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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냐 자유냐(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저, 이신 (옮긴이) / 늘봄)
편집부 | 승인 2015.03.24 15:27

   
 
책소개

국가와 종교, 자본, 예술, 섹스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을 해부한 『노예냐 자유냐』. 「늘봄 종교철학 시리즈」의 세 번째 책으로 집단보다 우위에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열렬하게 변호하고 증명한다. 저자의 사상의 원숙기에 쓰여진 책으로 저자의 사상을 집대성하며 세계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저자소개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 1874년에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군인을 배출해 왔기 때문에, 그도 유년 시절 사관학교에서 군인 교육을 받았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인문학적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베르댜예프는 부모의 허락을 받아 사관학교 생활을 중단하고 키예프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대학생활을 하던 1890년대는 러시아의 역사적 진로를 놓고 인민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일대 사상적인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베르댜예프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반정부 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볼로그다에서 유형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곧 유물론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특히 그의 사상은 인격이 지닌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극단성과 파괴성을 우려하면서, 1917년에 발발하게 될 러시아 혁명의 성격을 예견하였다. ≪인텔리겐치아의 정신적 위기≫, ≪자유의 철학≫, ≪창조의 의미, 인간의 정당화 경험≫과 같은 책들은 바로 베르댜예프의 이런 사상의 초석을 놓은 저서들이었다.
베르댜예프는 학문적인 명성 덕분에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20년에는 모스크바대학에 교수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권은 사회주의 건설에 걸림돌이 될까 우려하여 일군의 지성인들과 함께 그를 국외로 추방하고 말았다. 그는 그 이후에 베를린과 파리에서 종교철학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활발한 강연 활동과 저술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는 추방 시기에 자유와 인격에 대한 해석을 역사철학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역사의 의미≫, ≪새로운 중세≫, ≪러시아의 이념≫,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과 의미≫ 등과 같은 명저들이 출간되어 나오게 되었다. 여기 번역한 ≪현대 세계의 인간 운명≫은 1934년에 출간된 베르댜예프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현대의 성격을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베르댜예프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 공산주의, 히틀러 치하의 독일 파시즘 체제, 그리고 서구의 자유주의 체제를 독특한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에 따르자면, 이 세 체제는 얼핏 보면 서로 간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비인간화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체제들은 폭력적인 방식으로나 자본의 힘을 가지고 하나같이 인격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댜예프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기독교에 근거를 둔 영적 능력의 계발을 통해서 찾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베르댜예프는 현상으로서의 기독교 조직에는 그다지 만족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질주의, 초월적인 이기주의 등에 물들어 있어서 진정한 기독교적 사명을 담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가 편협성을 버리고 사랑과 자유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회복함으로써만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듯 우리는 여기 번역한 ≪현대 세계의 인간 운명≫을 통하여 현대 사회에 대한 베르댜예프의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시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신(옮긴이)

