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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이적의 민통선 예수 14>
이적 목사 | 승인 2015.03.22 10:59

김포시 민통선안에서 민통선평화교회를 개척해 18년간 목회를 해온 이적 목사의 자전적 성격의 에세이 <민통선 예수>를 매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출소 후 나는 미친 듯이 시(詩)를 써댔다.
문학만이 내게 희망이었으며 내 미래를 보장해 줄 자존심이었다. 나는 문학이 없다면 죽을 목숨이었고 살아야 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내 주변 사람들, 즉 가족들이나 주변 친구들까지도 내가 문학이야기를 꺼내면 조소를 보내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쉽게 말하자면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등단은 하늘인데 니깟게 뭘 안다고 깡충거리는 것이냐는 표정쯤으로 보였다. 내가 만약 문학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전혀 인정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빈정거림이었고 차가운 냉소였다.

특히 둘째 매형은 내게 노골적으로 말한 기억이 생생하다. <내 앞에서 그놈의 문학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 자존심이 무너지는 빈정거림 이었지만 나는 참아야 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당신들 코를 납작케 해주리라 하는 문학에 대학 열정과 포부가 가슴을 후벼 팠다.

나의 그러한 포부답게 나의 인내는 긴 겨울처럼 길고 길었다. 나의 그 인내 속으로 나의 문학적 미래는 차츰 내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음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삼청교육대 폭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정국을 강타 할 태풍전야의 밤처럼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아니, 내 자신조차 생각지도 못한 다른 방향으로 풍향계가 삼청폭로의 방향을 맞추고 있었다.
 
당시 문단은 한국문인협회와 자유실천문인협회로 나뉘어져있었다. 기실, 문협과 나뉘어져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약칭:자실)는 문인협회(약칭:문협)에 견줄만한 단체가 되지못하였다.

문협은 전국에 수 천 명의 문인을 거느린 한국을 대표한다는 거대한 문인집단이었고 자실은 문협의 어용적 체재에 반대하여 뛰쳐나온 신념 있는 작가들 몇 십 명이 모여서 만든 자그마한 단체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수적으로나 규모면으로나 자실이 문협과 대적할 만한 구석은 어느 한 구석에도 생존치 못했다. 문협 사람들은 자실을 얕잡아 보았고 그들은 자실의 문학을 통한 민주화 운동을 빨갱이운동으로 폄하 시켰으며 군사 정부 역시 자실 회원들을 국가를 전복시키려하는 반체제 인사들의 집단으로 시선을 내려 깔고 있었다. 그러니 자실은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문학인 이전에 민중문학을 내세운 북한정권 신봉자들 쯤으로 여겨 자리를 붙일 곳이 없었다.
 
당시 문협은 유신정권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친정부 성격의 완벽한 어용단체로 전락한 끝에 쿠데타로 정권을 일으킨 전두환 정권의 종속단체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협 소속의 문인들은 권세도 있었고 명실 공히 이 땅의 지배세력으로 자리매김을 잡고 있을 때였다. 특히 문협의 운영진들은 자리다툼도 거세어서 이사장 선거를 하면 사회의 여느 선거 못지않게 타락의 정도가 그 극치를 뛰어 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어떤 이권단체보다 더 크고 엄청난 권세와 재물이 굴러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임기가 끝나는 문협 이사장 선거철은 문협 회원들에게는 철만난 고기떼였다.

음식이 넘쳐났고 돈다발이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옮겨 다녔다. 물론 그 속에는 생각이 깊은 문사(文士)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협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역사성을 가진 지성인이라면 참여를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역사성의 부재나 부패의 정도가 그 도를 넘고 있었던 때였다.

