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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정등도(無上正等道)<김명수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5.02.22 11:21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고린도전서12:31-13:3; 표준새번역)

And I show you a still more excellent way. If I speak with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but do not have love, I have become a noisy gong or a clanging cymbal. If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know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ll faith, so as to remove mountains, but do not have love, I am nothing. And if I give all my possessions to feed the poor, and if I surrender my body to be burned, but do not have love, it profits me nothing.(1Corinthians12:31-13:3; NASB)


역사를 평가하는 시각은 사람들마다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2월 초 대구시의회에서 한 구의원에 의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짓자는 건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반만년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은 조국근대화의 아버지가 박정희였고요. 혼란한 시대와 민생을 안정시킨 분이 전두환이었다고 해요. 6.29 선언을 통해 민주화의 초석을 놓았고, 북방정책으로 우리나라를 경제 대국으로 이끈 이가 노태우였다고 합니다.

국민들 사이에서 박정희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무엇인가요? 비록 독재는 했지만 국민들을 먹고살게는 해 주었다는 것이지요. 일면 일리가 있는 주장인데요. 헌데,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잘 살게 해 주었다면, 40년 전에 있었던 새마을운동의 이념을 박근혜정권이 다시 끄집어내어 국가시책으로 상품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지난 반 세기동안‘잘 살아보세!’라는 성장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했어요. 먹고 사는 문제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지요. 사회 전체가 생물학적인‘먹고 사는 문제’에 의해 갇혀있던 시대였어요.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종류의 반인륜적 행위도 정당화되었고요. 비윤리적 적폐가 사회 전반에 걸쳐 내면화되어있어요. 박정희는 국민소득 천불 시대가 오면 온 국민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당시보다 국민소득이 30배가 넘는데요. 그가 말했던 것처럼, 지금 온 국민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사회는‘잘 살아보세’지배이념에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 ’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시점에 서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경제성장만 부르짖는다면, 한국사회는 그만큼 더 황폐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 정치인은 그리스 국가를 예로 들어, 우리나라도 복지가 과잉이 되면 국민이 나태해지고 나라경제가 거덜 난다는 논리를 펴는데요. 복지 과잉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득권층의 탈세와 사회적 불평등이 그리스의 경제를 망쳐놓았던 것이지요. 우리나라 복지 지출액은 국내총생산(GDP)의 10%대입니다. 스웨덴 같은 선진국들은 30%대인데요. 복지 과잉이 나라를 망친다는 논리를 편다면, 선진국들은 이미 경제가 파탄이 났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망한다면, 복지 과잉 때문이 아니지요. 이명박정부 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는‘부자감세 서민증세’라는 조세시스템의 사회적 불평등구조 때문일 것입니다. 현 정권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과감하게 조세개혁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가? 누가 저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잘 살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이 물음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스스로에게 반드시 물어야 할 화두입니다. 사회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일까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일까요? 사회적인 성공이나 명망을 얻는 것일까요? 이것이 예수를 믿어 잘 살게 되는 것일까요?

흔히 잘 산다고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인가요? 물질, 건강, 사회적 명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되세요.’ 라는 전도지를 지하철에서 나누어주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 되는데요. 여기에는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어요.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에는 석세스클럽이 있다고 해요. 사회적 성공과 출세를 위해 모인 집단을 말합니다.