-이신 박사는 1927년 7월 7일(음력) 전라남도 돌산에서 아버지 이봉선 씨와 어머니 유금옥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건너가 부산 ‘초량상업학교’(부산상고 전신)를 다녔다(1944년 졸업). 이신 박사는 이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당시 일본 사람들이 세운 부산 시립도서관의 미술 서적을 거의 다 읽었을 정도로 미술에 관심을 두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은행에 취직했고 해방을 맞던 해에 혼인을 했으며, 1946년에부터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좋은 직장으로 손꼽히던 은행원 자리를 그만두고 고생길이 훤한 신학을 공부하겠다니 부모님이 거세게 만류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예술을 탐구하며 얻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구로 그는 미술 도구를 모두 팔아서 서울행을 결행,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한다(1946년 봄). 1950년 5월, 6·25가 발발하기 직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도 전의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다 6·25가 터지자 고향 전라도로 돌아가 활동한다. 당시 전라도 일대엔 초대교회로의 환원을 통한 교회 일치를 주장하는 자생적 기독교운동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이 일어났다. 이신 박사는 1951년 광주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연합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서적이며 근본적인 교회임을 깨닫고 당시 이 운동의 중심인물인 김은석 목사 등과 교류하여 환원해 목사 안수를 받고 충남 부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여기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이만수(李萬修)에서 이신(李信)으로 고친 것도 이때였다. 성령의 당해설을 주장하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들과 달리, 성령의 현재적 역사를 체험하고 강조하여 선교사들과 대립한 끝에 부여교회를 사임, 전남 영암 상월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다 다시 상경해 힐(Hill) 선교사를 만나 신학교 일을 도왔다. 그 후 충북 괴산 수리교회로 옮겨 목회하면서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부산에서 방송 선교에 전념하다가 서울 돈암동 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였다. 이 교회를 사임한 후 마흔 살 늦깎이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림을 그려 학비를 조달하고, 고국에 있는 가족(아내와 네 자녀)의 생계까지 짊어지는 고학 끝에 1967년 5월 네브라스카(Nebraska) 크리스천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8월 드레이크(Drake) 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드레이크 대학교를 한 해 다니다 1968년 9월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전학하여 신학석사 학위(1969. 12)와 신학박사 학위(1971. 5)를 받고 귀국한다. 귀국한 직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강사(문화신학)로 일했으며 중앙신학교(윤리학), 그리스도신학대학(히브리어 및 신학), 대한기독교신학교(서울기독대학 전신, 조직신학) 등에서 가르쳤다.
미국 출신 박사가 귀했던 시절 그는 출셋길이 보장되었지만 주요 교단 소속이 아니었기에 교수직을 얻기가 어려웠다. 소속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내 사정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국내 어느 신학자도 따르기 어려울 만큼 영어와 일어는 물론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능통한 지성이었지만, 그는 주요 대학에 진출하지 못한 채 산동네 목회를 계속 하였다. 그는 산동네에서 정신박약아 등을 모아 돌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부귀영화와 신앙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신념을 택하며 산 것이다. 또한 오직 ‘밥’만이 추구됐던 1960년대, 미국 유학도로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물질화하고 경직화해 창조적 상상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기독교 신앙의 한국적 자주성을 역설하였다.
허기진 물질적 곤궁 속에서도 그는 결코 창조성을 잃지 않았다. 그랬기에 비록 주요 교단으로부터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도외시당했지만 그가 외친 광야의 소리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다시금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들이었다.

목차

서문: 나의 사상의 모순성에 관하여

1장 인격
2장 상전과 노예와 자유인
3장 존재와 자유: 존재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4장 신과 자유: 신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5장 자연과 자유: 우주적 매혹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6장 사회와 자유: 사회적 매혹과 사회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7장 문명과 자유: 문명과 문화적 가치의 매혹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8장 자아와 자유: 인간 자신에 대한 노예성과 개인주의의 매혹
9장 통치권의 매혹과 노예성: 국가의 두 얼굴
10장 전쟁의 매혹과 노예성: 전쟁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11장 민족주의의 매혹과 노예성: 국가와 국민
12장 귀족주의의 매혹과 노예성: 귀족주의의 두 얼굴
13장 부르주아 정신의 매혹과 노예성: 재산과 금전에의 노예성
14장 혁명의 유혹과 노예성: 혁명의 두 얼굴
15장 집단주으의 매혹과 노예성: 유토피아의 유혹과 사회주의적 두 얼굴
16장 에로스적인 매혹과 노예성: 성, 인격, 자유
17장 미적 매혹과 노예성 : 미, 예술, 자연
18장 인간의 정신적 해방: 공포와 죽음에 대한 승리
19장 역사의 매혹과 노예성: 세 종류의 인간, 역사의 종말에 대한 해석,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종말론

역자 해설
재출간에 붙여서

N.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李信 譯의 재출간에 붙여서

1981년 12월 17일은 이 책의 역자인 李信 목사님이 돌아가신 날이다. 이 책의 역자 서문을 쓰신 후 2년여 만이기도 하다. 살아생전에 그렇게 인격의 창조성과 자유를 강조하셨고, 온갖 종류의 노예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사셨으니 얼마나 그 삶이 어렵고 힘들었을까를 다시 생각해본다.

