아니었어요. 

기독교는 원래 유대교 갱신운동更新運動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어요.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개별 조항 지키는 것을 생명처럼 여겼어요. 지나치게 율법의 형식주의에 치우쳐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에 항거하신 분이 예수였어요. 그는 바리새파의 형식주의에 항거하여 율법의 기본정신 회복 운동을 벌였는데요. 예수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公義)과 정의(公法)에서 찾았어요. 예수께서 펼쳤던 하나님나라 운동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증오와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를 세우는 일이었어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당대 팔레스타인 지역에 한정되어 전개되었어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계승하여 이를 소아시아와 유럽지역으로 확장시킨 분이 바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농촌지역의 마을 단위로 선교를 했다면, 바울은 헬라의 대도시들을 돌면서 도시민을 대상으로 선교를 했어요. 바울은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놓았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지구촌 반대  편에 위치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복음을 접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바울의 이러한 선교 선교전략의 덕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복음을 접했을 때 바울의 감격을 읽을 수 있어요. “내가 모세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데는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허나,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모든 것이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나는 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 형제여러분, 나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여러분께 자신 있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는 과거의 것은 잊어버리고, 지금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 온 몸을 기울여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빌3:6-13)

바울은 자기가 걸어온 길을 예수 만나기 ‘전前’과 ‘후後’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어요. 예수 만나기 전前의 인생은 어떠했나요? 모범적인 바리새파 신도였어요. 모세율법을 철저히 알고 그 개별조항들을 어기지 않고 지키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것이지요. 아마도 바울은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적인 바리새파 신앙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율법적으로 전혀 흠 잡힐 데가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어요. 

예수를 만난 후後 그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나요? 자기가 지금까지 소중히 여기고 얻으려고 했던 것들이 한갓 쓰레기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율법 조항 하나하나를 지키는  삶이야말로 ‘참 나’를 찾는데 도움 주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요. 이제는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율법뿐만이 아니지요. 물질, 명예, 학문, 성공, 출세도 마찬가지이지요. 내가 밖에서 구하고 얻은 일체의 것들에서 삶의 보장을 찾으려고 할 때, ‘참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바울은 깨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삶은 소유(having)가 아니라 존재(being)입니다. 내 것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아니지요. 그냥 사는 것입니다. 삶은 실체(substance)가 아닙니다. 관계(relation)이지요. 나의 나 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일정한 조건과 관계 속에서 결정되고 유지되는 것이지요. 유무득실有無得失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로 살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의해서 내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지요. 바울은 예수를 만나 이러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어요.

손익득실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사는가? 이것이 내 미래운명을 결정합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삶’을 강조했어요(빌3:9; 갈3:28). ‘예수와의 연합된 삶’을 강조하기도 했어요(롬6:3).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들이 되었습니다.”(고후5:17)

단순히 예수를 믿어 복 받고 구원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리스도 안(en Christo)’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피조물’(kaine ktisis)이 됩니다.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낡은 나’를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새로운 나’ 다시 태어날 수 있어요. ‘참 나’또는‘영적 나’로 깨어남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하게 됩니다. 밖에 있으면 안 되지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주체主體로 살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산다는 진리를 바울은 확실히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무는 삶인가요? ‘예수 따로, 나 따로’가 아닌 삶이지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셔서 내 몸의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몸 주(身主)’가 되면 어떻게 되나요?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지요. 그리스도의 분신分身입니다. 바울에게 예수는 나와 동 떨어진 실체substance가 아니었어요. 관계였어요. 밖에서 나에게 복 주시는 대상object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밖에서 경험하지 않았어요. 내 안에서 경험했습니다. 예수를 몸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바울의 언행은 곧 예수의 언행이었고요. 바울의 인격은 예수의 인격이었어요. 바울의 삶은 예수의 삶이었고요. 바울의 운명은 예수의 운명이었습니다. 바울과 예수는 둘이 아니었습니다. 한 몸을 이루었어요. ‘지금 여기’에서 예수살기 운동을 혼신을 다해 실천했던 분이 바울이었습니다. 30년 경 예수께서 로마총독 빌라도에 의해 비명횡사했듯이, 바울도 마찬가지였어요. 64년 경 네로정권에 의해서 비명횡사했어요. 바울에게 예수는 보편적 자아 또는 ‘참 나’였지요.

