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970년대, 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국내의 정치범, 정치범들을 변호한 인권변호사 그룹, 해외 양심세력의 세 축이 지원과 협력관계로 이루어졌었다.

첫 번째는 물론 국내에서 역대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맨 몸으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다, 연행되고,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한 국내 민주 인사들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들 민주인사들을 변호하는 일을 통해, 이들이 독재정권과 싸울 수 있는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지속적인 투쟁의 원동력을 부여한 인권 변호사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변론으로 인하여 투옥되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분들도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룹이 국내 민주화 운동권이다. 이들의 대한 것들은 신문, 잡지, 그리고 자료집들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또 한 그룹이 있었다. 그것은 국내의 정치범들을 지원하고 격려해준 해외 양심인사들과 단체들이다. 나 자신도 1987년 9월에서 1992년 1월까지 <한국민주화기독교동지회>(이하 <민주동지회>) 동경 자료센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보고 들은 자료들과 이야기를 통해서 얻은 정보들에서 이들에 대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WCC(World Council of Churches)라든지 BFW(Bread for the World)라든가 <국제 앰네스티>(IA; International Amnesty) 등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듣고 있었지만, 당시 운동권에 팽배(澎湃)해 있던 반미. 반일 감정의 탓으로, 한국의 운동권 어느 누구도 그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 자신도 그들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 수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세 그룹의 줄탁동시(병아리가 부화할 때 안에서 병아리가 밖에서 어미 닭이 동시에 껍질을 깨는 행위)의 협력이 없었다면 그 강고(强固)했던 25년 군사 독재를 깨뜨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 민주화 운동권이 그 분들의 그 지원과 격려에 대해 알아야 하며 그들의 지원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당시 이사장; 박형규 목사)가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해외 민주인사 초청’ 사업을 통해, 그 중 일부를 초청하여,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하여, 그 분들의 은혜에 감사의 표시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그들에 대한 보은(報恩)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된다.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도 기록도 남겨 있지 않는, 그분들의 지원과 협력에 대해서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자료를 모아 정식적인 역사기록으로 남길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런 공식적 작업이 빠른 시일 내에 그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우선 나는 나의 4년 반 동안의 <민주동지회> 자료관장을 하는 동안, 내가 알게 된, 그들에게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기 위한 일들을 하고 싶었다. 보은(報恩)을 하려 해도 이미 세상을 떠버리신 분들도 많이 계신다. 생존해 계신 분들에 대한 보은(報恩)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아직은 구체적인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우선 개인적으로 그분들을 국내에 초청하여 ‘보은기행(報恩紀行)’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더 좋은 방안은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잊혀지기 전에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기록으로 남겨, 기억 하는 것을 그 분들에 대한 보은(報恩)의 일차적인 일로 하고 싶다. 그래서 이 기록을 시작하면서 이 글을  보은기(報恩記)라고 이름 지었다.

정보기관이나 경찰에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살았던 엄혹(嚴酷) 했던 우리 젊은 시대에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보신책(保身策)의 하나였다. 기록으로 남겨진 정보(情報)들에 의해 준비해 온 계획들이 사전(事前)에 누설(漏泄)되고, 엉겁결에 튀어 나온 말한 마디가 꼬투리가 되어 큰 사건으로 날조(捏造)되고 그에 따라 억울한 희생자(犧牲者)들이 만들어지는 그때에,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것들을 기억(記憶)에 의존(依存)하려 했다.

