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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張俊河)와 그의 일단 성지임천(聖地臨泉)에 이르다 3<문대골 칼럼>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3.25 17:34

장준하는 자신이 ‘죽자’는 싸움을, 박정희는 너를 ‘죽인다’는 싸움을 살았다. 장준하는 거룩한 싸움을, 박정희는 살인마의 싸움을 싸운 것이다. 그 싸움이 아주 구체적으로 표출된 곳이 안휘성(安鰴省)의 임천이었다. 1944년 박정희가 일본군사관으로 천황폐하를 위해 죽겠다고 맹세하던 바로 그 해, 장준하는 대한민국 광복군 사관으로 대한민국 자주 독립을 위해 죽을 것을 맹세했다. 그래서 장준하의 임천은 실로 박정희와의 대척지(對蹠地)였다는 것이다. 필자가 임천을 장준하사(張俊河史)의 성지라고 일컫는 이유다.

이어서 우리는 장준하가 광복군의 사관으로 임명되기까지 임천군부에서의 ‘삶의 모습’을 주목,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일의 사람’ 장준하를 말이다. 일찍이 함석헌은 자유당 치하에서, 박정희의 군부독재 하에서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저항의 대오를 지어 열찬 투쟁을 부단히 지속하는 장준하의 의기에 감동, “장준하에게는 일감이 있다. 그는 어떤 대상에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라며 감탄을 마지못해 한 적이 있지만 실로 장준하는 일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일의 결과를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로 매진, 그렇게 한 자세로 그의 삶을 살고 갔다.

<교양강좌>와 <등불> 창간

1. <교양강좌>
장준하가 쓰까다를 탈출, 임천에 도착한 것이 1944년 9월 10일이었고, 중경을 향해 임천을 떠난 것이 11월 21일이었으니 그와 그의 일단이 임천에 주둔(?)해 있던 기간이 불과 70일이었다. 장준하의 갈 곳이 중경, 중경이 목적지이니 임천은 임시로 머무는 곳이었지만 장준하에겐 임시 거처와 정처가 따로 없었다. 자신이 지금 머무는 곳이 곧 보냄 받은 곳이었고 순간순간이 과제와 함께 주어진 시간이라 장단(長短)의 시간이 다름없이 온전히 드려져야만 했다. 그는 제물(祭物)로서의 생(生)을 요구받았고, 지존의 요구대로 제물로 드려갔다.

임천의 한광반 생활은 의외로 부실했다. 한광반의 지휘관들, 교관들의 자세 또한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나라는 이미 망해 버렸고 역사는 지워질 대로 지워져가고 있는 때,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이라는 그 이름이 장준하의 모골을 송연(悚然)케 하는데 반하여 훈련반의 나날은 역사의 사람 장준하에겐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교양시간이라는 건 완전히 엉터리인데다가, 훈련이라는 건 만기(萬氣)가 빠져있었다. 역사가 부여한 시간, 조국이 조국의 부활을 위해 부여한 시간을 이렇게 허비한다는 것은 <계약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장준하에겐 바로 범죄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하늘이 하늘뜻을 담아 부여한 시간이라면 그 하늘뜻을 이루는 일에 드려져야 한다. ‘계약의 나’를 사는 사람에겐 어떤 것도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신 분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계약을 이루는데 쓰여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장준하에겐 「따라 사는 삶」은 바로 범죄였다. 그것은 군대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가 깊이 잠든 깊은 밤, 장준하는 바로 옆자리에 누운 김준엽을 흔들어 보았다.
“김형, 우리가 언제 중경행을 하게 될지 알 수가 없지만 이렇게 나날을 허송해서는 안 되지 않겠소.”
김준엽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대원들이 잠들어 있는데 더 이상 소근대는 말도 안면 방해가 될 것이니 내일 시간을 내서 몇 동지들과 더불어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하고 장준하도 김준엽도 깊은 잠에 들었다. 군부대 안에서, 더구나 훈련병 기간의 시간표를 훈련병 자신들이 짜보겠다니 하늘이 웃을 일이자, 노할 일이었다. “내 삶은 내가 산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장준하는 자신의 삶은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살아낸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만격(萬格)을 이루고 있었다.

생(生)의 존엄! 하늘 아래 땅 위에 훈련병이 훈련기간의 훈련계획을 자신이 짜겠다고 덤비는 놈이 장준하 말고 또 있었을까? 군사사(軍事史)의 조예가 깊지 못한 필자로서는 그 유(類)를 알지 못한다.

이튿날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가 점심시간과 이에 이어지는 휴식시간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장준하의 가장 큰 불만이 거의 매일 이어지는 2-3시간의 강좌시간이었다. 강좌 내용의 부실함과 허함이 견딜 수 없게 했다. 장준하는 그의 돌베개에서 그때의 분위기를 “새로운 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태는 새로운 적으로, 우리를 자포자기 속에 빠지게 했다. 타락이라는 차원이 우리를 맴돌았다.”(돌베개 147쪽·思想社 1971.5.20.) 그러나 개혁은 용기만으로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도의 지략이 요구된다는 것을 장준하는 깊이 터득하고 있는 터, 우선은 남아도는 시간을 활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준엽, 영문학을 전공한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출신의 윤재현(尹在*), 법학을 전공한 동북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출신 김용민(金容旻)이 의외의 적극성을 띄면서 동참해준 것이 더 할 수 없는 힘이 되었다.

