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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가?-사이비 구원과 참된 구원<박재순 칼럼>
박재순(씨알사상연구소 소장) | 승인 2015.03.09 14:46

먼저 ‘구원’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불교나 힌두교, 유교와 도교에서도 구원이란 말을 썼는지 모르겠다. 동양종교들에서는 구원이란 말보다 해탈이나 깨달음이라는 말을 썼던 것 같다. 기독교가 생겨났던 로마제국은 철저히 노예제 사회였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은 노예들과 해방노예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고대사회에서는 노예(종)들이 노예신분에서 해방되려면 몸값을 치러야 했다. 주인의 지배와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려면 누군가가 몸값을 치르고 구해주어야 했다.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남의 도움으로만 노예신분에서 종살이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

노예제 사회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죄를 지은 사람은 죄와 악(악마)의 지배 아래 노예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죄값을 치르고 인류를 죄악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었다고 믿었다. 당시 죄란 말과 빚이란 말이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값을 치르고 구원해준다는 생각이 쉽게 받아들여졌다.

만일 구원이란 말이 노예제 사회에서 통용되던 말이라면 오늘 자유 민주사회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남의 종이나 노예가 아닌데 누가 나를 구원해 준다는 말인가? 자유 민주 시대는 내가 스스로 나의 삶과 운명을 만들어가는 때다. 하나님은 남이 아니다. 나보다 내게 더 가까운 분이고 내 존재와 생명의 근원과 뿌리인 분이다. 하나님은 나를 나로 만드는 이고 거짓 나에서 참 나가 되게 하는 이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말은 나를 나답게 참된 나로 만드셨다는 말이고 내가 나가 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만일 구원이란 말을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벗어나 오늘 자유 민주 사회에서 쓰려면 죄와 악이 무엇이고 죄와 악에서 구원받고 벗어난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죄와 악은 무엇이고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의 본성과 목적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이 구원이고 깨달음이고 해탈이며 생명의 본성과 목적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이 죄와 악이다.

생명의 본성과 목적은 주체(나)의 깊이와 자유에서 전체의 하나 됨에 이르는 것이다. 저마다 저답게 되면서 서로 하나가 되는 삶에 이르는 것이다. 몸과 맘과 얼이 감성과 지성과 영성이 자유롭게 실현되면서 전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구원이고 깨달음이며 해탈이다. 생명과 정신을 살리고 힘차게 하며 높이는 것이 진리이고 구원이고 해탈이다. 구원받은 인간, 깨닫고 해탈한 인간은 생명진화의 역사와 인류역사를 실현하고 완성해가는 존재다.

낡고 거짓된 껍데기 삶에 매여서 나의 몸과 맘과 얼을 얽어매고 해치는 것이 죄와 악이고 낡고 거짓된 삶, 껍데기 삶에서 벗어나 참되고 영원한 삶, 알맹이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이고 깨달음이고 해탈이다. 구원이 이런 것이라면 나의 밖에서 남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속의 속에서 나보다 내게 더 가까운 하나님, 성령, 그리스도, 진리가 나를 참 나, 얼 나의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이다. 거짓 나에서 참 나, 얼 나로 되는 것이 구원이다. 천지인 합일에 이르는 것,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것, 자치와 협동의 삶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을 제대로 하도록 이끄는 것이 참 종교다. 아무도 어떤 종교도 하늘, 하나님, 진리와 사랑, 정의와 평화, 참된 삶을 독점할 수 없듯이, 기독교나 교회가 구원을 독점할 수 없다.

   
 
기독교든 불교든 나를 참 나로, 주체의 깊이와 자유로 개성과 아름다운 삶에로 전체가 하나로 되고 자치와 협동에 이르고 정의와 평화의 삶에 이르게 한다면 기독교도 불교도 참 종교이고 구원의 종교다.

1년 전에 세월호 사건을 일으켜 304명을 죽음으로 내몬 종교가 자칭 구원파 사이비 기독교가 아닌가? 구원은커녕 대한민국 전체를 국민 전체를 큰 고통과 슬픔 속에 빠트리고 어린학생들 수백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거짓 종교인들이 사이비 기독교 구원파였다. 구원파의 구원관은 전형적인 노예적 구원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의 죄를 영원히 없애고 단번에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에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구원은 이미 남이 이루어놓았고 나는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니까 얼마나 쉽고 편리하고 확실한가!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 맘이 약하고 불안한 사람들이 노예적 구원관에 속아서 노예생활을 했다. 이들은 구원파 교주에게 재산과 노동과 맘을 다 바쳤다. 영원한 구원을 값없이 받았다는 거짓된 위로와 확신을 얻은 대신 자유롭고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남을 위해 노예로 살았다.

구원파 교주와 그 가족들은 순진하고 가난한 민중을 구원이란 말로 속여서 억압하고 수탈하며 노예로 부렸다. 교주와 그 가족들은 군왕처럼 살면서 구원파 신도들은 노예처럼 살았다. 구원이란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이고 엉뚱한 말인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순수한 사랑으로 헌신했던 예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바쳤던 예수의 종교인 기독교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얼마나 비참하고 무력하고 수치스럽게 죽었던가! 자신과 남을 위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고 죽은 예수가 온 인류의 죄를 씻고 구원을 주었다는 것은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진리가 아니라 심층적 종교의 역설적이고 상징적인 진리다. 십자가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그도 없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녹아져서 참된 주체와 전체로 일어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자리다. 이것은 내가 나로 되는 자리이고 나와 너와 그가 서로 주체로서 하나로 되는 자리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참 나가 되고 전체가 하나로 되는 구원을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나 천도교인이나 유교와 도교인들은 저마다 저 나름으로 참 나가 되고 전체가 하나로 되는 구원 경험을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목숨 바쳐 헌신했던 정의와 평화, 사랑과 진리를 실현하는 종교가 참 종교이고 구원을 주는 종교다. 불교도 기독교도 참 종교가 될 수 있고 오늘 우리 사회에 우리 삶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종교가 될 수 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고 노예제 시대의 낡은 관념과 생각에서 유치한 신화와 낡은 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21세기 민주화된 성숙한 시대에 살 자격과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성숙한 현대인이라면 다른 종교들에서 겸허히 배우고 자신의 신앙과 삶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종교와 삶이 자신과 남의 생명과 정신을 깊게 하고 힘차게 하고 높게 하는지 스스로 묻고 살펴보아야 한다.

박재순(씨알사상연구소 소장)  p994@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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