중요한 약속들은 임시방편적으로 손바닥에 써가지고 다닌다든지, 성냥갑 뒤에 기록해 두었다가, 체포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재빨리 손의 것을 지우거나 성냥갑을 버린다든지 하여 증거를 없앴다. 우선은 동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본인의 보신(保身)을 위한 경우가 더 많았었다, 한 번 자백(自白)하기 시작하면 또 다른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끝없는 고문이 계속된다. 그러므로 첫 고문이 아무리 무섭고 고통스럽더라도 참아내야 했다. 그러면 그들은 더 고문해도 얻을 것 없다고 제풀로 포기하고, 우리의 고통은 거기서 끝난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는, 몸에 베인 이 보신책은 자유의 공간인 일본에서도 버릴 수 없었다. 아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地雷)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철저히 그 원칙을 철칙(鐵則)처럼 지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에게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여기에 기술한 것들은 많은 부분이 내 기억에 의존되고 있다. 일시와 장소(場所)도 정확하지 않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史實)과 달리 왜곡된 것도 있을 것이고, 과장(誇張) 혹은 축소(縮小)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시 장소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랴!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베풀어졌던 그분들의 큰 은공(恩功)이 중요한 것이지! 나는 이 보은기(報恩記)를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 여겨지는 것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연대순을 무시하고 기술(記述)하고, 나머지 것들은 적절하게 그 전후(前後)에 배치하려고 한다.

나는 가능하면 모든 인사들을 실명(實名)으로 남기고 싶다. 그 결과 혹시라도 그분들에게 흠을 남기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의 기술(記述)들은 우리의 민주화 투쟁 가운데에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달성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그분들과의 관계에 국한(局限)되고 있다. 내가 받은 은덕(恩德)들은 내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민족·민중을 위한 한국의 운동을 위해 내게 베풀어 진 것들이라고 다시 한 번 부언(附言)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겨울 공화국’이라고도 하고 “민주주의의 퇴보”라고도 한다. 이런 정황에서 이 기록이 그 엄혹한 시절 같이 고생했던 동지들에게 추억의 한 편(編)이 되어도 좋다. 혹은 그 시대를 모르는 젊은이들이나 현 시국을 우려(憂慮)하는 분들에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지혜를 얻는데 참조가 되면 더 바랄 것 없겠다.

그러므로 이 기록을 ‘한국의 운동권-아니면 최소한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권-의 보은기(報恩記)’로 이름 하는 것을 양해해 주었으면 한다.

 1.권정인(權貞仁)씨-<한국민주화 기독교 동지회> 동경 자료센터

6월 민주 항쟁의 직전인 1986년 5월에 출국하여 1년 반 가까이를 독일에서 머무르며, 장기 체류를 위한 복수여권을 받아 1987년 9월 나리타(成田) 공항에 나를 마중 나온 사람들은 권정인(權貞仁) 선생과 메리 콜린스 양, 두 여성이었다.

권 선생은 재일 동포 2세로 30대 중반이었고 콜린스 양은 본국도 있었던 캐나다 선교사로 40대 초반이었다. 나리타(成田) 공항에서 2시간여 전철과 지하철을 두 번을 갈아타고 지하철 도자이션(東西線) 와세다(早滔田)역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일본기독교회관> 4층에 있는 열 평 정도의 사무실이었다.

간판도 없는 이 사무실이 <한국 민주화 기독교 동지회>라는 본국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단체의 <동경 자료센터>라는 곳이었다. 권정인 선생은 사방 벽에 자료로 가득 차 있는 이 사무실의 관장(館長)이 내가 맡게 되는 직책이라고 했다. 그녀는 이미 마련해 둔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역 근처의 월세 아파트로 나와 짐을 안내해 갔다. 아파트라 하지만 우리 개념하고는 달리, 다다미 6장과 4장의 방 두 칸 사이에 소파 1개 놓으면 겨우 오고 갈 수 있는 넓이의 거실 좌우로 부엌과, 목욕탕 겸 화장실이 붙은(이런 구조를 2DK라고한다) 전형적인 서민용 목조건물 2층이었다.