교양강좌에 이미 크게 실망한 장준하는 자신들이 스스로 하는 강좌를 통해 한국광복군반 수강생들의 뜨거운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이 불길이 자연스럽게 한국광복군반 정규강좌로 점화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었다. 꿈과 이상에 의해 전진하는 역사는 없다. 역사는 깬 혼의 투신과 헌신을 요구한다. 장준하는 정말 신비스럽다할 만큼 역사(役事)를 만드는데 몸뚱이를 내던지는 사람이었다.

필자는 임천의 <중앙군관학교 대한민국 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장준하에 의해 시작된 <자율강좌>가 그 이후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떤 결과를 이루었나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사실을 지나치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그 같은 사건들을 통해 나타나는 장준하의 삶(生)을 말하려 한다. ‘어떻게, 무엇을 살 것인가?’는 우리는 물론 곧 하늘이라고까지(人乃天) 말하는 그 <사람>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장준하의 생각, 계획, 추진은 적중했다. 각 부문의 전공자들이 강좌과목을 나눠 맡아 자유강좌를 시작한지 일주일이 채 되기 전 한광반에 새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10일쯤 되었을 땐 그 새바람(新風)은 광풍(狂風)이 되어 한광반을 휩쓸었다. 중국중앙군관학교(임천분교)에서까지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강사(講師)들의 자세였다. 필기도구마저 변변치 않을 때, 강의를 맡은 강사들은 자신들이 놀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들의 한 위대한 자산처럼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라땅 빼앗기고 역사가 짓밟힘을 당해도, 부모도 형제도 아내마저 생이별해 천하의 슬픔을 씹어 삼키면서도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하늘의 명(命)이 있다니 말이다. ‘오늘을 살아내는 것’, ‘오늘의 명(命)을 지상(至上), 지성(至誠)으로 사는 것’ 말이다. 장준하는 이 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강사들 보다는 수강생들이 더욱 뜨거운 열심을 내면서 <판>을 새로 짜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잡지 <등불> 창간
강좌에 참여한 수강생들로부터 그 강의록을 좀 빌려보자는 요청이 쇄도하게 된 것이다. 그 또한 사명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이었다. 미래사의 주역은 화려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다. <목전의 과제>에 미쳐 사는 사람이다.

   
▲ 1944년의 장준하
장준하는 그랬다. 강의록을 좀 빌려달라는 수강병들의 강청에 강사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할 때, 거기 역사 장준하가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계시처럼 장준하를 뒤흔들었다. 강사들의 강의안을 모으고, 대원들의 수필, 서사문, 생활일기, 단상 등의 글을 모아 잡지형태의 회지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개체 속의 생각들을 끌어내 공유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장준하가 의식리(意識裡)에 였거나 무의식리(無意識裡)에 였거나, 한국사 100년에서도 만날 수 없는 민주주의 지도자로서의 초석을 놓게 한 사건이었다. 대중의 생각, 의식을 한데 모아 공유한다! 이렇게 해서 창간(?)한 것이 잡지 <등불>이었다. 임천에서의 한광반 70일 주둔기간 동안 장준하는 제1호, 제2호를 발간하게 되는데, 장준하는 이 성역(聖役)에 실로 진액을 쏟았다. “맨땅에 가마니를 깔고 기거하는 병사(兵舍)”에, “매일매일 뒤지로 쓸 종이도 없어 나뭇잎을 사용하는 판국”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잡지였다. <한국광복군본부>에서도 못하는 일이었다. 장준하는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김준엽과 함께 <중국중앙군관학교>의 임천분교를 찾아 중국의 지휘관들을 상면하여 기어이 잡지를 제작할 수 있는 분량의 선화지를 얻어냈다.

독자들이여, 독자들은 조선이 낳은 이 역사의 아들을 기억해야 한다. 생사를 넘나들며 명(命)의 길을 오직 한맘 품고 직선으로 걷는 사람, 사람이란 점에선 우리와 티끌도 다름이 없을 그 아니겠나! 추위에 떨며, 주림에 허기, 지침에 깊은 실의(失意). 장준하라고 예외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장준하는, 장준하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랬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정글에서 창칼을 들 수밖에, 폭약을 내던질 수밖에 없는 한의 땅에서 사람(민중·民衆)의 혼을 지켜낸 사람, 그 혼을 더욱 키워 역경의 나라에 기여한 사람 장준하를 기억해야 한다.

복이란 구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구해서 받았다면 참 복일 수 없다. 내가 나를 선뜻 내줄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한 사람, 그 대상이 무엇이었든지 말이다. 그것이 참 복 아닌가? 받는 것이라면,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무슨 복이라 하겠는가? 주고 또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종국에는 모든 것의 구심(求心)이 되는 나(自我)를 통째로 내어주는, 그것도 어느 때만이 아닌 일생을 그렇게 살아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축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장준하는 그렇게 살았다!
독자여, 우리는 그 장준하를 알아야 한다. 찾아야 한다. 찾아서 살아내야 한다. 장준하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말이다.

잡지 <등불>을 만드는 장준하를 보는 동료들은 놀라지 말라. 생의 변화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잡지의 모양, 잡지의 내용이 아니었다. <등불>을 만드는 장준하의 자세였다. 첫 호의 잡지편집을 다 마친 후 장준하는 잡지의 표지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 앞에 웬 동료가 깨끗한 천(Textile) 한쪽을 장준하 앞에 내놓는 것이었다. 장준하의 정성을 쭉 지켜본 한 동료가 자신의 내복을 깨끗이 빨고 또 빨아 말려 표지를 할 수 있도록 잘라낸 것이라 했다!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준하가 우니 그 동료도, 곁에 있던 또 다른 동료도 함께 울었다. 생(生)의 거룩을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장준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중경을 향하여 임천을 떠난다. 장준하의 가슴엔 두 권의 <등불>이 안겨 있었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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