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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의 철저한 몰락<정현진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⑬-2> 출애굽기 11장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 승인 2015.03.03 14:42

이번 <정현진 목사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열 세번째 순서는 분량상 세 차례에 나눠서 싣습니다. - 편집자 주

하나님은 열한 번째 표적을 예고하셨다. (11:4) 이 부분은 나중에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화법으로 전할 때 즐겨 썼던 코 아마르 야ㅎ웨 (=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말씀하셨다)란 문구로 시작되었다. 그 내용은 ‘내(= 여호와)가 이집트의 한 복판을 통과하리라.(직역)’ 이다. 여기서 ‘통과하다, 나가다’는 말(야차 acy)은 출애굽에 사용되는 단골 용어 셋 가운데 하나인데, 개역개정성경에는 ‘들어가다’로 옮겨졌다. 우리말처럼 ‘들어가다’는 뜻이 되려면, 동사 ‘보’ (awb)가 쓰여야 하는데, 여기에는 그 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도 강력한 표현이 쓰인 것이다. (출 11:8에 같은 동사가 두 번 쓰임) 5절은 ‘보좌에 앉은 바로왕의 장자로부터 두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에 이르기까지’라는 표현으로 이집트 땅(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다 이 표적에 해당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쓰인 뻬코르(rAkB.)란 말은 i) 첫 번째 자녀(맏이) 또는 동물의 맏배, ii) 식물의 첫 열매, iii) 가장 뛰어난 것 등을 가리킨다. 이 낱말에는 성의 구별이 들어있지 않다. 우가릿 말(bkr)에서 이것은 아들에게 뿐만 아니라 딸에게도 쓰인다(HALOT). 만일 이것을 ‘장자’라고 옮긴다면(개역개정, NIV first son), 딸만 둔 이집트 가정은 이 표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계획과 다른 것이므로, ‘맏이(공개 firstborn) 처음 난 것(표준)’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Dozeman, Stuart). ‘파라오의 맏이부터 몸종의 맏이까지’ 란 말은 이집트 국민 전체가 다 해당된다는 뜻이다(merism).

가축이란 말(뻬헤마 hm'heB.)은 넓게는 짐승 전체를 가리키고, 좁게는 집가축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는 재산의 피해뿐만 아니라, i) 사람이나 동물이 다 하나님의 표적 안에 포함됨으로써 하나님 심판의 엄정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ii) 이집트에서 각종 동물이 신으로 숭배되었으므로 우상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집트 전역에 내린 이 열한 번째 표적은 무엇보다도 우선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키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강력하게 표현한 것이다. 더 나아가 우주만물과 나라(민족)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런 사실을 적시하려고 출 11:5-6에는 전체(모두)를 가리키는 말( lKo)이 세 번이나 되풀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6절의 이집트 ‘온’ 나라(땅)에 임할 ‘큰’ 부르짖음도 이 표적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전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강제노동과 억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출 3:7), 이제는 이집트 백성이 크게 울부짖게 된다는 것이다(시 107:6, 28 참조). (큰) 부르짖음(개역개정, 표준, 공개: 큰 곡성)이라 한 말(챠아크)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고통(시련)에 절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장자(맏배)의 이 죽음은 우박, 흑암에 이어 이집트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 번째 사건이 될 것이다(출 11:6).

성경은 5절에 이어 7절에서도 ‘민 ... 아드’ (!mi ... d[; = 사람으로부터 ... 그리고 짐승에게까지)의 화법을 사용하여 이집트에 엄청난 표적이 임하리라고 예고하였다. 이집트인과 그 소유물에 이렇게 철저히 해당되는 피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전혀 미치지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지역에서는 개들도 그 낌새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아주 조용히 넘어간다는 것이다: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로 예헤라츠 켈레브 레쇼노)은 후각과 청각이 유난히 발달하여 조그마한 소리나 변화에 민감한 짐승인 개에게 조차 모르고 (짖지 않고) 지나갈 만큼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고요와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파리 표적(출 8:22), 가축의 질병 표적(출 9:4), 우박 표적(출 9:26), 흑암 표적(출 11:23) 등에서 이미 하나님은 이집트인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를 구별하였지만, 이번에는 더욱 더 세심하게 배려하셨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표적들 중에 이런 구별(구분)은 그 자체가 또 다른 표적이었다(출 8:23; 9:4 참조).