저자 베르댜예프는 이 책을 1930년대 말에 파리의 망명지에서 썼다. 러시아의 귀족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었지만 볼셰비키 혁명의 잔혹함을 경험하고 서방으로 피신 와서 다시 나치의 파시즘을 겪으면서 그는 인간 실존의 깊은 모순성을 탐구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적나라하게 노정된 서구 근대 문명의 명암을 그는 인간 인격의 위대성과 창발성과 더불어 그 반대의 모습으로 인간 노예성의 여러 측면을 두루 탐색하면서 잘 밝혀냈고, 그것으로써 이미 자신의 30년대에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잘 지시해주었다.

이 책이 원래 쓰인 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 처음 번역된 1979년으로부터도 30년이 더 지났지만 이 책의 사고와 언어가 보여주는 현실성과 시대 적합성은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그는 특히 오늘 우리 시대에 들어서 누구나 심각하게 겪고 있는 돈과 자아에의 노예성을 인격에 대한 심각한 반정립으로 그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자아주의는 인격을 파괴한다. 자아중심적인 자기집중과 자기에게서 떠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원죄인데, 그렇게 자아중심적인 인간은 노예이고, 나 아닌 것not-I 일체에 대한 그의 태도는 노예적 태도라는 것이다. 그런 노예성 속에서 부르주아 인간은 나 아닌 것만을 의식하고, ‘他인 나’는 알지 못하고, ‘당신’을 알지 못하며, 그 자아로부터 나가는 자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000쪽) 오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대 주체성 시대의 큰 위기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절실히 느끼고 있는 병과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르댜예프는 다시 오늘 우리 시대의 민중의 아편은 오히려 “유물론, 무신론, 공리주의” 등이라고 지적했다.(000쪽) 유물론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급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도 또 하나의 돈과 자아에의 노예성이라는 그의 비판은  매우 신랄하고 타당하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물질만연과 경제제일주의 시대에 민중은 오히려 물질의 노예성에 쉽게 빠지고, 그들이 믿는 종교도 한갓 돈의 노예성을 더욱 곤고히 하는 유물론적 수단이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공리주의가 오늘 세계 정치와 경제, 교육, 문화 등 모든 인간 삶을 결론짓는 원리가 되었음을 우리가 안다. 그래서 베르댜예프는 오늘 우리가 새로운 사회 질서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참으로 심각한 금욕주의의 경험을 통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000쪽)

하지만 그는 또한 분명히 밝히기를 “신의 나라는 명상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고 했다.(000쪽) 그것과 더불어 오늘 부르주아 세대가 쉽게 빠져드는 미적 매혹의 노예성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히기를 그러한 탐미주의적 매혹과 노예성은 “불가피하게 진리에 대한 무관심을 동반”하고, 그것이 “가장 두려운 결과”라고 했다.(000쪽) 오늘 우리 시대 졸부들이 빠져있는 문화주의에 대한 강한 경고가 되겠다. 이렇게 그의 모든 지적들은 1930년대에 행해진 것이고, 한국사회에 처음 번역되어 소개된 것도 1970년대 말이지만 그것들은 마치 오늘 우리 시대를 위해서 처음 쓰인 것처럼 생생하다. 그만큼 오늘 우리 시대가 인격의 창발성에 대한 믿음을 잃고서 각종 노예성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 삶에서의 근본적인 대립은 정신과 물질의 대립이 아니라 자유와 노예성의 대립이고, 우리 인격 실현의 근본문제는 물질의 결정론에 대한 승리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노예성에 대한 전면적 승리의 문제라고 분명히 밝혔다.(000쪽) 그가 그 노예성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화두로 제시하는 ‘인격’은 그에 따르면 우주의 일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가 그 일부분이다. 그것은 세계에서 “예외이지 법칙이 아니고”(000쪽) 결코 일원론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이원론에 속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 시대의 모든 일원론에 대해서 강하게 ‘no’라고 하면서 하나의 세계가 아닌 두 세계에 속하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인격성을 다시 회복하고 창조하고 행위하는 일 가운데서 자신을 초극하면서 새로운 우주적 공동체적 삶을 열어가는 길을 제시한다.

