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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로 가는 길<이옥희 선교사의 달릿 이야기 7>
이옥희 선교사 | 승인 2015.03.24 14:01

인도에서 달릿과 아디바시 선교에 전념하고 있는 나에게 인도양에 있는 작은 섬나라 스리랑카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유명한 차생산지이고 불교국가로 기독교 박해가 있으며 싱할리와 타밀족의 26년 정도의 내전이 있었던 나라라는 것이 내가 스리랑카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전부였다.

2011년에 처음으로 스리랑카 사람들이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우리 첸나이 희망발전소의 액세서리를 만드는 직업훈련에 스리랑카 자푸나에서 “제야 라니”라는 여성이 왔다. 그는 스리랑카에 있지만 남인도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자푸나노회의 직업훈련원에서 전쟁고아들과 과부들을 위한 직업 훈련원의 총무로 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방문을 요청하였다.

   
▲ 제야라니 원장(오른쪽 두번째), 코크빌교회 직업훈련원에서
   
▲ 코크빌교회 직업훈련원 학생들과 함께

그 다음 제과제빵 훈련 프로그램에 “다니엘”이라는 60대 초반의 남성이 와서 자푸나노회의 후원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비숍의 요청으로 빈민들을 위한 자립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세 번째로 만난 스리랑카인은 스리랑카 교회협의회 총무인 에벤에셀 목사님이었다. 그는 스리랑카 내전이 남긴 고아, 과부, 장애인들, 빈곤, 마약, 성폭행 등의 심각성을 토로하였고 자리를 같이했던 다니엘목사님과 함께 방문해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과의 만남은 곧 희미하게 잊혀 졌고 기억들은 무의식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도 다양한 루트로 스리랑카 내전 후유증에 대한 소식을 간간히 전해들을 때마다 마음은 아프고 가슴은 울컥거렸지만 그 땅은 내가 밟을 땅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나는 달릿 사역에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이 뜻밖의 비자 문제가 발생하여 나는 1월 인도행 발길을 돌려 스리랑카를 방문하게 되어 착잡한 심정으로 콜롬보 공항에 발을 디뎠다.
도착하자마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로 스리랑카에 있는 남인도교단 자푸나노회 소속 다얄린 목사의 안내로 새벽 5시 콜롬보 발 자푸나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다얄린목사는 자푸나 행 노선이 1984년 내전으로 폐쇄되었다가 작년 8월, 30년 만에 열린 이야기를 감동어린 목소리로 말 했다. 또한 작년 투표에서 당선된 “스리 세나” 대통령과 “러닐 비끄라미 싱거” 수상의 개혁에 대한 기대로 국민들이 모처럼 희망에 부풀어 있다고 했다. 그는 자푸나 공항과 항구가 다시 열리면 북부지역이 내전 후유증을 빨리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콜롬보에서 자푸나의 버두 꼬따이 역까지 300km의 길을 무려 7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하였다.

기차가 북부지역으로 들어서자 관리되지 않은 황량한 야산과 논밭들이 많이 보았다. 논밭이 황폐한 이유를 물었더니 내전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어서 노동할 연령대의 남자들이 부족하기도 하고 지뢰가 묻힌 땅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지난 가을에 비가 오지 않아서 파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라고 하였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산하는 여전히 전쟁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내전의 중심지인 자푸나에서 몇 몇 분들에게 들은 내전의 결과는 너무 참혹하였다. 35여만 명의 사망자들(일반 집계는  10여만 명 정도로 추산), 수 십 만 명의 전쟁 부상자들, 백 여 만 명의 전쟁 난민들이 발생하였으며 자살 폭탄테러, 납치, 성폭행, 가정 파괴, 극도의 빈곤 등등으로 사회 기초가 무너져 버렸다.

1983년에 시작되어 반군의 지도자 푸라바 카란의 죽음으로 2009년 5월에 막을 내린 스리랑카의 내전, 자푸나 행 철길이 무려 30년 동안이나 폐쇄하게 만든 스리랑카 내전의 원인을 사람들에게 물어 보기로 하였다.
26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역사적 퇴행과 파괴를 감수하며 전쟁을 해야 했는가?
왜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철도가 폐쇄되어야 했는가?
작은 섬 안에서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이 계속된 이유는 무엇인가?
북으로 가는 모든 길을 차단하고 통제를 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 샬롬나가교회농장에서 나온 지뢰의 잔해들
짧은 기간이지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전의 이유를 물었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내전의 다수의 싱할리족이 소수의 타밀족에 대한 차별정책을 실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대략 정리를 해보면 국립대학교 인구비례 입학제, 타밀족 거주지에 싱할리족 이주 정책, 공무원 시험 싱할리 우선권, 싱할리 공용어 지정 및 학교에서 타밀사용 금지, 타밀족에 대한 시민권과 투표권 불허, 불교 우대정책 및 국교화, 국가 명을 실론에서 스리랑카로 교체, 국기에 넣은 싱할리 상징인 사자 문양 등등이 국민의 18%를 차치하고 있는 타밀족을 위기감으로 몰아 넣었다.