방에는 권 선생이 마련했을 침구 한 벌, 고타츠( 밑에 전구가 달린 난방 겸 다용도 탁자), 등 간단한 자취용 물품들이 갖추었다. 권 선생과 콜린스 양(나이는 나보다 서너 살 위이지만 Miss이었으므로 양이라고 부르겠다.)등 세 사람이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나는 나의 아파트에 돌아와 일본에서 첫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지하철 도자이 선 다카다노바바 역에서 와세다 대학 쪽으로 첫 번째 정거장인 와세다 역 부근에 있는 <일본기독교 회관> 내 사무실에 출근한 나는 권정인씨와 같이 사무실에 나온 이인하(李仁夏) 목사를 만났다. <민주 동지회> 일본 대표라고 했다. 이 목사는 당시 겉으로는 백발성성한 마음씨 좋은 7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 같은 분이었으나 실제로는 60대 초반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우선 나를 데리고 같은 건물 2층에 있는 < 일본 기독교 협의회(JNCC)> 사무실로 내려가 총간사(總幹事-<KNCC>로 말하면 총무)인 마에지마(前島) 목사를 소개했다. 40대 후반의 씩씩하고 명랑한 분이었다. 그리고는 권정인 선생과 콜린스 양과 나를 데리고 가까운 스시(생선 초밥) 집에 가서 점심을 같이 하면서 나의 업무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말하자면 오리엔테이션이었다. 일본어 공부와 비자문제 때문에 오전 중에는 일본어 학원에 가는 일, 오후에는 한국정세 분석을 하여 한 달에 한 번씩 ‘소식지’를 만드는 일이 내 업무였다.

권 선생은 내가 작성한 원고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내가 초벌 영역한 것을 콜린스 양이 교열(校閱)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작된 소식지(이것이 ‘월간 민주 동지’)는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영국, 스웨덴 등 <민주 동지회> 지부(支部)로 우송된다. 자신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점검하고 다른 모든 일은 권 선생이 도와줄 것이라는 오리엔테이션이었다.
 
셋째 날 권 선생은 신주쿠(新宿)역 근방에 있는 구청(區廳)에 나를 대동(帶同)하고 가서 외국인 등록을 하고, 다까다노바바의 내 자취집 근방의 일본어 학원(<센다가야 일본어 학원>)에 등록시켜 주었다.
 
제 4일째 날, 일본어 학원에서 첫 수업하고 돌아오니 권정인 선생은 지난 1년 간 ‘월간 민주 동지’ 한국어판, 일본어판, 영어판을 전 월호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2년 전부터 이 목사님이 어디선가 전달되어 온  한국어, 영어 원고를 자신이 일본어 번역하고, 콜린스 양이 영어 본을 교정하여 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년 전부터는 그것을 받지 못하여, 유학생 이종원(李鍾元;현 와세다 대학교 국제정치학 교수)씨가, 이전(以前) 것의 형식에 따라 소식지를 작성하여 영어 초벌 번역하였다고 비밀스럽게 이야기한다.

그 견본(絹本)들의 형식이 낯이 익어 그 이전 것을 살펴보니 어디에서 본 것 같은 낯익은 것들이었다. 다시 자세히 읽어 보니 <한국교회 사회선교 협의회>(<사선>) 의 간사 시절에 내가 작성하고 영역한 정세 분석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때는 그 용도를 알지 못하고 권호경(權浩景) 총무의 지시에 따라 나는 <사선>의 5개 분야(노동·농민·빈민·청년·학생·여성) 단체들의 활동 보고에 월간 정치 정세를 분석하여 총론으로 덧붙이고, 각 학교·노동·빈민·교회 등의 현장에서 발생한 그 달의 운동 상황을 정리하는 내용의 월간보고서를 작성하고 그 원고를 영역했던 것이다

그 문서들이 이곳 동경에 전달되어 ‘월간 민주 동지’로 변신되어 전 세계 <민주동지회>로 보내지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독일에서 장기 여권을 기다리고 있던 지난 1년 동안은 이종원씨가 대신 이 일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본국에서는 이름만 알고 있었지 전혀 면식(面識)이 없던 오재식 선생이 나를 동경 자료 센터 장에 지명하여 이 일을 맡기로 하였는가가 어렴풋이 감(感)이 잡히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오재식 선생이 1984년 경 <한국기독교 장로회 선교 교육원> 원장이시던 고(故) 서남동(徐南東)교수에게 영어에 능통한 운동권 기독학생 한 사람을 추천 해달라고 해서 서 교수께서 나를 추천해 주셨다는 것이다.