잘 사는 기준이 되는 이 세 가지는 항상 내 곁에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고 맙니다. 어느 대중가요 가사처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기 때문이지요. 사회생활에서는 얻고 잃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요. 인생에서는 얻었다고 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요. 잃었다고 해서 잃은 것이 아니지요. 인생은 본래 유무득실有無得失이 없는 것이지요. 이를 알아차리고 살면, 잃고 얻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 사는 것일까요? 바울도 이 문제로 고민했던 사람인데요. 그의 아버지는 군수납품업자였어요. 로마군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제공하여 엄청난 부를 얻었어요. 로마시민권을 살 정도였어요. 바울은 로마시민으로 태어났고요. 그의 아버지는 바리새파의 신앙전통에 따라 아들에게 유아시절부터 생계훈련과 신앙훈련을 철저히 시켰어요. 바울은 텐트 만드는 기술을 익혔고요. 어려서부터 율법공부를 철저히 했어요. 모범적인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청년시절 예루살렘으로 유학했어요. 랍비 가말리엘 밑에서 본격적인 율법교육을 받았습니다. 당대 유명한 율법학자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어요.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 명망을 얻으며,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잘 사는 길이요.  ‘참 나’를 찾는 길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목표를 이루려고요. 온 힘을 다해 달려왔어요. 그러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왔어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대 낮에 벼락을 맞았어요.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늘소리(天語)를 듣게 되지요. 부활한 예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행9:3-19).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건이 있은 후, 바울의 인생은 180도로 바뀌었어요. 전엔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어요. 이젠 예수의 사도로 변한 것입니다. 돈, 명예, 율법이 ‘참 나’를 얻는 길인 줄 알았는데요. 그것들이 오히려 ‘참 나’를 얻는데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요. 그것들을 얻으려고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참 나’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바울이 깨닫게 된 진리는 무엇이었나요? 가장 잘 사는 길은 ‘참 나’를 찾는 것인데요. 그것은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 명망이 아니었어요. ‘율법 안’(en nomo)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en Christo)에 있을 때, ‘참 나’로 살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가장 잘 사는 길은 돈, 명예, 율법이 아니었어요. 그리스도와 관계맺음이었어요.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빌3:7-9)

바울이 고린도를 찾은 것은 기원후 51년 3월경입니다. 두 번째 선교여행 중이었어요. 우연히 그곳에서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어요. 그들은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이었는데요. 기원후 49년 있었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고린도로 이주해왔습니다. 그들은 천막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바울은 낮에는 천막 짓는 일을 하며 생계를 벌고요. 저녁에는 그의 집에 지인知人들을 불러 모아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했어요.

아테네에서의 선교 실패를 거울삼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어요. 그 열매가 고린도교회였어요. 신도중에는 헬라인들이 많았어요. 당대 대표적인 철학학파 중에 에피큐리안epicurean이 있어요. 이들은 쾌락을 얻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두었어요. 헬라인들의 생활습성은 자유분방했고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어요. 신앙생활을 해도 이러한 습성은 변하지 않았어요. 성적으로 문란했고요. 교인 가운데 분파가 심했어요.

교인 중에는 다양한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말씀의 은사, 치유의 은사, 기적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을 식별하는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어요(고전12:8-10). 교인들은 각자 자기가 받은 은사가 최고라고 생각하고요. 교인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게 되었지요.