   
▲ 다석 유영모
다석 유영모도 바울과 같은 지평에서 예수를 이해했어요. 다석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의 말씀을 내 말로 받아들였어요. 유영모는 자기와 예수를 둘이 아닌 불이적 관계(不二的 關係)로 이해했어요.  복음서의 예수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주어진 ‘나-말’로 바꾸어 이해했어요. 예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로 읽었던 것입니다(Jesus story is My story). 유영모에게 예수는 객체object가 아니었어요. 자기의 또 다른 모습이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요14:6). 본문에서 ‘나’로 번역된 ‘에고’(Ego)는 예수 개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나(Universal I)’로 본 것이지요. ‘예수 안’에 있으면 누구나 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보편적 에고(Universal Ego)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고 유영모는 생각했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세속적인 가치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세속적인 삶인데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보고 듣는 대로 따라가려 하고요. 구하려고 합니다. 얻으려고 하고요. 얻은 것을 지키려고 집착하게 되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모든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밖에서 얻은 것은 반드시 내 곁을 떠나고 만다는 것이지요. 밖에서 얻는 것 중에는 물질이 있어요. 명예도 있고요. 권력도 있습니다. 건강도 있고요. 사람도 있습니다. 헌데 이와 같은 밖에서 얻은 것들은 반드시 내 곁을 떠나고 맙니다. 시공時空의 3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태어나서 머물다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그렇게 창조하셨어요. 생주멸生住滅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이지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일 한 번 구하거나 얻은 것을 영구히 내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행위이지요. 

어떻게 하면 구하고 얻으려는 마음에 갇히지 않을 수 있나요? 보고 듣되, 보고 듣는 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족함이 없음을 알아차려야 하지요. 부족함이 없음을 알아차리면 보고 들어도 구하거나 따라가지 않게 되지요. 현재 상태에서 만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어떤가요? 맹수는 필요한 만큼 사냥하지요. 배가 부르면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지요. 동물의 세계에서는 비만도 없고요. 다이어트 할 필요도 없지요. 지나치게 먹어서 비만이 되고, 찐 살을 빼려고 다이어트 하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만이 볼 수 있는 진풍경이지요. 동물의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말년에 에베소 또는 로마의 교도소에 갇혔던 적이 있는데요. 옥중에서 빌립보교회 신도들에게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1-13)

바울은 노년기에 감옥이라는 한계상황 속에서 물질적으로 궁핍했고요. 건강상의 여러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이 소식을 듣고 아마도 빌립보교회 신도들은 십시일반으로 헌금과 물질을 모아 에바브라디도 편에 전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선물을 받고 바울이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는데요.

바울은 빌립보교회 신도들이 물질적으로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어요(빌2:25.30).  그러면서도 내가 궁핍하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리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요.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배웠다’로 번역된 ‘에마돈’의 원형은 ‘만다노’(manthano)인데요. 사물의 이치를 자신의 삶 속에서 몸으로 체득한 상태를 일컫는데요. 일종의 체험지體驗知를 뜻하지요. ‘자족自足’으로 번역된 ‘아우타르케이아’(autarkeia)는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유행했던 스토아철학의 중심사상에 해당합니다. 철학에서는 아우타르케이아가 지족知足으로 번역되고 있어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부족함이 없음을 알아차린다는 뜻이지요. 욕망을 채워서  얻는 만족(empimplemi)(눅6:25)과는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어요. 인간의 행복이란 밖으로부터 채워 얻어지는 게 아니고요.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형편에서 부족함이 없음을 알아차리는데서 얻어진다고 본 것이지요. 

바울은 자족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부연설명하고 있어요. 생활이 어렵거나 넉넉하다고 해서 그런 것들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이라고 해요. 이러한 자족함을 바울은 ‘그리스도 안(en Christo)’에 있을 때 얻게 된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바울은 빌립보교회 신도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빌2:5) 그 마음은 다른 것이 아니지요. 자기를 비우고(kenosis) 낮추는(tapeinos) 것이지요. 바울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은 신적인 초능력을 발휘하는데서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데서 찾았어요. 

