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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기운을 쐬니까 감기도 뚝 떨어지고<전순란의 휴천재일기-2015.3.17>
전순란 | 승인 2015.03.23 12:20

2015년 3월 17일 화요일, 맑음

서울은 황사가 심하고 날씨도 흐려 곧 비라도 쏟아질 듯 하다는데 지리산 휴천재에는 봄날처럼 포근한 기온에 봄바람도 살랑살랑 불어 매화가 마구 터지기 시작했다.

보스코가 아침을 들자마자 “여보, 어제 손질하다만 배나무마저 하고 잘라낸 가지 중에 당신 벽난로 불쏘시게 할 잔가지들 따로 잘라줄 게.”하며 텃밭으로 내려간다. 속으론 “어? 오늘은 어째서 ‘나중에 할게.’라고 안 하지? 감기를 앓고 나더니 기억상실증 내지 버릇상실증이 생겼나?” 했지만 나도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그를 따라 내려갔다.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기가 승한 풀들은 사방으로 뿌리를 뻗어 세를 과시하고 있다. 상추를 고루고루 심는 터부터 손질에 들어가 풀을 뽑고 거름을 주기로 했다. 방풍, 참나물, 삼채, 섬초롱, 당귀 등이 심겨진 약초밭을 잡초의 행패가 더 심했다.

배나무를 전지하면서 보스코의 발밑에 짓이겨진 부추밭을 다시 만들어 북돋아주고 퇴비도 양껏 넣었다. 상추, 쑥갓, 아욱, 베이질, 로콜라 심을 만한 둔덕 다섯 개를 손바닥씩 만하게 만들어놓았다. 기상예보대로 내일 비가 실컷 오고 땅이 지심을 받으면 다음주초 서울에서 돌아와 씨앗을 뿌려야지. 고 작은 것들이 두 잎을 벌려 손을 내밀면 아침마다 걔들 보고 싶어 밭으로 내달리곤 하지...

올 여름 계획 땜에 텃밭 전부를 쉬게 할 요량으로 감자도 놓지 않았다. 아랫집 도미니카가 요안나 아줌마랑 들깨라도 심겠다는 말을 해 왔는데 카밀라 아줌마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요안나 아줌마가 안 하겠다고 머리를 젖더란다. 텃밭이 따로 없어 땅욕심이 참 많은 아줌만데도 우리 땅에는 농약은 물론 퇴비 외에는 딴 비료도 주지 않고 농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제동댁이 부치고 싶어도 하지만 “농약을 안 주고 어찌 농사를 짓노? 비료 안 주고 어찌 크락카노? 풀은 제초제로 죽여야제 하고한 날 호미 들고 사는가베?”라는 그니의 농사철학 땜에 포기했다. 내다 파는 작물만 아니라 자기들 먹고 자식들에게 뽑아다 주는 채소에도 농약통을 메고 사는 사람들이라 새벽녘 손으로 벌레를 잡고 있는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그래서 올해는 우리 텃밭도 안식년이다. 우리가 아예 이사를 온 지 만 7년이 넘었으니 땅도 쉬면서 세상 돌아가는 생각도 하고, 새해에는 새 작물을 키워낼 생각도 하고, 잡초가 텃밭을 골고루 기름지게 일쿠게 지켜보겠지. 정말 잡초라고 뽑다보면 그 밑의 흙이 얼마나 포실하고 기름진지 모른다. 어느 풀 하나 공짜로 땅을 쓰는 일이 없다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10시 반경 어제 미루씨가 사온 케이크 조각을 들고, 전번에 미루씨가 사다 준 한약초를 넣고 끓인 차로 텃밭에서 간식을 하였다. 땅바닥에 감상자를 엎어놓고 상을 차려 보스코와 이약이약 얘기를 나누며 봄이 오는 먼 산을 바라보는 재미에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그로기로 몰아넣던 감기가 온데 간데 없어진 것도 몰랐다. 역시 땅의 기운을 쐬니까 몸이 봄기운을 되찾은 게 틀림없다.

   
▲ 배나무 전지는 베어내고 잘라주고 끈으로 묶어 휘어주고...
   
▲ 텃밭의 간식
   
 
점심 후에도 나머지 일을 마저 하던 보스코는 세 시가 넘어 책상으로 돌아가고 나는 도미니카씨가 화계에서 얻어온 팬지와 데이지를 나눠주어 식당 앞 나무 화단에 심었다. 해질녘 도미니카네 화단에 꽃이 어찌 심겨 졌나 구경 갔더니 도미니카도 내가 심은 꽃을 보러 따라 올라왔다. 두 여자의 행보를 보면 남들이 어처구니없다고 하겠지만 지리산에서는 늘 있는 일이다.

이사야씨가 산청 비닐 하우스에 풀매는 일로 출장 와 달라는 카스.가 떴다. 그의 농사는 약초농사이지만, 어떤 농사든 결국 ‘풀과의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이치를 미루네도 머지않아 절감할 게다. 평범한 ‘오리궁둥이’ 대신 최신식 ‘풀 뽑는 의자’를 남편에게 선물 받은 미루씨 앞날에 풀과의 협정을 잘 맺으라고 일러주었다.

   
▲ 도미니카네 '소담정' 마당에서 올려다보이는 휴천재(초록지붕)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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