은사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한 분이신 같은 영’(to hen kai to auto pneuma)에 의해 주어졌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어요(11절). 영은 한 분이신데, 은사는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은사의 통일성unity이 강조되고 있어요. 여러 지체의 기능은 각기 다르지만, 그것들이 협력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영(프뉴마)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요. 무엇을 위해 주시는 건가요? 교회공동체의 공익公益(오이코도메)을 위해서라고 합니다(고전14:12). 영(프뉴마)은 공公이지 사私가 아닙니다. 영의 은사 또한 공익公益을 위한 것이어야지 사익私益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헌데 고린도교회 신도들은 어떻게 했나요? 특히 방언하는 사람들은 방언이 은사 중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자기들이 받은 방언은사를 독점하고 사유화하면서, 자기자랑의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방언은사가 교회에서 공익公益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일명‘사랑의 장’으로 널리 알려졌어요.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최상의 길’(hyperbole hodos)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스어 ‘후페르볼레 호도스’(고전12:31)는 ‘위없는 바른 길’(無上正道) 또는 ‘참 나를 찾는 길’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은 무엇을 뜻하나요? 사람들을 말로 사로잡는 세상적인 잡다한 지식입니다. 바울시대에는 소피스트Sophist들이 있었어요. 아테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지식인 집단을 일컫는데요. 뛰어난 궤변을 늘어놓아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었지요. 아무리 화려한 언어나 지식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할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에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없는 지식의 공허함을 말하고 있어요. 이미 야고보서에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라고 말하고 있어요.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언, 신비체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바울은 이러한 영적 체험 자체의 쓸모 없음(無用性)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허나 그것들을 절대화하거나 거기에 갇히게 될 때가 문제가 됩니다. 사랑의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예언, 영 체험, 믿음은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는 머물지 않으셨어요. 제자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하산下山하셨어요(마17:1-9). 갈릴리 시골 저자거리로 가셨어요. 갈릴리 농촌의 사회적 소수자들social minorities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동반자partner로 사셨어요. 이와 같습니다. 영적 체험이 깊을수록, 자기가 체험한 그 자리에 머물러있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영성은 사회적 영성(social spirituality)입니다. 바울은 체험한 영pneuma의 열매는 무엇인가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실함, 온유, 절제”(갈5:23)입니다. 사회적 영성의 실천이‘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나’를 찾는 최상의 길(후페르볼레 호도스)임을 바울은 말하고 있어요.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대승불교의 윤리강령으로 육바라밀(六波羅密)이 있어요. 그 중 첫째가 보시바라밀입니다.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이지요. 거저 주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최상의 길(후페르볼레 호도스)는 이러한 무상보시無相布施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보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요. 물질로 베푸는 재시(財施)가 있고요. 진리를 가르치는 법시(法施)가 있습니다. 심리적인 불안이나 공포에서 해방시켜주는 무외시(無外施)가 있어요. 보시를 베풀 때에는 베푼 사람과 받은 사람과 베풀고 받은 것이 있어요. 베푼 사람(施者)은 베풀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고요. 받은 사람(受者)은 받았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주고받았다는 생각 없이 주고받을 때, ‘참 베풂’이 됩니다. 이를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요. 목숨을 바쳐 자기희생을 치른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해요. 좋은 일을 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되나요? 자기의自己義에 빠지게 됩니다. 노자는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를 말했어요. 공을 이루었으면 그 자리에 미련을 두지 말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 자리에 머물지 않을 때(夫惟不居), 그 공이 오래토록 떠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是而不去).(노자2장)

지식, 영적 체험, 선행에서 사랑이 결핍되면 어떻게 되나요? 나의 지식, 나의 영적 체험, 나의 선행이 됩니다. 그 은사들은 내 자랑이 되고 내 공로가 됩니다. 나 개인의 소유가 되고 말지요. 사유화된 은사들을 바울은 무어라고 하나요? 울리는 징과 꽹과리처럼 공허할 뿐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는 사랑의 공적속성公的屬性에 대해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13:4-7)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15가지 아가페의 속성은 사회적인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이지요. 동양사상의 기본윤리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너그러움, 친절함, 원한을 품지 않음은 인仁의 범주에 들어가고요. 시기하지 않음, 뽐내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무례하지 않음,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음, 성내지 않음, 모든 것을 견딤은 예禮의 범주에 해당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공분公憤은 의義의 범주에 들고요. 진리를 기뻐함, 생명의 지탱, 보호는 지智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믿음, 희망은 신信의 범주에 해당하지요.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지요. 나의 확장입니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하고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를 이롭게 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지요. 나와 남이 둘이 아님(自他不二)을 깨닫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자세로 사는 것이지요. 예수는 이웃사랑을 넘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무슨 뜻인가요?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경계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수에게서도 자기의 또 다른 모습을 본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데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요. 나와 우주 만물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이지요. 십자가 사건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보여준 사랑의 극치 사건이지요.

에고ego의 세계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어요. 영적인 나이가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지요. 내 옆에도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될 때,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되고요.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 때, 영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아가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깨닫고요. 나 아닌 것에서 나를 찾아가는 수행의 길입니다. 이웃, 공동체, 사회, 인류, 세계에로 끊임없이 나를 확장해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가페를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으뜸가는 길’(후페르볼레 호도스)이라고 하고 있어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승리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지는 것이 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고요.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 역설적인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분법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분법적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 아님을 보아야 하고요. 나와 이웃이 둘이 아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에고ego에서 해방될 때, ‘참 나’를 찾게 되고요. 나 아닌 것을 나로 삼아 살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사랑의 장’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믿음(pistis), 소망(elpis), 사랑(agape),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고전13:13) 믿음이나 소망은 무엇인가요?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라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은 이와 다릅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요. ‘지금 - 여기’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으로 끝이지요. 과정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러한 아가페를 최상의 길로 삼고 있어요. 이러한 최상의 길을 가는 여러분이 되길 빕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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