타밀족의 거주지인 자푸나 지역은 땅이 비옥하지도 않고 농사지을 땅도 많지 않은 까닭에 타밀족은 일찍부터 교육에 눈을 떴고 대부분의 타밀족의 청년들이 대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 강제로 싱할리어로 공부를 해야 하는 막막한 상황과 국립대학교 인구비례제도로 인하여 진학의 길이 차단되고 아울러 공무원의 길도 막히자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며 1965년부터 타밀 분리운동이 시작되었다.

타밀족은 1970년대부터 자신들의 보호를 위하여 정당과 무장조직을 결성하여 싱할라정부에 대항을 시작하였다. 초기 단순히 자기 종족의 보호와 인권을 주장하였던 저항 운동이 타밀엘람호랑이(LTTE)가 결성되면서부터 독립전쟁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스리랑카 26년 내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타밀족의 반정부폭동을 진압하던 13명의 정부군의 자푸나지역에서 죽임을 당한 일로 분노한 싱할리족의 폭동으로 전 스리랑카에서 1000여 명의 타밀족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었다.

같은 해에 타밀엘람호랑이(LTTE)가 결성되었으며 독립을 희망하는 타밀족의 청년들이 타밀호랑이에 참여하면서 항쟁은 가속화되었다. 타밀호랑이는 처음부터 스리랑카 북부지역에 타밀족의 독립국을 목표로 결성된 독립무장단체였으며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타밀인들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았으므로 저항운동은 독립투쟁의 성격을 띤 내전으로 장기화되었다.

결국 스리랑카 내전은 다수인들의 소수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소수인들의 저항의 역사로 스리랑카의 역사를 26년 동안 피로 물들였다.

나는 스리랑카 내전의 역사를 알려고 한 것도 아니요, 또한 알게 된 것도 신문이나 책으로 본 것이 아니라 전쟁을 겪은 증인들을 따라서 지역을 순회하며 고아들, 과부들, 전쟁 장애우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말하는 슬프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전쟁 이야기를 들은 것이어서 목격자로서의 증언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직도 전쟁과 폭력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비참한 생존자들을 위하여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에서 용솟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일까? 아니면 나의 원함으로 그렇게 된 것일까? 나는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스리랑카 북부지역인 타밀족의 거주인 자푸나, 킬리노치 일대를 전쟁 기간 내내 그 지역에서 살며 활동했던 쏘셜워커인 다얄리니와 함께 돌아보게 되었고 트링코말리와 바티콜라 일대를 그 지역 출신의 몇 몇 목사님의 안내로 방문하게 되었다.
 
콜롬보에 있는 타밀족의 교회에서 다얄리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마치 중증 우울증 환자처럼 어둡고 무표정했으며 마치 가뭄에 생으로 말라서 고시라지고 있는 잡초처럼 보였다.
다얄리니는 목회자의 아내로서 갓 결혼한 29세부터 54세 까지 총알이 핑핑 날아다니는 자푸나와 킬리노치 전투 현장을 찾아다니며 전쟁고아들, 과부들, 장애우들, 빈민들을 돌보며 26년 살아온 내전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끝이 없는 폭력의 악순환이 부른 대량 학살, 사지를 잃은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은 빈민들, 고아들의 자립과 회복을 위해 일하면서 지쳐버렸고 파괴된 인간성과 공동체 치유와 화해를 도모하면서 좌절에 직면한 상태였다.
그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에게 서슴치 않고 자신은 출구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거의 자포자기상태라고 소개하였다.

   
▲ 총알 맞은 건물(샬롬나가교회)
나는 그와 함께 5일 동안 전쟁고아, 과부들, 노인들, 빈민들과 장애우들을 차례로 만났다.
하루 한 자리에서 100여명이 폭탄에 맞아서 죽은 비스와마드마을 이야기는 너무 슬펐다. 폭탄이 비처럼 쏟아져서 교회 앞마당에 산산조각 난 사람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피가 시냇물처럼 흘렀으며 그 날 그 마을에 가족을 잃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교회 건물은 불타서 사라졌고 그 자리에 허름한 코코넛 잎으로 지어진 삼각형 형태의 건물이 예배처소로 외롭게 서 있었다.

무리뿌마을에 있는 샬롬나가교회는 1984년과 1989년, 2009년 세 차례의 전쟁터가 되어서 건물들이 거의 다 파괴되었으며 남은 교회 건물마다 총알 자국이 나 있었고 폭탄으로 뽑힌 거목이 뿌리를 드러낸 채 누워서 자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수만 평의 농장을 지뢰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킬리노치 타운에 있는 교회는 전쟁으로 세 차례나 파괴되어서 세 번에 걸쳐서 재건축을 하였으며 이를 증언하는 세 개의 머릿돌이 건물 벽에 붙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6명의 교우들 중에 가족을 잃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어떤 할머니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했다. 다얄린이 자기 입양아들이라고 소개하는 어른을 만났는데 그 분이 50대 후반처럼 보여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전쟁으로 부모를 잃었을 때 십대 후반이었고 그의 보살핌으로 겨우 생명은 살아났지만 고생이 심하여 조로하였다고 하였다.

