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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咸錫憲)과 장준하(張俊河), 그 이질(異質)의 짝 1<문대골 칼럼> 역사의 승화를 위해 선택된 제물(祭物) 장준하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2.18 13:22

함석헌과 장준하

박정희의 통치! 그 죄악의 시대에 구속사적(救贖史的) 사명을 지닌 두 사람이 있었다. 함석헌과 장준하, 장준하와 함석헌이었다. 장준하는 그 아버지 장석인(張錫仁) 보다도 함석헌이, 함석헌은 북에 두고 온 첫아들 국용(國用)이나 곁에 있는 아들 우용(禹用)이 보다 장준하가 더욱 존경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우리가 함석헌과 장준하를 읽을 때 조금은 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현대사에 유일한 순(純)민주정권(4.19로 이룩된)을 “밤중에, 몰래, 갑자기”, “총알과 화약”으로 전복시키고, 말이 좋아 국가재건이지 사실은 국가를 말아먹기 시작한 그 군마(軍魔)의 세력에 오직 필봉(筆鋒) 하나, 뜻 하나로 두 몸을 하나로 묶어 일관되게 저항의 일선을 살고 간 함석헌과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張錫仁)이 다같이 1901년생으로 동갑내기이고, 장석인의 장남 장준하와 함석헌의 장남 함국용이 1918년생으로 동갑내기였다는 것이다. 또 장준하의 할아버지 장윤희(張潤熙: 1864-1950)와 함석헌의 아버지 함형택(咸亨澤)의 경우, 두 사람은 다 기독교 장로(長老)로 사제를 털어 교회와 사립 소학교를 세웠고, 스스로 교장이 되어 기독교를 통해 들어온 신문화 교육에 투신한 분들이었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아버지 함형택이 세운 학교는 덕일소학교(德一, 평북 의주), 장준하의 할아버지 장윤희가 세운 학교는 양성(陽成)소학교였다. 게다가 두 어른들은 꼭 같이 한의학(韓醫學)과 한의술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었고, 유달리 사람사랑이 두터워 병든 이들의 래왕이 그칠 새가 없었다. 장윤희는 전업으로 의원이 되었던 것은 아니나 몸소 천착한 지식으로 한약의 화제(和劑)도 내고 방문(方文)도 적어서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내어주었는데 그 처방이 잘 맞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석헌의 아버지 함형택은 한의의 전문의였다. 화국원(和局院)이라는 한의원을 경영했고 당대의 명의였다. 대청(大廳)마루는 사면을 통유리로 둘렀고, 지역마을에 두 채뿐인 기와대가 중 하나로 날마다 환자들로 북적였고, 멀리 중국의 산동(山東)반도까지 함의원의 비술(秘術)이 알려져 조선의 화국원을 찾아오기까지 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과 함석헌의 역사가 또 묘하게 겹쳐진다. 장석인이 장준하를 낳고(1918) 꼭 1년 후, 그러니까 장석인과 함석헌이 공히 18세가 되던 해, 장석인은 의주에서, 함석헌은 평양에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당시 함석헌은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이었고, 장석인은 신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장의 특별추천으로 신의주 부청(府廳)의 고원(雇員)으로 재직하고 있는 때였다. 함석헌과 장석인은 꼭 같이 태극기를 그리는가 하면 목판을 조각해 태극기를 찍어내고 그 배포의 기획, 책임자의 역할까지 담당했다. 3.1항일운동은 열화처럼 일었고 의주에서는 학살사건으로, 평양에서는 경찰과의 대충돌을 일으켜 결국 장석인은 신의주 부청에서 파면되고, 함석헌은 그 평양고보를 퇴학해야 했다.

함석헌과 장준하의 성장과정, 역사(役事)과정 역시 그저 지나치기 어려운 깊은 공통점이 있다. 제국의 탄압에 맞서 저항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는 것, 해방된 조국에서까지 일본무단철권정치 하에서와 못지않게 고난의 삶을 살아왔고, 또 이후에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지않을 탄압과 역경을 마치 운명적인 듯 살아내야 하는 생(生)의 동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체(一體)였다 함이 옳을 것이다.

장준하는 선생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따라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1933)하여 1년을 다니고, 다음 해 평북 선천(宣川)의 신성(信聖)중학교 2학년이 되어간다. 역시 아버지가 평양 숭실에서 선천의 신성으로 교목(校牧)을 겸한 교사로 전근해 갔기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신성중학을 졸업(1938.3.25.)한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라는 큰 인격으로 대접을 받게 되는 신안소학교(新安小學校)의 3년에 이르는 교편생활로 그의 역사 제1부(제2부 일본유학-중경 임시정부 거쳐 귀국까지, 제3부 해방조선-단일정부 수립-이승만 정권 몰락까지, 제4부 5.16-1975.8.17. 장준하의 의문사까지)를 마감한다. 그리고 1941년 2월 일본유학의 장도에 오른다.

함석헌의 고난사관(苦難史觀)

   
▲ 1920년대의 함석헌
함석헌이 남강 이승훈의 후원으로 동경고등사범을 마치고(1928.3) 돌아온 지 14년째 되는 해였다. 그간 함석헌은 글자 그대로 피 어린 삶을 살아내야 했다. 함석헌은 자신과 조선민족을 동일시했다. 특히 고난사(苦難史)에서 그랬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민족의 고난으로, 민족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이해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고난의 의미”였다. 세계의 모든 죄를 품고 흐르는 격랑, 격류!

