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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咸錫憲)과 장준하(張俊河), 그 이질(異質)의 짝 2<문대골 칼럼> 역사를 위해 선택된 제물(祭物) 장준하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2.26 11:53

장준하, 로자를 신부로 맞다

1943년 11월, 2학년 학기말을 앞두고 귀국한 장준하는 양가 어른들의 의사, 주변의 이론(異論)에 아랑곳없이 로자와의 결혼을 서둘렀다. 로자, 지금도(2015.2.25.) 장준하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그의 아내 김희숙(金熙淑, 88)이다. 지금 장준하의 머릿속엔 아버지 장석인(張錫仁)과 로자 생각뿐이었다. 장준하가 유년시절 자랐던 삭주(朔州) 심산유곡의 마을 대관리(大館里)교회 목회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일경의 감시 하에 있는 아버지.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자신이 자원해서 일군에 입대하는 길뿐이라고 확신한 장준하는 귀국하자마자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였다.

   
▲ 1944년의 장준하
정말 어렵게 이루어낸 동경유학길을 팽개치고 귀국하더니 양가의 어른들이나 주변의 의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홉 살이나 아래인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아이와 결혼한다며 우겨대는 장준하의 소위를 못마땅해 하던 주변사람들도 그의 굳은 결의를 동의해갔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로자는 이러쿵저러쿵 전혀 말이 없었다. 로자의 어머니는 특심 있는 가톨릭 신자로 그의 본명은 노선삼(盧仙三), 교명은 비리스다였다. 비리스다는 로자와 둘이서만 앉은 자리에서 딸의 생각을 조용히 물었다. “로자야, 네 생각을 사실대로 말해 보거라. 나는 네 편이야. 네 결심이 있다면 이 어미가 거둘게야. 어디 네 말을 좀 들어보자.” 로자는 이미 장준하와 모든 계획의 진행을 함께 하고 있는 터였다. 장준하가 동경에 유학하고 있는 3년 간 이미 계속해서 서신을 주고 받고 있는 사이었고, “선생님은 무슨 일이거나 한번 결심을 하면 주위의 여론에 관계없이 오직 그 일 하나를 위해 전신을 바치는 분”으로 확신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나를...”, 로자는 내심으로 감격하는 터였다. “어머니. 저는 선생님 하시자는 대로 하고 싶어요.” 했다. 어머니 비리스다의 결심으로 장준하의 로자와의 결혼식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1943년을 보내고 1944년 1월 5일 장준하는 드디어 로자의 신랑이 된다. 더 후는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이제는 로자의 신변만은 안심이 되었다. 일본의 패전이 짙어지면서 징병과 위안부의 강제모집이 성화같았다 해도 아직까지 결혼한 여인들의 경우 강제모집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장준하는 상황이 벽에 부딪혔을 때, 그 벽을 뚫어 길을 내는 특이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장사장, 그이 참 무서운 이지. 그저 일을 내는 이야!”

1965년 8월, 함석헌은 한때 그의 꿈이었던 <공동체 도장> 안반덕(安盤德,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소천리) 씨 농장을 찾았다. 자신은 무슨 “참회할 일이 있어서였다.”고 했지만 역사는 그의 참회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농장을 찾아올 때는 한동안 머물면서 농사도 돕고 ‘속’도 치유하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그런데 역사는 그걸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 6월에는 그토록 격렬한 시비들의 저항에 도쿄에서 기어이 한일협정이 조인되었고 며칠 전엔 국회에서 월남파병 동의안이 의결 되는가 했더니, 대학생들의 격렬한 대일굴욕외교저지 데모를 제압하기 위해 서울지구에 위수령이 발동(1965.8)되었다. 그래서 서울 상황이 다급해졌다며 빨리 서울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언자는 장준하, 함석헌을 모셔가기 위해 차를 몰아 강원도 고성까지 달려온 이는 당시 현역 의원 손주항이었다.
아랫마을 소천리에 차를 대놓고 마을주민과 함께 올라온 손주항의 독촉은 가히 사경에 이른 사람 같았다.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선생님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장준하 사장 속이 타들어가고 있을 겁니다. 어서 출발하셔야 합니다.” 옆에 있던 일꾼 중 하나가 “아니, 선생님 모처럼 좀 쉬시려고 오셨는데, 아니 장준하 선생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바로 이어 함석헌의 답이 이랬다.
“야, 장 사장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마라. 그 사람은 일을 내는 사람이야. 참 무서운 이지...” 함석헌이 손주항과 함께 농장을 떠난 후에 그 일꾼은 이렇게 말했다.
“에이, 선생님은 그저 장 사장이라면 꼼짝을 못하신다니까...”
선생님 오셔서 한동안 게시겠다 해서 속으로 너무 좋아했는데 오시자마자 솔개 닭 채가듯 이게 뭐야 그래... 그는 몹시 섭섭해 했다.

