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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냄새 “쌀밥 줘!”<이해학 칼럼>
이해학 목사(주민교회 원로목사) | 승인 2015.02.22 11:30

   
▲ 한때 내가 태워먹었던 고향 당산나무

나는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약속도 잘 잊어먹는다. 어느 때는 주례 맡은 걸 잊어먹기도 했다. 그런데 어릴 때 일은 이상하리만큼 기억은 많이 남아 있다. 기어서 상을 부여잡고 처음 일어섰던 기억, 방에서 마루로 기어 나와 마루 끝에서 토방으로 굴러 떨어져 얼굴이 깨진 기억, 검고 지저분한 시골집 천정을 쳐다보며 갖가지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삼촌 손바닥 위에서 ‘섬마섬마’를 할 때 느꼈던 짜릿함은 지금도 새롭다. 기어 다니다가 어른들 손을 잡고 일어서지만 손을 놓으면 금방 쓰러졌다. 지푸라기를 쥐어주면 한참씩 서 있어 어른들 박수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가 ‘눈깔사탕’을 문지방에 놓고 깨서 내 입에 넣어 줄 때 입 안 가득 퍼졌던 향기는 지금까지도 다른 데에서 느낄 수 없다. 한손에 사탕을 주면 받아들었다가, 다른 사탕을 주면 가진 것을 버리고 받았다. 몇 번을 반복해도 똑같았다.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욕심 없는 놈이라며 신기한 듯 나를 실험한다. 나는 오히려 당연한 것을 어른들은 왜 신기해할까 궁금했었다.

어느 해 여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할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자장자장 우리 애기 잘도 잔다.” 하시는데 내가 처마 밑을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 질렀다. 거기에는 제비집이 있고 새끼제비가 노란주둥이를 벌리고 짹짹거리고 있다. 커다란 구렁이가 지붕에서 내려와 제비집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어린 생각에도 구렁이를 쫒아내어 새끼제비들을 살리기를 바랐다.
할머니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문을 외웠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그 뒤에 들은 말들을 상기하면 “축생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돌아가 주시옵소서. 조용히 정토로 돌아가소서,” 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동네 보살이셨다. 사람들이 아프거나 송아지를 잃어도 할머니께 와서 <가새점>(가위를 실에 매달아 들고 물그릇 위에 세워 주문을 외우면 가위가 돌기 시작한다)을 하고 처방을 받고 돌아갔다.

이웃집 사촌형이 장가를 들어 새색시가 들어왔는데 예뻐 보였다. 울타리 너머로 색시가 물동이를 이고 가거나 장독대에서 된장 뜨는 모습이 신기했다. 나는 우리 마당에서 새색시가 잘 보이도록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길 한가운데서 그 형수와 만났다. “아제, 몇 살인데 그렇게 아랫도리를 벗고 꼬추를 흔들고 다니믄 챙피하지도 않소?” 벼락같은 말을 듣고 나는 집으로 줄달음을 쳐 어머니께 가서 “어무이! 나 바지 줘! 챙피하단 말이야.” 창피란 말을 처음 들었는데 그 의미를 알 듯했다. 나에게 “창피함”을 가르쳐준 그 ‘아줌씨 가능골댁’이 고향에서 늙어가고 있다. 지난번 방문 때는 당신이 손수 농사지은 깨를 정성스럽게 싸주었다.

옆집 동갑내기 봉선이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아랫집에는 연봉이. 우리는 학교를 오가며 섬진강에서 벌거벗고 징검사리(징게미)를 잡았다. 그때 거기가 ‘에덴’이었다.

그 시대 애들 너 댓 살까지 바짓가랑이가 터진 옷을 입었다. 나도 터진 바짓가랑이 옷을 입고 우리 집 타작마당을 뛰어다니다가 발동기 손잡이에 바짓가랑이가 걸려 넘어졌다. 돌아가는 바퀴에 머리를 찧어서 피가 흐르고 응급조치로 된장을 바르고 다음에 머리카락을 태워 붙였지만, 차오르는 고름을 막을 길이 없었다. 두려운 표정으로 뼈가 보인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또렷이 떠오른다.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마이신’을 몇 알 얻어왔다. 그것을 먹고 나니 신기하게도 고름이 잡히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지금도 내 머리에는 죽음을 이긴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약을 먹을 때도 페니실린을 발명한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경께 감사한다.

