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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집언봉사執言奉辭 4>『논어』 이인편(里仁篇)
이은선(세종대교수) | 승인 2015.02.03 10:53

<명구>
里仁篇 1 : 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이인편 1  자왈 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

<해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마을이 仁한 것이 아름다우니, 그런 곳을 골라서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성찰>
지난 3편의 팔일편에 이어서 이번에는 ‘리인편’이다. 『논어』제9편인 자한편(子罕)에 가면 “공자께서는 이익(利)과 命과 仁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다”라는 첫 구절이 나오지만 仁은 공자와 유교의 핵심사상이고, 『논어』에는 총 108번에 걸쳐서 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말해진다. 인간다움과 서로에 대한 배려와 소통이 살아 있는 마을이 아름답고, 그런 곳을 골라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는 말씀이다.

지난 팔일편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모여 사는 공동의 삶이 약육강식의 폭력장으로 변하지 않도록 하는 ‘전통과 권위, 종교(禮)’의 삼중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인간적인 예를 익히고, 전통의 권위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거기서 궁극적으로 하늘에까지 닿아있는 인간적인 외경심(敬)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한편으로 현실에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은 그 예와 전통이란 쉽게 형식주의에 물들기 쉽고, 막무가내의 폭력이나 거부 앞에서 무력하며, 그렇다고 그것을 더 강화할 경우 우리 삶은 점점 더 차가운 법치주의나 공안주의에 빠질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공자나 맹자가 당시의 법가나 순자의 방식에 대해 가했던 비판이 그것이고, 오늘 한국 사회의 삶에서도 그것을 잘 경험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할수록 공자가 더욱 집중한 곳은 인간 내면의 힘이었다. 물론 그가 한편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일이 仁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말하였지만 여기서 仁은 그 禮를 행할 수 있는 우리 속의 더 근원적인 힘, 자신을 이기고 더불어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인간성의 ‘뿌리’와 ‘씨앗’으로서의 영적 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영모와 함석헌 선생은 그것을 ‘씨’로 표현하였고, 공자 세계 신뢰의 진정한 근거는 그렇게 어떤 외면적인 정치나 외재적인 예의 체제 등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仁이라는 인간성 자체였다.

仁의 글자를 형상적으로 푸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것은 여성이 자궁에 아기를 품고 있는 모습이나 두 사람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仁과 인간성의 본질이란 ‘더불어 함께 함’이고, ‘관계’ 안에 설 수 있는 능력이며, 그래서 그 관계를 통해서 ‘천지에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창조적 생명력’(天地生物之理/心)이라는 것을 지시해 준다. 쉬운 일상의 언어로 하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고, ‘배려’와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며, ‘상상력’과 ‘직관력’으로서 상대의 처지를 알아차리고 존귀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 의 인식력을 말한다.

그런 능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함께 사는 일이 참으로 아름답고 선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의 곳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지혜라는 것이다. 인간성이 풍성히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루는 부부관계, 가정살림, 동네와 직장,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공자는 누누이 말하고, 그런 공동 삶을 이루는 궁극의 기초를 그는 인간성 자체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 仁이 무엇인가를 여기 이인편의 언어로 다시 이야기해보면 공자의 제자 증삼이 스승의 도를 한 마디로 꿰었다는 ‘충서’(忠恕)라는 지시어가 있다. 즉 ‘忠’이란 ‘마음(心)에 중심(中)이 있는 것’이고, ‘恕’란 ‘상대방도 나와 같은 인간(如)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는 마음’(心)이다. 그래서 이 인간성으로서의 중심잣대를 가지고 판단과 행위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직을 유지하는 것이고, 앞의 상대방도 나와 같은 믿음과 약함과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아서 그를 믿어주고, 용서해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서구 여성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가장 고유한 두 능력으로서 ‘약속하는 힘’과 ‘용서하는 힘’을 들었는데, 이것이 공자의 충서와 매우 잘 통한다.

공자는 또 여기서 “사람이 仁하지 못하면 곤궁한 처지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고, 기쁨에도 오래 머물 수 없다”고 하였다(不可以久處約 不可以長處樂). 인간성, 충서, 존재에 대한 깊은 사랑,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와 믿음을 갖지 못하면 삶과 시대의 어려움 앞에서 쉽게 좌절하고 포기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기쁨과 즐거움은 매우 표피적인 것이어서 쉽게 변하고, 순간의 쾌락에 집착하고, 그래서 불나비처럼 이런 즐거움, 저런 쾌락을 찾아다니지만 그런 기쁨들이 진정으로 생명력과 인간성을 길러 주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인간 군상을 잘 그려주고, 온갖 종류의 오락과 취미와 문화가 난무하지만 인간성은 오히려 점점 메말라가고 돈과 자아에의 노예성은 줄어들 줄 모르는 현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공자는 “오직 仁한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으며,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라고 했는데, 그것은 仁한 사람의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은 단지 사적인 것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善과 美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밝힌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마음과 감정이 仁에 근거해서 좌우로 치우쳐져 있지 않기 때문이고, 이렇게 시대의 문화와 예술은 仁이라고 하는 생명력과 사랑에 근거할 때 위대하게 번성할  수 있음을 지시한 것이다.

공자의 유명한 언술 “아침에 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는다 해도 좋다”라는 말도 이 편에 나온다. 자신 속에 우주 생명의 씨앗과 뿌리가 놓여있고, 그래서 진실할 수 있으며, 선과 미의 기준도 여기 지금의 나의 선호 감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영원’을 얻은 것이고, 오늘을 살면서 영원(eternity)를 사는 것이므로 더 이상 물리적인 목숨의 연장이나 부와 명예에 좌우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 세리 삭개오의 예수 복음의 체험이나 막달라 마리아의 향유옥합 행위가 그런 것일 것이다.

공자는 “仁이 아니면 어떻게 (사람이) 그 이름을 이룰 수 있겠는가”(君子 去仁 惡乎成名)라고 했다. 또한 뜻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한 끼 밥 먹는 짧은 순간에라도, 발이 걸려 넘어지는 급한 찰나에도 결코 仁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렇게 仁이 참으로 보편적인인간성의 기초로서 만물을 낳고,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며, 선한 감정과 공감력으로써 우리를 자아와 돈의 노예성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기본력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 仁을 키우는 일에 우리 공동체가 주력해야 할 것이다.

‘(仁의) 덕은 결코 외롭지 않아서 반드시 함께 하는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鄰)는 것이 공자의 큰 믿음이었고, 그래서 그는 어떤 물리적인 위협이나 폭력, 명예나 가식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서 仁의 확산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다. 그것이 그의 삶과 행위의 진정한 그루터기였으며, 그를 통해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정치와 문화와 예술의 근본은 仁, 인간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다시 배운다.

이은선(세종대교수)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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