동경고사를 마치고 평북 정주의 오산중학에 역사교사로 부임한 함석헌은 그가 한국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선언하는 1934년 1월 3일(함석헌은 무교회주의자인 김교신이 발행하는 성서조선(聖書朝鮮) 독자들의 신앙수련을 위한 매년 연말연시 정례모임에서의 주제 강론에서 “한국사의 기조(基調)는 고난”이라 발표했고, 그 강론의 전체 내용이 후에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뜻으로 본 韓國歷史」로 간행됨,필자 주), 새 역사, 새 종교, 새 세계의 수립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사전작업이 우주를 흐르는 온갖 죄악의 오수(汚水)들을 말끔히 흘려 내보내는 일인데, 그 오수를 뽑아낼 하수구(下水溝)로 선택된 것이 곧 조선이라면서, “나” 역시 그 하수구의 사명 아래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 이후 함석헌은 아시아 큰 길거리에 창녀로 앉아 온갖 치한들의 뭇 죄를 다 받아들이므로 세계 속죄의 사명을 다 한 것같이 자신 또한 죄의 역사의 환원을 위한 제물임을 고백했다. 한국! 고난의 제물, 나 함석헌! 그는 1938년 오산을 물러나야했고, 물러나 오산학교 근처의 한 과수원을 매입해 농사를 시작했는데 일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평양 근교 송산(松山)에서 농사학교를 운영하던 김두혁(金斗赫)으로부터 학교의 수임을 강력하게 요청받게 되어 온 가족이 다 평양으로 나갔지만 이미 새 역사의 제물로 자신의 전생을 “뜻”과 언약 한바 있는 함석헌은 그의 서원대로 반일운동 학생들의 배후자로 지목되어(소위 계우회 사건)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갇혀(1940.9-1941.6월 하순) 1년여의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가 의(義)의 청년 장준하가 일본에 유학, 동경에 있는 동양대학(東洋大學)의 예과 1학년이 되는 해다.

장준하의 동경유학

아버지 장석인은 아들의 동경행을 내심 반기면서도 아들 장준하만은 신학을 전공하기를 바랐다. 장준하가 신안소학교 교사직의 사임을 쉽게 결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코 쉬운 일자리가 아닌 교사직을 기어이 털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신성학교 동창이었던 김익준의 큰 격려가 있어서였다. 익준은 거구의 청년이었다, 웅변에 능했고 대단한 리더십도 지닌 청년이었다. 해방된 이후 두 사람의 길은 너무 달라버렸고 박정희의 군사반란 세력의 폭압 아래서는 적대 관계가 돼버렸지만 학창시절 두 사람의 관계는 흡사 혈맹지우(血盟之友) 바로 그것이었다.

   
▲ 김익준(왼쪽)과 장준하(오른쪽)
장준하는 김익준의 편지를 받았다. “아무것도 걱정 말고 일본으로 오라. 옷 걱정, 밥 걱정 할 것 없고 대학 걱정 할 것 없다. 내가 다니는 동양대학이라면 내가 모두를 책임질 수 있다.” 그래도 선뜻 결정을 할 수 없는 것은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아우들이 다섯, 아버지마저 실직 중이었다. 그런 때 장준하가 일어서게 된 것은 아버지의 격려였다. “가거라. 아무 염려말고 어서 가거라.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주저앉으면 후회하게 될게야.” 그래서 장준하는 장도에 올랐다. 친구 익준의 애틋한 밑받침으로 동양대학에 입학, 다음 해 일본신학교(日本神學校)로 전학했다. 아버지도 기뻐했고 자신도 흐뭇했다. 특별히 고마운 것이 친구 김익준이었다. 익준은 자신이 재적하고 있는 동양대에서 일본신학교로 준하가 전교하는 데도, 한국에서 준하는 불러낼 때와 똑같이 열심을 다해주었다. 이제 일본 신학교다. 준하는 여기서 “나는 장준하의 대를 잇기 위해 세상에 왔다.”는 저 유명한 문익환(文益煥)과 문익환의 아우 문동환(文東煥), 박영출(朴永出), 지동식(地東植), 황재경(黃材景), 전택부(全澤鳧), 김관석(金觀錫), 박봉랑(朴鳳琅), 김철손(金喆孫) 등 후에 한국기독교계의 핵심인물로 나타나게 되는 자랑스러운 학우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역사는 장준하로 하여금 상아탑 속에서 학문에 일심을 바쳐갈 수 있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참 큰 혼은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만 정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랬다! 역사는 장준하를 역사 자신을 위해 순혼(純魂)으로 헌신하는 인격으로 키워내기로 작정했다. 온몸을 던져 글자 그대로 “사투(死鬪)의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게 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하늘의 은혜, 그 역사의 특은(特恩)을 입은 사람이었다. 역사가 부여한 그 지독스러운 고난의 삶을 오롯이 살아냈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하는 일, 일마다 하늘이 주는, 역사가 명하는 일이었으면서도 그 결과는 처절했다는 말로도 다 표현될 수 없는 패배(?)의 삶을 살아냈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삶의 종막을 내려야 했을까?

장준하가 동경대학의 예과 1학년을 마치고, 일본신학교에 재입학해서 2년을 거의 마칠 무렵 1943년 11월 학년학기말을 바로 목전에 둔 채 모든 짐을 챙겨 귀국한다. 내심으로 동경유학을 완전히 접은 것이었다. 조국 땅에서 시행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의 종교정책으로 아슬한 위기에 처해있는 가족들과 1943년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반도학생지원, 징병제의 실시에 이어 조선의 처녀들을 징발, 일본본토의 군수공장과 전선의 위안부로 차출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들이 장준하로 하여금 비상한 결단을 하게 한 것이다. 이때 장준하에겐 고국에 사랑하는 소녀 <로자>가 있었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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