나는 몸이 무척 약했다. 한 살 무렵 수두를 심하게 앓아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한다. 온몸에 습진이 나고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웃집 어른이 어머니께 “어이, 이 사람아. 서운해 하지 말고 듣거라. 아깝지만 포기하소.”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고 나는 살아났다. 해가 환하게 떠오르는 태몽을 꾼 어머니는 아들이 살아날 것을 믿었다. 그 징표로 내 몸에는 곰보자국을 가지고 있다.

내 몸에 대한 내 기억은 우울하다. 봄에는 봄을 탄다고 밥을 못 먹고 여름에도 역시 못 먹었다. 겨우 가을에 밥을 먹는 병에 시달렸다. 학질로 딸꾹질을 쉬지 않고 할 때 나를 바위에 밀어뜨리는 공포감으로 치료하려고 시도 한 적이 얼마였던가. 어른들은 자라가 들었다고 하고 할머니는 나를 없고 동네 침쟁이한테 가서 침을 맞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침쟁이는 비듬이 더덕더덕한 자기머리에다 침(針)을 문질러 콧김을 쏘인 후 사정없이 내 몸에 침을 꽂았다.  다음에는 쇠침쟁이(소에게 놓는 침)한테 갔다. 기다란 침을 꽂으면 다리 이쪽에서 저쪽까지 침을 꿰뚫었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5 리도 넘는 <무수리>까지 가서 침을 맞았다. ‘너삼’이라는 소태같이 쓴 약초를 강제로 먹이는 무지막지한 어른들 앞에 나는 무력한 벌래 같았다. 

할머니는 1년에 한 번씩은 단골무당을 불러 점치고 굿을 하였다. 무당은 해마다 같은 레퍼토리를 읊어댄다. “이 애야말로 조왕님이 맘먹고 보낸 보물 같은 애 아니더냐? 놓으면 깨질까 안으면 날아갈까? 그런데 어찌할까나, 산으로 가면 호랑이가 있고 물로 가도 물귀신이 기다리고 있으니. 나무 위에도 절대로 오르면 안 되느니라.” 그래서 할머니는 늘 나를 치마꼬리에 달고 다녔고 잠시 안 보이면 동네방네 소리쳐 불러댔다. “해불개 야! 해불개 야!” (해불개는 할머니가 붙인 내 호칭이다) 할머니 목소리는 유난히 커서 사람들은 “당숙모 또 시작하셨구먼.” 하였다.
우두주사를 맞는 날 나는 측간으로 숨었고 결국 네 사람의 어른들이 나를 떼어 매고 가서 강제로 주사를 맞았다. 그래서 내 팔뚝에 우두자국이 길게 그어졌다. 나는 고통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아프면 엄살이 심하다고 아내한테 핀잔을 듣곤 한다. 운동권에서 나에게 비밀스런 임무를 맡기지 않아 다행이고, 잡혀 심한 고문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일 비밀을 추궁 받아 고문을 받았다면 나는 금방 다 불었을 것이다. 나는 순교자를 존경한다. 나는 몸에 못을 박거나 불에 화형을 시킨다면 틀림없이 배교할 것이다. 그리고 믿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투사라고들 하거나 영웅같이 대한다. 그러나 나는 실상 겁 많고 유약하기 짝이 없다.

개구쟁이 노릇을 할 때도 있었나 보다. 보름에 불놀이하다가 불똥이 볏짚에 옮겨 붙었는데 하필 당산나무에 옮아붙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불을 껐지만 한쪽 큰 가지가 타 버렸다. 당산나무는 온 동네 어른들의 유일한 쉼터이다. 매미소리 들으며 우리는 자치기를 하고, 중년은 고누나 장기를 두기도 하고 노인들은 잠을 잤다. 이런저런 동네 의논은 이곳에서 다 했다. 어떤 때는 격한 논쟁을 하기도 하였다. 어른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또 아이를 기르는 교육의 장이다. 내가 그런 당산나무를 태웠다. 어떤 벌을 받을지 애태웠는데 의외로 벌은 심하지 않았다.