반면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당시 서울대학교의 백낙청 교수(평론)와 고은(시인) 신경림(시인) 김지하(시인) 박태순(소설가) 양성우(시인) 임헌영(평론) 김성동(소설가) 문익환(시인)등의 난세의 무장과도 같은 문사들이 모여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이어 노태우정권까지 정권의 반역사적인 행위와 정통성 없는 쿠데타 정권의 비도덕성을 용기 있는 문체로 그들을 공격하며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바로 세우려 하는 글들을 전쟁터의 총알 쏟아내듯이 무수히 토해 내고 있었다. 그들은 문협 단체 따위는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옳은 글을 쓰다가 군사정권에 의하여 투옥이 되기도 했으며 지명수배 등 양심의 표현을 하다가 갖은 곤욕을 다 치르고 있었다.
특히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김지하의 <오적>발표는 당시 군사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대표적 필화사건으로서 문인으로서의 양심을 최대로 표현한 문학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이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는 올바른 양심을 견지하려는 젊은 문학도들이 많이 찾아들었으며 그 조직과 군사정권과의 투쟁성도 차츰 치열성을 더해가고 있었다. <자실>은 당시 군사정권의 눈엣가시중의 대표적 문인단체로 찍혀 있었으나 대신 해외에서는 한국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활동을 거의 영웅시 되었으며 제3세계 지식인들은 <자실>이 펼치는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거의 경이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실>소속의 문인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길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길은 문인으로서는 양심을 지키는 길이며 조국을 지키려는 올바른 지식인의 길일지는 몰라도 민주화가 된 정권이 오지 않는 한 험난한 사회를 뚫고 나가야 하는 사회인으로서는 절대 보장 받지 못할 형극의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남한 사회에서는 그 형극의 길을 걷고자 하는 많은 문인후보생들이 있었으니 우리의 조국은 결코 불운한 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이 지금도 변치 않는 나의 생각이다.
 
어쨌든 그 당시에는 덩치가 큰 문협과 덩치는 작으나 탄탄한 역사적 의식에 기반을 둔 <자실>이 한국문단을 대표하고 있었는데 당시 문협은 월간 문학, 등 5-6개사의 문예지군을 거느리고 있는 반면 자실은 <창작과 비평><실천문학><민족문학>을 대표적 문예지로 펴내고 있었다. 그러나 문협 쪽 문예지에서  나오는 원고료는 액수가 무척 많았다. 그러나 <자실>측 기관지인 <민족문학>은 원고료도 없었고 원고료 대신 책 몇 권을 보내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자실>측 기관지인 <민족문학>이나 <실천문학> 등은 원고료에 그 가치를 두지 않아도 더 큰 가치들이 있었다.

<민족문학>에 시가 발표된다는 것은 문인으로서는, 시대적 역사적 문학반열에 함께 한다는 자격을 얻게 되는 귀중한 공간이었고 당시 우리가 존경하는 수많은 문인들과 재야 쪽 어른들과 교류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얻게 되는 귀중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진보적 문인들과 동등하게  한 배를 타고 가며 문단 활동을 보장 받는 귀중한 길이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시대와 함께 하는 진보 시인의 길을 걷고 싶었다. 글을 통한 조국 민주화의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 아직은 <달타령> <꽃타령> <자연타령>의 문학이 아니라 시대를 고뇌하는 패기 있는 시를 발표하고 싶었다. 일제를 거슬러 올라가 시대를 고민했던 윤동주시인과 같이, 군사독재시대를 질타했던 대표적인 김수영시인과 같이 그런 존경받는, 시대에 충실 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시인들의 맥을 도도히 이어받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문을 두드리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써 모아 두었던 작품 40여 편을 인편을 이용하여 자실 측 사무실로 보냈다. 그것은 소중히 키워온 자식을 타인에게 평가 받는 것과 같은 소중한 두근거림이었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운동성이 얼마나 건강한지 문학적으로 평가받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로부터 연락이 오길 애써 기다렸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매우 긴 시간을 요구했다.