서 교수님은 1975년인가 케냐 나이로비 <WCC> 총회에 참석했다가 한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사건들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당시에는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당신으로는 대답을 못하여 큰 곤욕을 치렀단다. 그래서 나이로비에서 돌아오는 길에 곧바로 동경에 내려 한 달 가량 체류하면서, 자기를 <WCC> 총회에 추천한 오재식 선생의 사무실에서 지난 1-2년 동안의 신문들을 깊이 탐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서 민주화 운동들에 관해 애써 눈을 감고  연구와 교수 일에만 집중해 왔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 서남동 교수님은 <KNCC>의 민주화 운동 활동, 노동, 빈민, 학생운동 등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되어 마침내는 안병무 박사 등과 함께 민중신학자로 변신하게 된 것이란다.
 
오 선생은 서남동 교수를 형님으로 모시며 그의 민중 신학적 성찰의 결과물을 해외에 소개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서남동 교수님이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서 해직(解職)되어 <기장 선교교육원> 원장직에 계실 때,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재적된 학생들을 불러 모아 신학교육을 시켰던 ‘선교교육원 위촉생 과정’ 제 1기생으로 들어가서 교수님과 학생들 몇 명과 노만 고트왈드(orman Gottwald) 저서 “야웨의 부족들”(the Tribes of Yahweh)의 원서(原書) 강독(講讀)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서 교수님이 나를 눈 여겨 보셨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나의 처가 남독일 교회의 선교 동역자( Fraternal worker)로 나가 있어 아내를 만나러 나간다는 구실이 당시 엄혹했던 문제 인사들의 여권 발급 심사를 비교적 쉽게 통과할 수 있는 최적(最適)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런 사유로 아무것도 모른 채, 일 년을 가까이 독일에서 체재하다가 동경에 들어와서 비로소 내가 왜 일면식(一面識)도 없었던 오재식 선생의 후임에 선정되었는지 그 이유를 그때에야 알게 되었다.
 
1977년 이후 <서울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수도권>) 간사를 그만 둔 나는 생계를 위해 번역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민청련> 부위원장 겸 교육위원장으로서 <민청련> 사무실 확보를 위해 번역실을 만들어 생계(生計)와 운동을 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9년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1년여 동안 도피 생활을 전전하다가 지쳐, 마침내 용산구 청파동 숙대 앞에서 하숙을 하며 은밀히 <기독교문사> “기독교대백화사전” 번역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런 경력은 1981년부터 <사선> 간사로서 월간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과 영역(英譯)하는 일의 적격자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선>의 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민주동지회> 국내 대표이신 전 <KNCC> 총무 김관석 목사님과 오 선생을 위시한 해외<민주 동지회>에서 사전에 계획되고 준비된 각본(脚本)이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결론은 물론 그 이후 동경에 체재한 4년 반 동안에 순전히 감(感)과 추측(推測)과 남겨진 <민주동지회> 회의록 등 자료를 검토한 결과 나 혼자 내린 결론이었다. 그 속내에 감추어진 사실들은 김관석 목사님과 오재식 선생 두 분 다 고인(故人)이 된 지금 알 도리가 없다.

김 목사님은 회고록도 남아 있지 않고 오재식 선생님의 회고록(<나에게 꽃으로 다가 오는 현장>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무엇인가 남아 있을까 했지만, 1982년 이후 동경에서의 일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나 나름대로는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 선배 어른들의 지시라면 무엇이든지 서슴지 말아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앞일을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나 자신이나 내 가족들은 생각하지 않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결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단지 나 자신과 주변의 몇 분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는 생각에 섭섭함이 물밀듯 밀려 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그 빈칸을 메우는 일을 나에게 일임한 오 선생님의 배려(配慮)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 동안 ‘월간 민주동지’를 제작해 온, 이종원 씨는 서울 공대 학생회장 맡고 있던 1974년 ‘전국민주청련학생연맹’ 사건>(‘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어 제적된 나의 ‘민청학련사건’ 감옥동지였다. 1975년 2월 석방된 그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간사로 있다가, 한국무용을 배우러 방한(訪韓)한 재일동포 2세인 이인자(李仁子) 씨와 결혼하여 <동경 국제 기독교 대학>(ICU)에 유학온 나의 대학 후배이기도 했다. 1975년 그 엄혹했던 시절 그는 <KSCF>의 간사(幹事)로 그리고 나는 <수도권> 간사로서 서로 협력하고 있어서 나는 이미 이종원 씨도 이인자 씨도 알고 있었다.

