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서평 단신
나를 표현하는 단숨에 글쓰기(김서정 저, 동연)
편집부 | 승인 2015.03.30 15:29

   
 
글쓰기 앞에서 아직도 머리를 쥐어뜯는 당신에게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글을 써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보고서를 정교하게 작성해야만 해고를 당하지 않고, 보도자료를 튀게 내야만 조직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고, 협정문을 교활하게 써야만 국가에 손해를 끼치지 않고, 짜깁기하더라도 과제를 제출해야만 낙제가 없고, 줄거리만 채우더라도 독후감을 써내야만 선생님한테 혼나지 않고, 문구를 베끼더라도 연애편지를 보내야만 미적지근한 사랑에 불을 댕길 수 있고, 친구가 없을 때 울적하거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려면 어딘가에 뭔가를 적어야만 감정에 변화가 일어나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다.
 

하지만 글이라고는 스마트폰으로 날리는 ‘카톡’이나 에스엔에스에 올리는 짧은 일기가 전부인 상황에서 글을 써야 하는 일은 여전히 머리를 쥐어뜯게 만든다. 대중매체에 노출되면 노출될수록 사유하는 시간은 적어지고, 자신을 알아보려는 철학도 사라지며, 막상 글을 써야 하는 상황에 닥치면 다른 사람의 글을 훔쳐보기에 바쁘다. ‘글치’라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면 글쓰기는 몇몇의 글 잘 쓰는 사람들이나 해야 하는, 삶과는 괴리된 것이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잃어버린 글쓰기라는 생활의 도구, 사유의 도구, 치유의 도구, 자기 회복의 도구를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나를 표현하는 단숨에 글쓰기’라는 방법을 제안한다.
 

‘나를 표현하는 단숨에 글쓰기’는 글쓰기 방법론이면서도 삶을 살아가는 유용한 도구로 저자가 직조해낸 삶의 방법론이다. 글쓰기와 삶의 정리는 상호 피드백하는 효과를 준다. 순간을 내밀하게 기록한 글쓰기를 통해서 삶을 정리하고 삶을 단단히 여물게 할 수 있으며, 그런 삶을 살면서 글쓰기를 하면 재차 내면을 다지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저자는 그 단단히 다져진 내면의 목소리는 더 나아가 아무리 심한 절망의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삶을 다시 일구어낼 힘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저자소개

김서정
1966년 강원도 장평에서 태어났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2년 단편 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 소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어린이 인물 이야기 《신채호》, 《김구》, 《마의태자》 등을 썼고, 북한산 산행기로 산문집 《백수 산행기》, 먹거리와 몸을 성찰하는 에세이 《나를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다이어트》, 평화 산문집 《분단국가 시민의 평화 배우기》를 지었다.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일했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출판 편집일과 글쓰기 그리고 글쓰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목차

이 책을 쓴 이유


| 1강 | 나는 거대한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글쓰기의 중심은 글이 아니라 나
나를 더 넓게 사유하는 힘
사례 ①

| 2강 | 나는 현재의 앎에 확신을 갖고 산다
사상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나만의 인식 세계도 썩 괜찮다
사례 ②

| 3강 | 글은 마음과 몸으로 쓴다
마음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려라
마음에서 몸, 사물, 공간으로
사례 ③

| 4강 | 원초적 감정 표현이 살려는 의지이다
만들어진 감정을 자각하는 힘
행복한 감정이 최고의 목표는 아니다
사례 ④

| 5강 | 왜 글쓰기로 살려는 의지를 다져야 하는가?
말로 풀고 싶어도 말을 풀 데가 없다
지금까지 배운 글쓰기 관점을 살짝 비틀자
연습 ①

| 6강 | 내가 살려는 의지를 다지는 글쓰기의 세계
나를, 표현하는, 단숨에, 글쓰기란 무엇인가?
글쓰기로 감정 조절이 가능할까?
연습 ②

| 7강 | 글쓰기여, 내게로 오라
내 글에 자신감을 갖는 법
좁은 나에서 더 넓은 나로
연습 ③

| 8강 | 글쓰기의 지평을 확대하며
이제 나도 글쓰기 영역을 넓힐 수 있다
진심으로 쓰는 나의 진언(眞言)
연습 ④

저자의 말

살려는 의지를 다지는 나만의 글쓰기

세상사 자기 뜻대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내 글을 쓰기보다 훨씬 덜 고통스러운 일을 하며 월급을 받고 그것으로 가정을 꾸리며 평범한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수순 말이다. 다수가 그렇게 사는 인생을 나는 사십 줄이 넘어 이어 가지 못했다. 출판 기획편집자로서의 능력 부족으로 자의반 타의반 출판 동네를 떠나야 했다.
 