한편 나는 그 즈음 큰 매형이 경영하는 수산물 무역회사엘 다니고 있었다. 말이 무역회사지 큰 규모의 그런 회사는 아니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어패류나 어류 등을 일본에다 판매하는 수출업이었는데 그다지 큰 재미를 본다거나 돈을 많이 버는 그런 회사도 못되었다. 매형도 짧은 자본으로 시작한 사업이라 물량을 크게 취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바라보면 늘 돈이 궁하여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인생을 맡기기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분간 수산물 일을 한번 배워보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그 바닥이 원래 그런 것인지 수산물 무역업이라는 것 자체가, 소상인적 기질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고 작은 장사꾼들끼리 머리 맞대고 벌이는 쫌팽이 사업이라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1년 가까이 매형회사를 출입했지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생산이 시원찮으니, 도리어 이삿짐센터의 노동보다도 보람이 없었다. 나는 다른 일을 찾았다.

적어도 오랫동안 살아남으려면 무슨 일이든 건강한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었다. 겉으로만 번지르한 직장보다는 온 몸으로 땀 흘리며, 고통스러워도 정직한 삶을 사는 일터가 그곳이 더 보람된 삶의 터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기반을 둔 나는 마음속으로는 노동을 하고 싶었다. 건강한 노동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공장 같은 곳에 위장취업을 한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나는 아직은 노동적인 신념이 약했고 노조 설립을 위한 전위대원의 임무도 없었으며 또 큰 공장들에서 나의 취업을 받아 줄 리도 없었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 이상의 일을 나는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불교 잡지사에서 잡지 일을 맡아 달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당시로서는 기독교를 배교한 상황이었으므로 불교 잡지사를 마다 할 이유는 없었다. 도리어 불교의 무소유(無所有)사상을 동경하고 있었으므로  이참에 불교 공부를 해두는 것도 좋으리라 여겼다. 잡지사의 본사는 서울에 있었는데 모 국회의원이 회장을 맡고 있었고 내가 근무할 곳은 부산지사 사무실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할 일은 사찰 탐방 기사를 쓰는 일과 책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나는 당분간 그 일을 병행해가면서 매형 회사일도 함께 도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긴급한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그 전화는 내가 원고를 인편으로 부쳤던 지인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는 대뜸 내게 전화로 “선생님 축하드려요”하며 느닷없이 숨을 몰아쉬며 축하 인사를 먼저 전하는 것이었다. 상대는 아동출판사에 근무하던 출판사 여직원이었는데 그가 내게 문예지 원고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원고가 신인 원고로 채택이 되었대요. 편집위원들 만장일치로 선생님을 새로운 시인으로 추천하는 것으로 찬성했대요. 작품이 시대성도 좋고 이 시기와 딱 맞아 떨어지는 작품이라며 다들 놀라워했대요. 이제 선생님의 원이 풀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며칠 뒤 편집팀에서 연락이 갈 거래요. 선생님 축하드려요.!”

그는 마치 자기 원고가 발표되어 지는 것처럼 팔짝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나도 정신이 얼얼했다. 그 유명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내 원고를 채택했다니 나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이건 누구의 도움도 없었고 지도도 없었다. 순전히 내 의식과 내 솜씨로 작품을 썼으며 그 작품이 순수공모에서 채택이 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이 첨예한 문예운동가들로 구성된 민족문학 편집 팀에서 추천을 받다니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나는 <자실>로부터 한통화의 긴급전화를 받았다.
“선생님을 이번호 신인으로 추천을 했습니다. 추천시인은 채광석 시인입니다. 축하드리고요. 이번달 말 **일에 광주무등산에서 <자실>소속 문인 모임이 있습니다. 이제 정회원이시니까 회의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오실 수 있는 거죠?”
나는 못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럼요. 가고 말고요. 꼭 가겠습니다.”하고 그 모임이 마치 나를 위한 모임과 같은 기분으로 나는 들뜬 기분으로 참석의사를 말해주었다.