1944년 1월 20일 결혼한 지 꼭 2주 후, 장준하는 일군에 입대한다. 평양에 주둔해있는 일본군 제42부대에서였다. 징집된 조선인 학생 200여 명과 함께였다. 지휘관의 명에 따라 일군이 되는 절차를 밟았다. 먼저 입고 온 사복을 모두 일본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일본군 2등병>의 계급장을 달았다. 이제 조선의 청년 장준하는 없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대로는 예외 없이 일본병사였다.
준하의 심정은 묘했다. 상상조차 못한 것은 아니다. “허-, 내가 일군이라니...” 그러나 장준하는 일군에 입대하면서 아버지에게는 이 말만은 닫아두었다. “나는 일군에 입대, 무슨 일이 있어도 중국 주둔 일군부대에 배치될 것이며, 그러면 곧바로 탈출하여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갈 것입니다.”라는.

장준하 정신

   
▲ 일군군복을 입은 장준하
제42부대에 입소한지 20여일쯤 후, 부대 안의 신병들 간에 ‘이번 입대한 신병정원이 중국의 강소성(江蘇省) 북부에 위치한 서주(西州)로 이동배치 된다.’는 소문들이 자자했다. 장준하는 회심의 미소를 홀로 지었다. “옳거니, 때가 오는 거다!” 했다. 서주로의 배치가 공식화된 때, 때맞춰 아버지와 어머니, 로자까지 함께 준하의 면회를 왔다. 준하는 아주 조심스레 중국에 배치되면 이후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한마디 답이 없었다. 그러나 장준하는 입을 굳게 다물고 부동의 자세를 견지한 채 서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분명한 동의(同議)를 읽을 수 있었다. 로자에게만은 일군입대 의사를 밝히던 처음부터 “입대한 후 반드시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군부대로 가게 될 것이며, 중국주둔 일군부대에 배치되면 바로 탈출해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군을 찾아갈 것이다. 내가 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성경 한 구절을 써 보낼 것인데 그러면 내가 일군을 탈출한 줄 알라.” 해둔 터였다. 

그 밤. 장준하는 뜬 눈으로 새었다.
“아, 서주”, “상해임시정부”, “아, 독립군!” 아직 땅거미가 가시기 전 부대의 기상나팔 소리에 맞춰 자리를 차고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일을 시작해야 한다.
서주로의 이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장준하는 한 거대한 싸움을 벌려야 했다. 일본군 군의관의 집도(執刀)에 동상이 든 왼쪽 엄지를 마취제도 없이 내어주어 다섯 번씩이나 칼질을 하게 하면서도 조선청년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꼿꼿한 자세로 견뎌내어 일군군의로 하여금 혀를 두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장준하 정신(張俊河 精神)>이다.

서주로의 이동이 내일일는지, 그 다음 날일는지 다시 또 그 다음 날일는지 알 수 없지만, 이동이 있기까지는 <여기서>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한다. 장준하가 소속한 제42부대엔 1개 중대에 기마대가 있었고, 장준하는 이 기마들의 마굿간 청소, 기마들의 보호가 그 주임무로 주어져 있었다. 사실 장준하의 아픔은 동상이든 손가락 수술의 인고(忍苦)가 아니라 주어진 과제와의 싸움이었다. 장준하에게는 장준하만의 종교가 있었다. <삶(生)의 계약>이었다. 장준하에게는 나이보다는 훨씬 장중한 생의 의미의 추구가 있었다. 적어도 자신은 <하나님과의 게약의 삶>을 사는 이었다는데서 하는 말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삶의 사람>이었다. 이점에서 그는 “생은 명(命)이다.”한 함석헌을 그대로 빼낸 사람이었다. 함석헌도 장준하도 ‘삶’의 존엄을 믿었고 지켜가는 사람이었다는데서 지극한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장준하는 마구간의 마분을 치우는 데서도 물론 정성을 드렸지만, 말의 생명을 다루는 데는 그야말로 지성을 기했다. 말의 전신을 정성스레 솔질하고 특별히 말의 발굽을 씻어내는 일에는 더욱 그랬다. 생명을 다룬다는 생각에서였다. 마구간의 청소, 말발굽을 씻어내는 일, 이런 모든 일에 사용되는 대량의 용수들이 다 얼음을 깨 퍼 올려 쓰는 물이었다. 그의 수기 돌베개에서 그는 그렇듯 열중하는 자신을 향해 “일군에 대한 임무충실은 조국에 대한 배신인가?”하고 묻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장준하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같은 자세로 계속한다. 장준하는 장준하 자신에게 하늘이 준 그 삶으로 국가라는 한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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