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통일 칼럼 연재
장준하(張俊河)와 그의 일단 성지임천(聖地臨泉)에 이르다 1<문대골 칼럼>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3.11 17:42

장준하가 그 한중(韓中) 주둔 일본의 최정예 부대인 쓰까다(塚田)를 탈출, 주야를 가리지 않고 불멸의 옥수수밭 속을, 한밤중엔 허리에 이르는 강을, 어떤 때는 마냥 계속 되는 가시숲을 헤치면서 도망길을 내달리던 중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중국의 순찰병을 만나게 되었다. 인근에 주둔해 있는 유격병이었다. 장준하와 그의 일단은 깊은 안도의 숨을 아주 길게 내쉬었다. 쓰까다를 탈출해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 유격병의 안내를 따라 그들의 은거지로 안내되었다. 병영의 입구에서부터 장준하와 그 일단에 대한 대접이 놀랍도록 친절하고 융숭했다. 그런데 본부에서 이 탈출병의 소식을 먼저 보고받고 영접을 나온 한 한국출신 병사가 있었다. 중국군복을 정중하게 갖추어 입은 잘생긴 청년이었다. 병영의 정문으로 달려 나오는 청년은 두 팔을 되는양 벌려대며 “아, 한국청년들이군요.” 장준하 일단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껴안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이후 장준하와 죽을 때까지 한몸 친구로 살다간 김준엽(金俊燁)이었다. 이 유격대에 도착한 다음 날 선임들, 참모들과 함께 아침을 했고, 점심은 본대의 사령관 한치륭(韓治隆) 장군이 준비한 장준하 일단의 환영만찬으로 이루어졌다. 장준하가 평생을 두고 명(命)의 사표(師表)로 중심에 품었던 인물이다.

한치륭(韓治隆) 장군

한치륭(韓治隆)! 장준하가 한치륭을 전략가나 장군으로서가 아닌 생의 사표로 길이, 깊이 기억하며 살았던 것은 그가 단순히 장준하 자신과 함께한 자국의 동료들의 생명을 지켜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치륭의 <사람노릇>을 투시(透視)했기 때문이었다. 장준하가 투시했다는 한치륭의 그 <사람노릇>이란 이런 이야기다.

한치륭 부대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 안에 고왕(高汪)이라 이름하는 탄광(炭鑛)이 있었다. 탄광주는 일본인이었던데 반해 거기 고용된 광부들은 100% 중국이었다. 거기 고용된 광부들에겐 거의 불가능할 만큼 채광량(採鑛量)이 부가되었다. 게다가 월급은 체불되기 일쑤에, 인권 같은 것은 잠꼬대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같은 광부들의 참상이 이 지역의 치안까지를 담당하고 있는 중국국부군장군 한치륭에게 보고되었다.
당시 이 중국유격대는 장악지역의 세무행정까지도 담당하고 있었다. 자국광부들의 이같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을 보고받은 한치륭 사령관은 수차례 탄광회사에, 뿐만 아니라 광산에 파견되어 있는 일군의 파견대장에게까지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밀린 임금은 물론 임금만은 제때에 제대로 지불하라는 요구를 했지만 실효가 없자 일대단안을 내렸다.

아예 광구들을 폭발시켜 버린다는 것이었다. 부대의 포격수들에게 특명을 내렸다. 박격포 12문을 동원 칠흑 같은 심야에 기습포격을 단행한 것이다. 탄광은 거의 폐쇄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포격단은 유유히 밀림으로 사라져버렸다. 일본군으로서도 이 일은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 중국 유격단에 협상을 제안했다. 광부들의 임금문제에 대해서는 양편 모두 이의 없이 어쩌면 너무도 싱거우리만큼 해결이 됐다. 한치륭 사령관과 쓰까다의 파견대장이 서로 잘 해보자며 두 손을 잡았다. 일은 다음에 터졌다.

쓰까다 부대장의 친서라면서 편지 한 통을 내놨다. 일종의 공한(公翰)이자 통첩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지금 우리는 귀 부대의 병사들 30여 명을 포로로 구금하고 있다. 본관은 포포로 구금 중인 귀 부대대원들을 전원 석방 귀대케 하고자 한다. 그러나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근일 본관의 부대에 소속한 한인 출신 병사 중 부대를 이탈한 수명이 귀하의 부대에 피신해 있는 것으로 확인한 보고를 받고 있다. 그 이탈병들을 이 전문을 받는 즉시 돌려주기를 바란다. 여기 귀하의 군대 30인의 명단과 이탈병의 명단을 함께 송부하는 바,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본관으로서 특별한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다. 명심하기 바란다.”
이때 한치륭과 쓰까다 부대 파견대장의 협상을 통역한 것이 바로 김준엽이었다. 한치륭은 즉석에서 쓰까다 부대 사령관의 공한을 열어보고 파견대장에게 딱 한마디를 던지면서 자리를 덨다.
“협상은 없다.” 30명의 내 부하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돌려보내는 한인병사는 총살당할 것이 뻔한 일, 전장에서 전쟁 중에 죽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평시에 사람을 총알받이로 쓸 수는 없다. 그래서 장군 한치륭은 30명과 5명의 교환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본대로 귀환했던 것이다. 지금 중국 유격대 안에 있는 한인출신 병사들이 김준엽으로부터 한치륭 장군의 담판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 내심이 어땠을까?