문예지는 며칠 뒤 서점에 배포되었다.
나는 부랴부랴 서점으로 달려갔다. 서점에는 이제 막 나온 문예지답게 신간 문예지코너에 그 책은 꽂혀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시인 추천페이지로 책장을 넘겼다. <아!>나는 내가 열심히, 아니, 피를 토하며 썼던 언어들이 활자체가 되어 책장 속으로 곱게 숨어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서러움일랑 묻지 말게
가도 가도 찬 새벽길
내 조국이었음에도
발자국소리에도 두려워하는
내 어머니
어 .머. 니    
 

 <중략 삼청교육대, 안개 속으로 일부>

1980년 숨 가빴던 투옥시절, 두려움에 떨며 군부정권에 끌려갈 때를 표현해놓았던 처참했던 시간, 그 시간을 두려운 마음으로 써두었던 소중했던 나의 과거와 언어, 이제 그것들은 척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조용히 세상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 이었다 .암담한 조국을 지키고자 미래의 조국을 향하여 위정자들의 정체를 까발리고자 하는 나의 사상은 한편의 시가 되어 칼이 되어 총이 되어 세상을 향하여 포문을 열고 있는 것이었다.

근실이, 어디 메쯤 있는가?
땅바닥에 떨어진 밥알이
시루 떡 만큼 크게 보여
죽음과 맞바꾼
너의 한은
어디 메쯤 떠돌도 있는가?
경기도 연천군 적성면 어유지리 들판에서
죽음을 등에 업고
엉금엉금 기어가다 각목에 맞아 엎어지면
그 위로 날아들던
정도형 채왕지의 군홧발에
못살겠어
못살겠어
차라리 죽여줘
차라리 죽여 달라던 절규가
결국은 죽음을 불렀을 때
미친 개 채왕지는 끝끝내
너의 죽음까지 부인하고 또다시
각목을 내리칠 때
너의 육신은
시체로 갈기갈기 찢기어
원한의 80년대 하늘로
솟구치듯 날아갔는가?
우리는 살아서 나왔는데
임근실 너는, 너는
누굴 위해 죽어
어디에서 눈 뜬 혼으로 헤매는가?
아아, 근실이 근실이.   

    <詩 삼청교육대 8, 임근실의 한 일부>

이 시는 임근실의 죽음에 대한 최초의 폭로시였으며 또 삼청교육대의 비인간적인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그야말로 전두환 정권의 인권 실종의 한 단면을 처절하게 드러나게 한 가슴 서늘한 시였다. 후에 정보기관원들의 후일담을 들어보면 자기들이 보아도 간담이 서늘하여 보고자에게 보고하기를 꺼려하여 보고까지 미뤘다는 그런 시였다.

오오, 내게 택함을 강요하는
슬픈 조국이여
내가 없어 복지국가 이룬다면
나의 죽음이 문제든가

삽에 맞아 나가 떨어지는 동료의 시체 앞에서
지원서 날인한지 이틀 만에
군용트럭실려
더 많은 주검을 확인키 위하여
임진강의 역사위에
붉은 점을 찍으며
행군의 아침을 목 터져라 부른다
          <詩 삼청교육대 10, 지원서 일부>

추천시인은 이시가 우리 역사의 끔찍한 한 단면을 밝히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있고 또 이 끔찍한 역사를 통하여 재발의 역사가 반복되는 일이 없게 하는데 이 시를 발표의 의미가 있다며 예술성보다는 역사성에 비중을 두어 시를 추천케 되었노라고 천료 배경을 밝히고 있었다.

그랬다. 40여 편의 시들 중에는 예술성이 있는 시들이 많았다. 그러나 추천시인은 그런 예술성 있는 시들보다는 끔찍한 삼청교육대의 진상을 폭로한 시들로 내게 추천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추천시인도 내면적으로는 위장된 삼청교육대를 폭로해야겠다는 의도가 더 많이 깔려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 아니었겠는가 싶었다.