   
▲ 맏아들(황태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파라오 부처
모세와 아론은 이 표적이 일어난 후에 파라오와 그 백성이 보여줄 반응까지 미리 예고하였다(출 11:8). 여기서 모세는 ‘나에게’라는 표현을 두 차례나 쓰면서(yl;ae 엘라이, yli ) 이집트에서 지고의 존재인 파라오와 그 신하들이 직접 자신을 찾아와 절까지 할 것을 강조하였다(출 7:1; 11:3 참조). 그리고 모세와 아론은 심히 노하여 파라오에게서 물러나왔다. ‘심히 노하다’는 말(뻬호리 아프 @a;-yrIx\B')은 열을 내다, 불이 붙다는 말(하라)에서 온 호리(신 29:23; 사 7:4)와 성내다 화내다는 뜻의 아네프(@na)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이 합쳐져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어찌할 줄 모르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창 39:19; 신 9:19; 합 3:8). 그래서 RSV는 분노로 얼굴이 뜨거워져(in hot anger; NIV - hot with anger)로, LB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져(red faced with anger)로 옮겨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그동안 모세가 여러 차례 파라오를 대면하였지만, 이렇게 분노를 터뜨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개인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그가 끝까지 완악하게 고집을 피움으로 인해 생겨날 수많은 희생에 대한 분노라 할 것이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여러 차례 기회를 주셨다. (V. Hamilton, 174)

1. 모세가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출 8:8[4], 28[24]; 9:28; 10:17)
2. 파라오의 마술사들의 입을 통하여 (출 8:19[15])
3. 파라오의 부분적으로 순종하게 하심으로 (출 8:8[4], 25-28[21-24]; 10:24)
4. 파라오가 부분적으로 회개하게 하심으로 (출 9:27; 10:16)
5. 파라오에게 10 차례나 기회를 계속 부여하심으로
6. 파라오의 측근 신하들의 말을 통하여 (출 10:7)
7. 몇몇 표적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피해를 보지 않게 구별하심으로.

출 11:9이다:

개역개정 표준새번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아직도 더 많은 이적을 이집트 땅에서 나타내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번역의 차이는 출 11:9b에 나오는 르마안 (![;m;l.) 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서 생겼다. 개역개정과 공동번역개정은 이를 ‘그러므로’란 뜻의 접속사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적을 더 일으키신다는 의미이다. 르마안의 뿌리를 동사 아나(hn[ = 대답하다, 응답하다)로 보면, 그 뜻이 달라진다. 그러면 이는 ‘...을 위하여, ...에 부합하여’라는 뜻의 전치사구가 된다. 이리 보면 르마안은 앞 문장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뒤에 나오는 동사 라바 (hbr = 많다, 늘다)의 전치사 연계형과 어우러져 원인, 목적을 나타낸다(표준새번역, ELB).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파라오가 너희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집트 땅에 내 이적들[모페트 tpeAm]을 많게 하기 위함이니라. (직역)” 이런 뜻으로 보면, 9절은 10절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물론 여기서 더한다(많게 한다)는 말은 단순히 숫자를 늘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적의 내용을 더욱 심화시킨다(확대시킨다)는 뜻이다. 출 11:10이다: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파라오의 태도는 열한 번째 표적의 파장이 엄청날 것을 예고하기 전이나 후에나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성경은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고 표현하였다. 출 9:12; 10:1, 20, 27에 나오는 이런 표현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낭패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이에 앞서 출 11:9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파라오가 그 누구의 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비록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렇다면 그런 파라오에게 남겨진 길은 단 하나 뿐이다. 철저한 몰락, 그것 밖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물론 때때로 내버려두는(방치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리라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슥 11:9)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8; 참조 1:24, 26)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출애굽기에서처럼 적극적인 활동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심판하는 방법으로 방치냐 적극적인 개입이냐를 판단하고 결정할 권한은 우리에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휴머니스트적인 당혹감과 낭패감을 넘어서서, 정의와 해방이 실현되는 과정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불의와 부패는 부드러운 권면 또는 단순히 때를 기다리는 방치로 제거되지 않을 때도 있다. 인간과 역사의 해방을 이루는 과정이 출애굽기 7-12장에는 매우 부정적 파괴적인 모습으로 기록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창조적인 부정이요, 창조적인 파괴이다. 진정한 평화와 정의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때로는 이집트(외국),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혹은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었다. 이를테면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 받는 장면을 보도하는 이사야서 6장이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부정한 입술과 심령이 용서를 받으며, 숯불을 통해 정화되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맡기셨는데, 그 내용이 참 이상하다:

9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9-10)

여기서 예언자 이사야는 자신이 사역이 거절당하는 곳으로 가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가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도록 그들을 더욱 완악하게 만들라는 것이다(die Verstockungsaufgabe). 하나님의 계획은 파라오의 마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그들의 마음과 태도에 매우 참혹한 징계를 내리는 것이었다: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1-12).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심판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와중에서도 남는 사람(그루터기)을 예비하셨다: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3)

마지막까지‘남은 자’인 그들은 거룩한 씨(씨앗)가 되어 새 역사를 만들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공동체를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았다. 여기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악해진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남은 자를 정화․단련시켜서 하나님 목적에 알맞게 쓰임 받을 그릇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만일 완악할 대로 완악해진 자들을 향한 심판이 없다면, 인류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도 좌절되고 말 것이다.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psalm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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