1979년 번역본이 처음 나왔을 때 역자 李信은 두 개의 그림을 그 안에 담았다. 먼저는 표지화로 「존재의 변증법」이라는 제목으로 역자 자신의 그림을 넣으면서 ‘자유’와 ‘평화’로 상징되는 비둘기와 ‘현실’을 나타내는 물고기, 또한 ‘백’이 상징하는 ‘부자, 권력가, 귀족’과 ‘흑’이 상징하는 ‘빈자, 피권력가, 소시민’, 이 둘이 서로 맞껴안은 모습에서 인류의 근원적인 화해와 사랑과 상호 신뢰가 회복되기를 열망하는 모습을 본다. 두 번째 그림은 내면지의 그림으로 「감사의 공물」이라는 제목의 폴 고갱의 그림이다. 고갱 타히티 시대의 가장 힘찬 목판화라고 하는 설명과 더불어 여기서 고갱은 서구 미술과 서구 문명 전체의 혁신은 ‘원시인’the Primitive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역자는 당시 박정희 시대 말기의 혹독했던 시간에도 인간 정신의 초월적 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으면서 그 인격의 힘에 근거해서 한국 사회 뿐 아니라 세계가 다시 원래적인 화해와 상호 신뢰와 사랑의 삶을 회복하기를 염원했다.

당시 도서출판 人間에서 나온 이 책은 그 후 출판사가 문을 닫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구할 수 없는 책이 되었다. 또한 시대도 많이 변하면서 베르댜예프의 심각한 실존주의적 성찰이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30여년이 지난 후 한국 사회의 상황은 더할 수 없는 비인간화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고 있고, 국가 권력과 혁명, 전쟁과 경제, 미적 매혹과 에로스의 노예화 등, 총체적인 노예화 앞에서 이 책의 메시지가 더없이 요청되는 상황인 것을 본다. 늘봄출판사는 그것을 알아보고 초판의 책을 힘겨운 워드작업을 통해서 다시 원고로 살려냈고, 나는 지난봄부터 그것을 교정보면서 다시 한 번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런 모든 작업을 가능하게 해준 늘봄출판사의 이부섭 편집장에게 깊이 감사한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책이 벌써 출간되었어야 했다. 봄에 시작해서 여름에는 적어도 마치리라 생각했지만 뜻밖에 4월 16일 세월호 참화를 겪으면서 여러 가지 긴급하게 써야하는 글들과 일들로 많이 늦어졌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이 책이 빨리 출간되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 전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만큼 이 책의 메시지가 오늘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이번의 교정작업에서 원역자의 언어를 거의 대부분 살렸지만 너무 시대적으로 낯선 것들은 다듬었다. 또한 이번 작업에서 당시의 번역본에는 원래 책에 있던 ‘혁명의 매혹과 노예성’ 부분이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그 부분은 새로 번역해서 넣었다. 추측컨대 당시 박정희 시기 말기의 한국 사회와 정치의 상황이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빼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번역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적 상황에 시사해주는 바가 무척 큰 것을 보고 뒤늦게나마 넣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여긴다. 베르댜예프는 혁명의 진실과 정의는 삶에 독을 끼치는 너무도 잘못되고 부패한 과거를 부순다는 사실에 있지만 그것은 다만 “평균적 인간에 의해서 평균적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커다란 공포와 폭력에 비해서 너무도 작은 소득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혁명이 노예성의 진정한 승리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이고, “새로운 인간의 나타남은 하나의 새로운 영적 탄생”이라는 것이 그의 확고한 믿음이다(000쪽).

아직도 더 다듬을 것이 많이 있고, 특히 아버지가 쓰셨던 판본과 이번 개정을 위해서 내가 참고했던 판본이 꼭 일치하는지 알기 어려웠지만, 이대로 내놓기로 했다. 불효의 마음과 부족한 마음이 크다. 또한 오히려 나의 작업으로 원 번역의 역동성과 생생함이 손상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떨치기 어렵지만 오늘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해서, 한국 사회의 나아갈 길을 위해서, 그리고 지구 인류의 앞길을 위해서 꼭 필요한 책이라 여겨서 하루빨리 독자들의 손에 다시 돌려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내놓는다.

2014년 12월 17일 부암동 언덕에서 이은선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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