아니, 그 시가 발표되면서부터 진보 문단계에서는 일대 충격의 회오리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이 시를 읽어보는 문인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인간들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하고 치를 떨며 경악해 했다. 정화라는 명분으로 깡패들만 끌고 가 <사람 만드는 교육>을 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죄 없는 양민들을 수없이 끌고 가 인간도살장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광주 무등산<자실>회원 모임에 갔을 때는 <민족문학>신인추천 시인이라고 소개를 하자 선배 문인들은 과분하게도 내게 많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 같이 시 속의 삼청교육대 실상에 놀랐다며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리고 누구나가 주먹을 쥐며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에 대하여 치를 떨었다. 나는 그곳에서 문학운동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많은 문인들을 첫 대면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작을 혁명의 성공이요, 이제 막 걸음마 하는 민족문학 초보운동가에게 열리는 새로운 세상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한결 같이 조국애로 뜨거워진 가슴들을 가지고 있었다. 정의와 인류애를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품어내는 열정적인 시인들이었다. 광주 항쟁 때 <전라도여 광주여, 십자가여>를 용기 있게 발표하여 세계적인 시인이 된 김준태 시인 <직녀에게>로 유명한 민족시인 문병란 시인, 후에 동갑내기 문인으로 활동을 함께 한 고재종시인, 지금은 문예진흥원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는 시인이자 평론가인 강형철 교수, 박선욱 시인, 채광석시인, 박영희시인, 또 해방 시 동인이자 노동자시인인 김혜화 시인,  김기홍 시인, 20대의 약관의 나이에 문단에 머리를 내밀어 이미 대학생 시절에 광주항쟁 관련자로 구속전력이 있는 샘터사 기자 박몽구 시인, 전라도에서 상경한 자실 일꾼 이승철 시인, 나는 손가락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내 문학적 성향과 똑같은 수많은 문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내가 눈뜨지 못한 새로운 세상과 지성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세계에는 그들만이 갖는 민족의 자존과 이 땅의 지성의 뿌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나는 <자실>회원으로서 부산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자실>선배 문인들은 수구적 보수성향이 강한 영남지역 출신인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민족문학>출신의 자부심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특히 얼마 전까지 문예진흥원에 사무총장으로 있었던 강 형철 선배가 당시 내게 준 격려는 지금도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자네, 작품이 발표된 <민족문학> 지면은 아무나 머리를 들이밀지 못하는 귀중한 지면일세, 자네가 그 지면을 통하여 등단하였다는 것은 나중에 큰 자존심이 될 걸세, 훗날 알게 될 걸세>

실제 그의 말은 얼마 있지 않아 내게는 정말 큰 자존심이자 뿌리로 증명이 되었다. 얼마 후 6.10이 터지고 문민정부에 이어 국민의 정부가 탄생되고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시기가 도래 되었을 때 나는 나의 문단 이력이 정말 콧대 센 선비들 집단에서 탄생 된 것임을 새삼 자부심으로 남을 수 있었다.