설 전에 이웃에 음식을 돌리는 심부름에 신이나 있다. 눈 내린 골목길을 돌아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날 때 까만 두루마기 안쪽이 색깔이 좋아 뒤집어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 뒤를 따라 가는데 아버지가 너무 커 보였다. 처음에는 먹는 것이 좋았으나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요즘같이 세뱃돈을 주는 일은 없었다. 집집마다 떡과 조청, 한과와 엿, 곶감이 어찌나 맛있던지 몇 집 안 가서 배가 불러 힘들었다. 단오에는 동네 앞 ‘핑경다리’ 밟기를 하는 여인들 뒤를 따라 다녔다. 보름달 아래에서 처녀들이 손을 잡고 큰 원을 그리며 ‘강강수월래’를 부르는 것은 환상적이었다.

네 살인지 다섯 살인지 정확치 않지만 분명하게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밖에는 바람이 몹시 부는 겨울이었다. 어른들도 호롱불 밑에서 길쌈을 하고 잠을 자려고 하는 늦은 시간이었다. 나도 전혀 예상하지 않은 사건이 터졌다. 내가 갑자기 “쌀밥 줘!”하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에는 나에게 겁을 주었다. 망태할배가 온다든지 문둥이가 아랫마을에 나타났다는 등. 그러나 나는 막무가내로 악을 썼다. “쌀밥 줘!” “야 이놈의 자슥아! 이 밤중에 묵고 죽을래도 없는 쌀밥을, 어른도 못 잡수시는 쌀밥이 어디서 나온다고 그렇게 떼를 쓰냐?”고 달래기 시작하였다.
왜 그런 도발을 했는지 지금도 이상하다. 그냥 쌀밥이 간절히 먹고 싶은 것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듯했다. 절체절명의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악다구니였을 뿐이었다. 할 수 없이 어른들이 두런두런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아새끼가 죽는 것보다야 낫제.” 할머니의 결론이 끝난 것 같았다. 나는 쌀밥이 나올 거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방 가운데 말을 엎고 그 위에 됫박을 올리고 아버지가 그 위에 올라서서 방 천장에 매달아 둔 종자 나락을 내렸다. 나는 누워서 울음을 그친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씨 나락 포대 위에 앉아있던 먼지가 주먹만 한 솜덩이가 되어 눈같이 내렸다. 매일 쳐다보는 천장에 내년 농사를 위해서 묶어 달아놓은 벼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어쨌건 그 밤중에 도굿대(절구공이)로 벼 찧는 소리가 들리더니 화롯불 위 투가리(뚝배기)에서 쌀밥이 끓는다. 나는 그 냄새를 잊을 수가 없다. 나에게만 주는 쌀밥을 어떻게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게 고향 냄새는 쌀밥 끓는 냄새이고 지금도 그 장면이 떠오르면 나는 그 냄새를 맡는다. 나는 이 냄새 이 사건까지를 잠시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74년 긴급조치 1, 2호로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안기부 조사 후 서울 구치소 독방에 수감되었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와 외로움과 공포에 시달리며 밤을 뒤척이고 있을 때이다. 어제 저녁 군둥이 하얗게 핀 오경 찬(교도소에서 의무화된 다섯 가지 찬)과 거의 꽁보리밥에 콩 드문드문 박은 ‘가다밥’(틀에 찍어 나오는 밥)을 멀건 된장국에 말아먹고 제자리 뛰기를 하였더니 배가 쭐렁쭐렁 출렁인다.
국을 다 먹고 나면 까맣게 탄 모래가 법자 식기(식기 밑바닥에 ‘法’자가 새겨있어 그렇게 부른다) 바닥에 깔린다. 죽일 놈들 연탄재 밭에 무 배추 심어 뽑아다가 씻지도 않고 그대로 된장국에 밀어 넣어 퍼온 것이리라. “밥이라도 좀 살게 주지” 하고 혼자 말을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문득, ‘고향 쌀밥’이 떠올랐다. 그 사건 그 냄새를 되찾은 것이다. 내 나이 서른이 넘어.
그때부터 나는 변하였다. 교도소 기록에는 늘 문짝을 차고 난동을 부리는 요주의 재소자로 기록되어 있다. 간첩들 빨강 표식과 구별하여 정치범에게 노랑 표식을 단 것은 이해했다. 함석헌, 천관우 저서의 책도 안 넣어 주고, 침낭을 안 받아 주는 것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행형법에 엄연히 재소자 운동을 시키도록 되어 있는데, 운동도 없이 가두어 놓기만 하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항의했다. 짧게나마 운동이 허용되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음식은 부정을 해먹더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을 주어야 한다.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위해 문짝을 차고, 고함을 질러 막힌 담에 소통의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교도소에서는 나를 어떻게 보던지 나는 맹인 거지 ‘바디메오’ 같이 문을 두드리고 두드렸다.