   
 
예수의 직업은 무엇이었나요? 수공업자(테크톤)였어요.(막6:3; 마13:56). 그는 나사렛 촌 동네에서 목수 일로 가족의 생계를 부양했어요. 뜻한 바가 있어 예수는 서른 살 즈음 출가를 하지요(눅3:23).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는 하늘소리(天語)를 듣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나는 너를 기뻐한다.”(막1:11) 나사렛 목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바뀐 것이 아니지요. 나사렛 목수 그대로가 하나님 아들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에고를 넘어서 ‘참 나’를 찾게 된 것이지요. 인식의 변화가 존재의 변화에 선행합니다.  

자기 존재의 존귀함에 대한 새로운 자기이해는 예수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했어요.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했던 것이지요. ‘참 나’를 찾은 예수는 어디로 가나요? 저자거리입니다. 가난한 씨알들의 생활현장으로 갑니다. 씨알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삶의 동반자로 살지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어요. 첫 번째 특징은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운동이었어요.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깨달음을 알아차리고 사는 것이지요. 자기긍정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주체성을 갖고 주인으로 사는 것이지요. 매사에 주인의식을 갖고 살면, 서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진리의 자리가 되지요. 구원의 장소가 됩니다.

두 번째 특징은 무상급식운동인데요. 예수 당시 갈릴리는 로마의 식민지였어요. 갈릴리 씨알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부과된 세금폭탄 때문에 살아갈 길이 막막했어요. 파산한 씨알 중에는 광야나 토굴로 들어가 도둑이나 강도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루 치 양식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알라는 내용을 담은 주기도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6:11). 예수 자신은 어떻게 사셨나요? 때로는 배 곯으셨어요(마21:18). 머리를 둘 방 한 칸 없이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며 하루하루 고된 삶을 사셨어요(마8:18-22). 예수는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면서, 강제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씨알들을 축복하고 보살피는 삶을 살았어요. 자발적인 가난만이 사회를 구원합니다. 이를 예수께서 손수 보여주셨지요.

세 번째 특징은 무상치유운동이지요. 예수는 가는 곳마다 온갖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셨어요. 병을 고쳐줄 때마다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고 말합니다(마9:22). 무엇이 믿음인가요? 신뢰이지요. 긍정마인드이구요. 건강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몸 따로 마음 따로 창조하지 않으셨어요. 몸속에 치유능력을 갖추어 놓으셨어요. 몸과 마음은 상관相關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마음에 건강한 몸이 가능하지요. 

우리나라 헌법 34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가요? 강제된 빈곤과 질병입니다. 빈곤과 질병 퇴치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인간의 삶은 목표goal와 과정process으로 되어있습니다. 하나님나라 확장이 예수의 목표였어요.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예수는 목표달성에 실패한 분이었어요. 정작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과정이었어요. 삶의 순간순간을 성심껏 살았어요. 순간순간 이미 목표에 이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중용>을 지은 자사子思는 “지성무식至誠無息”을 말했어요(26장). 그는 자연의 특징을 성誠에서 찾았어요. 성은 정성이고 성실함인데요. 사시사철의 운행은 어김이 없지요. 정지하거나 건너뛰는 법도 없습니다.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옵니다. 땅 속에 갇혀있던 생명의 씨앗들이 솟아오릅니다. 대지는 끊임없이 새 생명을 낳고 창조하는데 있어서 정성을 다하고 성실하지요. 쉼이 없이 성실하게 운행하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 자사子思의 생각이지요. 요한은 예수에게서 로고스(로고스)의 화신化身을 보았지만(요1:14), 저는 예수야말로 지성무식至誠無息의 화신化身이라고 생각합니다. 쉼 없이 정성과 성실을 다해 하나님을 공경하고 씨알민중을 사랑했던 삶으로 일관하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는 과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 역시 과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만 지금 목표를 향해 온 몸을 기울여 달리고 있을 뿐입니다.” 노년기의 신앙고백인데요. 평생 동안 신앙의 길을 달려온 그였는데요. 그는 목표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만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길 위의 나그네’임을 고백하고 있어요. 순간순간 성실을 다해 살았을 뿐이라는 말이지요.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목표달성이 아닙니다. 방향성을 가진 순간순간의 성실한 삶이 더 소중한 것임을 예수와 바울은 보여주었어요. 삶은 과정입니다. 쉼 없이 하루하루를  성실을 다해 살 때, 우리는 이미 목표에 이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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