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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반지 뺐어요"<전순란의 휴천재일기-2015.3.10>
전순란 | 승인 2015.03.16 11:19

2015년 3월 10일 화요일, 맑은 하늘에 찬바람이 무지무지 불어댐

43년 만에 결혼을 빼버렸다. 결혼식 때 내게 끼워 줄 반지를 마련해야 하는데 보스코에게는 돈이 없었다. 졸업 때 학교 부회장을 했다고 총학생회에서 내게 해 준 한 돈짜리 18금반지를 들고 가서 반으로 갈라 반 돈짜리 두 개를 만들어 하나에는 BOSCO, 하나에는 NANI라고 이름을 새겼다. 월산동 본당에서 거행된 결혼식에서 김성용 신부님께서 축성해 주신 실반지를 서로 끼워주면서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었다.

그런데 보스코는 시계도 반지도 몸에 지니는 걸 못 견뎌 결혼반지가 책상 서랍 속에서 딩굴다 없어질까 내가 둘 다 끼고 살았다. 그래선지 10월 3일 결혼기념일이 오면 보스코한테서 “당신 결혼을 축하해.”하는 건성의 인사를 받곤 하였다. 반지를 둘 다 끼고 있어선지 결혼은 나 혼자 했고 따라서 집안살림과 부부의 대소사는 아내 혼자 감당하며 남편은 돈 벌어다 주는 일 말고 나 몰라라 하는 전형적인 한국가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최근에 왼손 약지가 자꾸 붓는 이유가 40년 넘는 긴 세월 굵어오는 손가락을 반지 두 개가 죄고 있어서인 듯해 오늘 손에 비누를 잔뜩 바르고 있는 고생을 다해서 반지를 빼내는 데 성공하였다. 나름대로 서운해서 보스코더러 “여보, 나 반지 뺏어요. 이젠 당신도 자유의 몸이에요.” 했더니만 책에서 눈도 안 떼고 “그래?”라며 도통 관심을 안 보인다. 새를 잡아 새장 안에다 여러 해 가둬두면 새장 문을 열어놓고 “날아가 보렴!”해도 뒤뚱거리기나 하지 날갯짓을 못한다는 이치를 그가 일찌감치 깨우친 듯하다. “이제 날아가 본들 뭐하냐? 아래층에 내려가 어제 광주 ‘무등시장’에서 사온 조개로 보스코가 좋아하는 조개스파게티나 만들지.”

점심상에는 오랜만에 소담정 도메니카를 불러 함께 먹고 ‘사순절 신앙생활’에 대한 그니의 덕담도 듣고(그니는 이 산골에서도 함양이든 산청이든 심지어 인월이든 매일 미사를 간다) 하였다. 깨강정 만드느라 들깨는 일어서 벽난로 앞에 널어 말리고 볶아놓은 땅콩은 보스코, 도미니카, 나 셋이서 껍질을 깠다. 깨를 볶을 팬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미자씨가 남편과 함께 와서 한참 노닥거리다 갔다.

   
 
깨를 볶아놓고 조청과 설탕을 녹이는데 서상에서 손님이 왔다. 베로니카씨가 딸과 함께 찾아온 길인데 지난번 폭설 때에 말날 장을 담갔다는 사진을 카스에서 본적 있는데 바로 그날 눈에서 미끄러져 갈비뼈와 골반뼈에 금이 갔다면서 지팡이를 짚고 한발자국도 떼기 힘들만큼 증세가 심하다. 따님도 그 튼튼한 여장부 생김새와 달리 이런저런 고생을 하나보다.

때마침 몇 주 전 ‘톡톡요법’으로 내 어깨 통증이 신기하게 사라진 일이 기억나 수지침 실력을 갖고서 몇 군데 두드려주었더니 신기하게도 그니가 움츠리고 다니던 가슴도 펴고 지팡이 없이 발걸음도 뗄 수 있는 모습으로 휴천재를 떠났다. 휴천재에 명의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모녀가 떠나고 마음이 바쁜 나는 깨를 마저 볶고 설탕과 조청을 비율대로 녹이고 하면서 깨강정을 만들었다. 바람이 사정없이 내리불면 벽난로 문에서 연기가 훅하고 새어나오는 소란 속에서 방안이 매캐할 대로 매캐해도 이웃들과 하루를 보낸 보람인지, 큰아들 빵기와 두 손주가 좋아하는(아마 며느리도) 들깨 강정이 두 상자 가득해선지 춥지도 맵지도 않았다.

자식이 부모한테서 생명을 받는 것이 정한이치이지만 때로는 부모도 자식에게 목숨을 신세지기도 한다. 신혼생활 3년을 광주에서 보내고 서울로 상경하여 모레내 반지하에 세를 들었다. 장마철이면 부엌에도 마루에도 물이 들어 쌓아둔 연탄이 곤죽이 되곤 하고 일 년 내내 연탄가스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었다. 잠을 자다 빵기가 너무 울어 잠을 깨면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픽 쓰러지곤 했는데 연탄가스 때문이었다.

연탄가스에 예민한 빵기 덕분에 세 번이나 온 가족이 목숨을 건져 외갓집에서는 빵기에게 ‘가스경보기’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아들과 손주들이 연탄가스 걱정 없는 곳에서 살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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