이종원 씨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한국 민주화 일본 기독자 긴급회의>(<긴급회의>) 정기회의에 나와 나의 통역을 맡아 주었다. 권정인 씨는 일본어 번역뿐만 아니라, 사무실의 경리, 우편물 발송, 나의 출입국 관리에 관한 업무, <일본기독교 회관> 내의 기독교 단체들과의 관계 등, 내가 일본어로 더듬더듬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기까지, 1년 가까이를 나의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그녀는 1972년 본국에 유학하여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고등학교의 동기 동창인  일본인 도요다(豊田) 씨와 결혼하여 일남 일녀를 둔 주부로서 원래는 남편의 회사일을 돕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인하 목사가 담임 목사로 있는 <가와사끼 (川埼敎會) 재일한국인 교회>가 운영하는 복지법인 <청구사(靑丘社)>의 유치원 원생(院生)인 두 아이의 학부형으로서 이 목사를 알게 되었는데, 이 목사의 신임을 얻어 <청구사>의 실무자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민주동지회> 동경 자료 센터의 실무를 맞게 된 것이다.

그녀의 남편 도요다 씨는 동경대학교 공과대학을 나와 상수도 관련 회사를 경영하는 사업가로서 일본인 사회에서도 중류이상의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다.  귀화(歸化)하여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물론 한국 국적을 가지고 사는 동포들도 일본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취직, 진학, 결혼 등, 사회 전반에서 차별을 받는 상황에서, 그 시절은 1971년 ‘박종석(朴鍾碩) 히다치(日立) 취직 차별 반대 운동’의 결과로 일어난 동포 사회의  ‘지문날인 반대 운동’의 영향으로 한국이름(본명)을 사용하는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한 때였다.

지금은 ‘지문날인제도’가 폐기되어 있지만, 1987년 당시까지만 해도 ‘지문날인반대운동’이나 ‘본명(本名)사용운동’을 하는 동포들이 마치 우리나라에서 운동권이 위험시 당하듯, 경원시(敬遠視) 되던 때였다. 그때에 권정인 씨도 본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요다 씨는 자신의 성을 따르지 않고 본명인 한국 이름을 사용하며, 같이하던 자기 회사 일을 그만 두고 한국의 교회 단체에서 일하는, 권정인 씨를 아내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이해해주는, ‘보통의 일본인’과는 달랐다. 혹시 도요다 씨는 1960년대 운동권 출신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정확하고 당당한 그러면서도 항상 밝은 권정인 씨에 대한 존중과 사랑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도량이 넓은 성인군자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루는  본명을 쓰는 그녀가 대견하여,
“우리나라가 일본보다는 남녀평등 사회이지요? 권 선생이야 말로 여권운동가입니다.”
나름대로는 상찬(賞讚)하여  마지않는 나에게, 그녀는,
“그렇지 않아요! 우리나라에서는 며느리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친정집 이름을 쓰게 하지 않아요?”
라고 대답하여 나의 얼굴을 뜨겁게 했다. 그녀는 ‘여성평등운동가’이어서가 아니라 ‘민족차별반대운동’의 일환(一環)으로 그렇게 할뿐이라는 것이었다.