장준하가 김준엽으로부터 그 사건을 전해 들었을 때 놀란 것은 한치륭의 대담함이라든가, 장군됨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일까? “아, 사람이 그렇게도 위대할 수 있는 것인가?”, “내 생명을 내주어야 할 각오를 하면서까지 너를 살리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인가?”

한치륭 장군, 그는 장준하에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실증해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지 2-3일 후 그 위대한 한치륭 장군이 같은 동족반군의 총격으로 비명(?)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장준하는 놀라움보다도 비통함이 그 가슴속을 흐른다. 모순의 세계를 주시한다.
모순의 세계,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라고, 그래서 오히려 장준하는 이 모순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와 선언에 가까운 대화를 한다. 더 이상 여기는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가자, 임천(臨泉)으로!

   
 
3000리길 임천에는 중국중앙군관학교(사관학교) 임천분교가 있고, 거기 특별반으로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이 있다. 당장 이곳을 출발, 최소한 거기까지는 가야한다. 함께 서주의 쓰까다 부대를 출발했던 3명에 이제는 김준엽이 더해져 이제는 자신을 포함하여 5명을 일단으로 최후의 목표인 중경(重慶)을 향해 중국 유격부대를 떠나는 것이다. 유격대의 지휘부에서도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중경행을 하겠다는 한국출신 병사들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동족의 손에 전사당한 한치륭 장군을 이어 사령관직을 대행하게 된 유 대령과 손 참모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당부대를 떠나는 한국 학도병들의 모임에 직접 참석해 그들의 애국적인 결단을 높이 치하하며 중경까지의 지도와 안내자와 상당한 비용까지를 지원하는 온정을 베풀어주었다. 유 사령관 대행은 “자, 잘들 가시오. 우리가 먼저 여러분이 임천을 찾아가거나 (임천에는 한국광복군훈련반이 있었음-필자주) 중경을 찾아가도록 했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소이다.” 유 대행은 한국 학도병들을 위한 격려사에 눈시울을 적시기까지 했다.

장준하 일단의 의기가 하늘을 찌른다. 이재는 임천을 거쳐 중경까지에 이어진 상세한 지도가 있고, 안내원이 있고, 돈이 있다. 맨몸으로 쓰까다를 탈출 그 불같은 폭염의 광야와 험산을 내달리던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장준하 일단이 한치륭의 유격부대를 떠난 것이 7월 28일, 임천에 도착한 것이 9월 10일이었으니 그들의 3000리 행진은 무려 42일간이나 계속된 것이었다. 한 지역을 벗어날 때마다 안내인이 바뀌고 행군도상 또한 필설의 형용을 불허하는 험로를 수없이 걸어 넘어야 했지만 조국의 사랑으로 불타는 가슴의 저들은 그 험로를 넘고, 뚫고, 건너뛰고, 넘어지고, 뒹굴고, 부딪히고, 터지고, 피 흐르고...

독자들이여,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명맥(命脈)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를! 끊길 듯 이어지고 잘릴 듯 버텨온 고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풍운의 조선과 풍운의 삶을 살아낸 사람, 청년시절을 오직 조국으로, 청장년시절을 오직 민주주의로, 초로의 시절엔 오직 통일로 생의 주제를 삼고 죽어서 산, 살아서 죽은 사람, 한국 현대사의 오직 한 사람, 그렇게 아름답게 고고히 살아간 사람,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도 알 수 없는 채 간 사람! 독자들은 그 장준하를 알아야 한다.

아, 여기는 임천(臨泉)!

임천(臨泉)! 이곳은 한국 현대사에서의 성지(聖地)로 기억되어야 한다. 필자가 임천을 성지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장준하가 중경 임정을 거쳐 해방 후 광복된 조국에 들어오게 될 때까지 <힘의 신자> 박정희(朴正熙)를 실제로 대면한 사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가부 간 이곳이 한국 현대사를 함께 살아낸 박정희와 일대대척점(一大對蹠點)에서는 첫 자리라는 데서 하는 말이다. 이에 필자는 장준하의 그 박정희와의 대척지로서 임천을 말해가려 한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