내 고향은 가난에 찌든 동네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동네에 상을 당하면 살림을 멈추고 다 나와서 내 일 같이 돕는 곳이다. 돈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조상들 제사에는 정성껏 상을 차렸다. 내가 고향을 생각할 때면 온 동네 아낙들이 모여 삼이나 누에를 잣는 길삼을 할때 나를 세워놓고 춤을 추게 하고서는 환하게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고향에 대한 회상만으로 도 생명감이 솟아오른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어른에 대한 공경을 심어준 곳이다. 이 자긍심이 내가 살아가는 밑천이자 용기의 진원지였음을 깨닫는 것도 세월이 다 지나간 뒤이다.

어느 해인가 둘째 미파가 성남시 전체에서 글짓기에 당선되어 상을 받아왔다. 제목이 <고향>이다. 내용은 엄마 아빠는 고향이 있는데 자기는 고향이 없다는 것이다. “도시도 고향이지......” 하였지만 미안함이 살아났다. 그렇다 시골의 고향은 커다란 영혼의 숲 같은 곳이다. 고향은 풍성한 생명력이 함축된 곳이다. 지금은 자연과 어우러진 땀과 수더분한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향이 무너졌다. 도시만이 아니라 시골까지도 상실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에게는 ‘고향,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를 노래한 정지용은 변해버린 고향에 실망하면서도 <향수>에서마냥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으리요.’하는 이중성이 있다. 사람은 한번쯤 마음 놓고 “쌀밥 줘!” 악을 써도 들어줄 가슴이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고향이 아니라 지향하는 고향을 향해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있다.

   
▲ 내 고향의 앞과 뒤 풍경이다.

1990년 독일 베를린에서 남북해외 통일회담을 하고 원주교도소에서 1년6개월 징역을 살 때에 <봄 쑥을 뜯으며>라는 시를 썼는데 노동가수 김성만님이 거기에 곡을 붙여 지금도 애창곡으로 부르고 있다. 어느 해인가는 일본 평화 콘서트에서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날마다 얇아지는 연한 손끝 사이로/ 봄쑥을 뚝뚝 자른다.
검게 물든 쑥물 진한 향기에 잠 깨어나면/ 누이 따라 나섰던 보리밭 일렁이던
초록색 파도가/ 아직도 내 귓가에 살아 숨 쉬는데/ 손잡고 맴돌던 강강술래와 같은/ 돌아갈 고향은 멀기만 한데/ 쑥 내음 맡으며 흰 구름 벗 삼아 넋이라도
내 갈 길이여/ 긴 세월 나아가리라/ 혼자서는 죽어도 못갈/ 강강술래 이루어 내는/ 진한 쑥물 같이 살리라/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마지막 돌아갈 고향은 정토이고 새 하늘 새 땅이다. 거기는 혼자서는 죽어도 못 간다. <강강
수월래>를 부르듯 춤추며 함께 가는 것이다.

이해학 목사(주민교회 원로목사)  hebulg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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