   
▲ 두 발과 두 손을 잃은 찬드라 섈범
나는 전쟁 장애우들과 난민들을 만났다.
열 개의 손가락과 두 발을 잃은 찬드라 섈범, 폭탄에 쓰러진 나무에 눌려서 두 다리가 마비된 외팔이 엠 꾸마리, 비스와마드에서 하루에 부모형제 일곱 명을 잃은 샤시 말라, 뇌 손상으로 정신 장애자가 된 라주, 온 가족을 다 잃은 깡마른 고아원의 할머니, 오른 팔이 없는 고등학생 다유, 전쟁으로 남편과 집을 잃은 사하여 라니, 언어장애와 수전증으로 고생하는 아가씨 뿌레 말라를 차례로 만나면서 그들의 팔과 발이 되어주고 싶었다.

직업훈련을 받고 가족 부양을 위해서 땅콩을 볶고 있는 니란 첼라, 어머니와 가족부양을 위해 옷 수선점을 연 두르까 샨띠니,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스텔라, 자녀들을 전쟁으로 다 잃고 알콜 중독이 된 남편부양을 위해서 우유 토피를 만드는 카나 암마, 땅 속에 있는 지뢰를 찾아내는 직업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푸쉬파 칸띠, 코크빌 직업훈련원에서 취업을 위해 양재와 미용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의 아가씨들의 밥과 음료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줄 것이 없는 나는 처음 안드라푸라데쉬 데칸고원에서 달릿들을 만나서 날마다 줄 것도 없고 해줄 것도 없다고 운 것처럼 울었다.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인간의 잔인과 포악함이 부끄럽고 죄송해서 울고 참으로 외롭고 힘겹게 고통과 비참을 감수하며 살고 있는 희생자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해서 울고 괴로운 현장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 댜얄린과 그의 동역자들이 고맙고 감사해서 울고 또 울었다.

   
▲ 찬드라 섈범네 가게

둘째 날 저녁 다얄리니가 나에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서 너를 보내주셨다”고 말했다. 나는 그 순간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리하셨다고 생각하니?” 라고 반문을 했다.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지쳤다는 사실을 아시고 너를 보내주신 거야. 오늘 너와 동행하면서 오랜만에 하나님의 임재와 평화를 맛보았어.”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려고 너를 불러 주신거다.”

나는 그의 밝아진 표정을 보면서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정말로 그리하셨습니까?” “그리하셨다면 참으로 가혹하십니다.” 라고 대꾸하며 인도 비자 문제로 반쯤 공황상태에 빠진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을 하였다.

나는 밤새도록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아이들과 사람들의 얼굴과 가시덤불과 돌무더기, 교회와 목회자들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나님께 달릿들을 떠나는 것은 불가하다는 말씀을 계속 드렸다.
“그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회를 떠나서 어디로 가라고요. 사랑하는 샨띠홈의 아이들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고요.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달릿 구원과 해방을 열망하며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는 제가 어디로 갑니까? 이제 달릿을 떠난 저의 삶은 상상이 안 됩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십시오. 제 나이가 곧 60세 입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제 떠나야 할 준비를 해야 됩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 비스와마드 트리니티교화의 어린이집의 아동들

   
▲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 자리에 임시로 세워진 세인트 트리니티교회
다음 날 우리 쎈타에서 훈련을 받았던 제야 라니를 만났다. 그가 나에게 “ 제가 목사님의 자푸나 방문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목사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가슴이 흔들리고 눈물이 쏟아졌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아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는 행전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도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한 초대교회 교우들처럼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창조적으로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단 말인가!
숨이 콱 막혔다. 가슴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 너무 힘듭니다.  왜 제게 이런 고생을 주십니까?”

<필자 소개>

한신대학교, 동대학원 졸업

영주중앙교회, 군산한일교회, 베다니집 등에서 시무.

1997년 전북서노회 파송 인도 선교사로 출발.

1999년 기장총회 파송 남인도 교단 선교동역자로 데칸고원 라열라씨마 일대에서 달리트 선교에 동참해 오늘에 이름.

2007년 7월 13일 전 인도 신학 협회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쉬를 수여.

비전아시아미션 창립 이사(2005년 11월 30일)이자, 비전아카데미(지도자훈련원) 설립 이사(2006년 6월)

인도선교 10주년 기념시집 <비아돌로로사>, 선교 17주년 기념에세이 <선교는 거지다>의 저자

<후원계좌>

국민은행 520702-01-176813 이옥희

이옥희 선교사  yiso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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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라사 오른발 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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