동경에 무사히 도착만 하면 날아와 모든 것들을 알려주겠다던 오 선생을 소식이 없고, 한 달에 한번 씩은 나와서 일에 대해 논의하시겠다는 이인하 목사님도 자주 얼굴을 뵙기 힘들고, 그렇게 답답하고 때로는 화도 나는 상태로 나는 6개월을 그야말로 집-일본어 학원-사무실을 개미 쳇바퀴 돌듯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모르고, 지리도 모르니, 한참동안은 일요일에도 교회도 못 가고 일본어를 열공(熱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어 학원에서 하루도 결석하지 않는 모범생이 되었다.

가끔 일본어 학원에서 십년은 아래인 동남아 청년들(이주 노동자들- 하기야 나도 이주 노동자였다. 그것도 교사보다도 나이가 많은 한심스러운 노털.)의 클래스메이트로 “에비스(惠比壽) 맥주 박물관 방문”, “링고가리(사과 따기)”나, “이치고 가리(딸기 따기)” 등의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가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본 기독교 빌딩>의 <AVACO>(<시청각 교육실>), <JNAC>(재일북미 선교사 협회), <아시아 자료센터>나, <일본기독교단> 등의 젊은 직원들과의 야유회 등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었다.
 
이렇게 하여 어느 정도 일본어를 읽을 수 있게 되고 전차 노선을 습득하게 되자 토요일이면, 후지산(富士山)이 보이는 다까오산(高尾山), 긴도끼산(金時山), 메이신산(明神カ岳) 등 한두 시간 거리의 동경 변두리 산들에 등산을 하기도 하였다. 그중 주로 가장 가깝고 교통비가 싼, JR로 1시간 반 거리의 다까오산을 자주 올랐다. 아마도 돈도 시간도 충분치 않은 내 일생 중, 전무후무(前無後無)하게 그렇게 거의 매주 토요일 등산을 해본 적이 없다.
 
가끔 권 선생은 동경 부근 가와사끼(川埼) 시,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가와사키 재일 한국인 교회> 배중도(裵重度) 장로와 사모님 고(故) 정월순(鄭月順) 집사, 김신영(金信英) 집사와 남편 김달홍(金達弘) 집사 등과 친교시간을 마련해주어 날을 세우며 담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김신영 집사는 오사카 교회 김덕성(金德成) 목사의 장녀로서 1875년 ‘한일 청년협의희 준비회의’의 서울 모임에서 처음 만났던 나를 기억해 주었다.

그녀의 동생 김혜영(金惠英) 씨와는 또 다른 인연이 있었다. <KSCF 관련> ‘민청학련사건’ 감옥동지들이었던 우리들은 연세대 신과대 제적생 최민화(崔敏和) 군의 아내 고(故) 박혜숙(朴惠淑) 씨가 운영하는, 신촌 이대 앞 사거리 건너편에 자리 잡은 ‘민중 약국’을 ‘민중 사랑방’이라고 명명(命名)하며 자주 만나 시국(時局)을 한탄(恨歎)하고는 하였는데, 어느 날 공대 제적생 이종원이 여기에 1978년 본국에 한국무용을 배우러 온 김혜영 씨를 데려온 것이었다. 이 김혜영 씨는 우리들의 부축임으로 서울 문리대 제적생 양관수(梁寬洙: 전 오사까 정법대학 교수) 군과 사귀게 되었고, 내가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2년여 도피생활을 끝내고 1981년에 다시 가 보니, 그녀는 <오사카 경법대학>에 유학한 양군과 함께하여 일본으로 들어가 결혼하고 아버지가 목회하고 있는 오사카 교회의 유치원 보모(保姆)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달홍 집사는 귀화한, ANA( All Nipon Airway;전일본공수) 기장인데, 국적상의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甘受)하고 나카무라(中村)라는 일본 명을 버리고 김달홍이라는 본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필자 소개> 김경남 1949년 (66세) 전남 완도 생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법대, 한국신학대학 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한국민주화기독교민주동지회> 동경자료센터 관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무주<푸른꿈고등학교> 교장,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업본부장, <한국교회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경남  gisoo9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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