나는 부산에서 <자실>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회장인 요산 김정한 선생을 만날 모실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수없는 투옥을 거쳤어도 민족자존의 펜을 꺾지 않고 오로지 선비의 꼿꼿함으로 일관한 콧대 센 선비였다. 당시에는 부산대학원 교수로 계셨는데 선생은 민족진영의 횃불 같은 존재였다. 내가 문단 햇병아리로 그분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은 내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등단 이후에 나는 그 어르신께 인정을 받았음인지 새삼 사양하는 내게 <이적이 너, 자실 간사 맡아라 >하며 서울 본부 사무실에 천거를 하여 부산지역 간사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하여도 부산지역에는 선배문인들이 4백여 명 정도 있었어도 민족 진영 측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몇 명 없을 때였다. 기껏 해봤자  평론가 민병욱 교수, 소설가 윤정규 선생, 부산일보 기자였던 임수생 선생 등 이정도가 자신을 드러내 놓고 <자실>회원이라고 떳떳하게 밝힐 정도였다. 물론 후일에 자실회원으로 40여 명을 추천하여 이름만 자실회원으로 올려 두었던 몇 분이 있긴 하였으나 이 분들은 당시 민족문예운동 단체로 거세게 자리매김하고 있던 <자실>에 자신이 소속되어있다는 것을 두려움 반반의 표정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자실>은 군사정부에는 요시찰 단체였으므로 교직이나 공직에 몸을 담고 있던 영남지역 문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실>회원이라는 것은 겁을 내지 않을 수도 없었을 때였다. 아니, 부산경남지역보다도 경북 지역은 더 심한 현상을 보였다. 지금은 대구지역 대학교수가 된 김용락 시인은 전국 회의 때면 그 지역에서 유일하게 혼자만 자리를 차지할 정도이고 보면 그 지역의 문단적 성향이 어떠했는가를 대변할 수가 있다. 나는 오래지 않아 <자실>이 명칭을 바꾸어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개편이 되고 난 후에도 부산지역 간사를 맡고 있었으므로 지방으로 내려오는 수많은 선배 문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문학평론가로서 민족문학을 개척한 백낙청 서울대 교수, <농무>로 유명했던 신경림 시인, 평론가 임헌영 교수, <만다라>의 김성동 선생, <민족시인> 이기형 시인, 김규동 시인, 여류소설가 윤정모 선생, 이경자 선생,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했던 도종환시인, 소설가 송기숙 교수, <장길산>의 황석영 선생 등 나는 민족진영의 전국 명망가 문인들을 오래지 않은 시간에 그들을 만났고 그분들로부터 받은 영향도 컸음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때 만났던 문단 선배 동료들은 내게 최고의 값어치 있는 만남으로 기억되고 있음도 전혀 변함이 없다.

이렇게 내가 민족문단 진영에서 새로운 삶을 펼치고 있을 때 내게는 또 다른 세계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제일 보람차고 값어치 있는 시간으로 기록될 또 하나의 변화였다. 그것은 내가 야학교에서 국어과목을 가르친 것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아니고 약 3년간을 야학에서 무보수 국어선생 노릇을 한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서도 소중한 지인을 만났다. 부산 외대에서 만학을 한 윤기순, 부산대학의 귀공자였던 이대중, 부산산업대의 이찬영, 변상인등 이들은 나의 암울한 시대의 청년기를 함께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며 시대를 고뇌했던 또 하나의 동지들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나는 신학교 출신의 괴짜 시인으로 통했다. 그들은 나의 삶의 역정만큼이나 나의 경험을 소중하게 인정해주었고 나 역시 그들의 순수성에 매료되어 우리는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문단에 등단하면서 내게 새 세상이 열리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풀리지도 않던 문제들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고 그 풀림은 또 다른 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자리매김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필자 소개>

이적 목사 약력

-1957년생 경남 통영 출생.

-1986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민족문학에 <안개속으로><연작시 삼청교육대10> 등으로 신인추천.

-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3년 구금, 88년 <미주중앙일보> 정화작전 연재 91년 <대한매일 창사기념/ 장편소설 적도> 당선, 80년대 군사독재 저항문인 단체였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회원> <민예총 창립회원> 1987년 삼청교육대사건을 최초로 폭로한<삼청교육대정화작전/전예원 87>발간. 이후 <장편소설 북방산계곡의비밀/90광야> 장편실록 <청송감호소 죽음의 그림자> 정치평론<대통령의 늦바람/남풍89>등이 있으며 시집 으로 <바스티유의땅/한겨레 88><이별과절망의둔주곡/ 푸른숲91>< 바다가 된 그대에게/ 새암바다/2000>등 기타 <김대중 살리기 공저><분단과통일시 1,2집/공저><사람과문학/ 공저>등 20여권의 작품집이 있다 현재 저항문인 단체인 <분단과통일시 동인>, <우리시대의시인들 동인>으로 활동 하고 있으며 경기도 김포시 <민통선평화교회담임 목사>로 시무 하고 있음.

이적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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