참담함으로 잠시 동안 절망의 세월을 보내던 나는 삶을 회복시켜야 할 정신적인 원동력을 찾아야 했고,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대상이 본래 친하지 않았던 산이었다. 새 삶의 희망을 부여잡고자 집에서 가까운 북한산을 죽어라 다니기 시작했다. 줄기차게 발로 산을 밟고 눈으로 산 아래 풍경을 보던 어느 날 운명처럼 내 안에 글쓰기 욕망이 다시 솟아올랐다. 산이 나를 변화시켜 가고 있는 느낌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한 줄이라도 정리해 놓지 않으면 다음 산행은 의미 상실이었다.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추어올리는 북한산을 더 꽉 붙들기 위해서라도 글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오랫동안 무거운 돌에 억눌려 있던 글쓰기는 이렇게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 무렵 나는 반강제적으로 또 다른 글도 써야 했다. 서대문형무소를 시민들에게 안내하는 평화길라잡이 자원활동을 시작했는데, 활동 후기 쓰기는 평화길라잡이의 기본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그 후기 또한 진심을 다해 썼다. 평화길라잡이 활동을 하기 전까지 이른바 변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마오쩌둥의 실천론과 모순론에 근거해 세상을 보았던 내가 이제는 한쪽의 소멸이 아닌 평화와 공존을 이야기해야 했고, 의도된 노력들이 산행처럼 내 정신세계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기 때문이었다.
 

산행 후기와 활동 후기를 쓰는 동안 프로이트 책을 보고 내가 꾼 꿈을 썼던 20대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록 열흘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순간의 일들을 빠르게 써나가는 훈련이 그때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논리가 있든 없든 보고 느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장 빠르게 떠오르는 단어로, 절대 보태거나 빼지 않고, 적는 순간의 느낌을 차곡차곡 문장으로 만들어 카페에 올렸는데, 그런 내 글에 몇몇 사람이 댓글로 나의 심적인 변화 과정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내 글과 댓글이 교감하는 듯 보였다. 그때마다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았다. 거기서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20대 무렵 한 줄의 명문장을 만들기 위해 밤새 고통스러워했던 흔적은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 담겨 있던 생각과 느낌들이 여과 없이 일상의 언어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더 놀라운 기적은 내가 그 글을 다시 읽고 있으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생각이 정돈되면서 인생을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다져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내가 쓴 글이 잘 쓴 글이고 못 쓴 글이고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로지 그 글에 내가 어떻게 녹아들어가 있는지, 내가 어떻게 사물을 성찰했는지, 내 앎의 깊이가 얼마나 더 진전되었는지, 내가 살아갈 이유를 어떻게 찾고 있는지 등등 내면의 목소리에만 관심을 쏟게 되었다. 한 편의 후기를 쓸 때마다 내면이 부쩍부쩍 성장하는 듯했는데, 일종의 영적 체험 같았다.
 

소설 쓰기와는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확실히 다른 나만의 후기를 쓰면서 글쓰기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소설 쓰기는 나라는 몸과 생각과 마음을 활용해 소설과 명예와 부를 얻으려고 했던 외부 지향적 행위였지만, 후기 쓰기는 나라는 몸과 생각과 마음을 활용해 더 나은 몸과 생각과 마음을 얻으려고 했던 내부 지향적 행위였다. 물론 소설 쓰기가 누군가에게는 외부 지향적인 행위가 절대 아니고 내면 탐구의 도구이자 목적이면서 자아실현의 길이기도 하지만, 나 같은 경우 소설을 쓰면 쓸수록 삶이 황폐해진 현상을 보면 아무래도 ‘제사보다 젯밥에 정신이 간다’는 속담이 어울리는 속물근성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했다. 즉 소설을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글과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가 처음부터 욕망으로 인해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글쓰기 관점이 달라지고 나니 그 뒤로 글쓰기 부담이 사라지고 글쓰기가 내 삶에서 중요 요소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내 글이 독자들에게 읽히고 읽히지 않고의 문제도 관심사를 떠났다. 글쓰기 전략 전술도 당연히 필요 없었다. 글쓰기를 통해 내면의 힘을 키우고, 삶의 의지를 다지고, 사물의 이치를 깊이 깨닫고, 삶의 이유를 찾으면서 성큼성큼 커 나가면 그만이었다. 자아가 있고 없고의 심오한 세계를 사유하면서도 우선은 자기의 실체를 알아 가고, 자기의 위치를 인식하고, 자기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글쓰기를 통해 주위를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 …

이쯤에서 내 삶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준 나만의 글쓰기가 무엇인지 궁금할 듯싶다. 본문 강의 사이사이 사례라는 타이틀로 게재한 글들이 있다. 내가 전에 썼던 글과 이 책을 쓰면서 쓴 글들이다. 긴 글은 세 시간쯤 걸리기도 했지만, 쓰는 동안 다음 문장을 위해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고 단숨에 쭉쭉 쓴 글들이다. 이른바 ‘나를 표현하는 단숨에 글쓰기’, 즉 나만의 글쓰기인 셈이다. 이 글쓰기에는 간단한 원칙이 있다. 어떤 경험 전후의 마음 상태를 써야 한다.
 

예를 들어 산행을 한 경우, 산에 오르기 전 일상에서 겪은 마음 상태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점을 쓰고, 그 마음 상태가 산행을 하면서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산행이 끝나고 후기를 쓰는 시점에서 어떻게 결론이 났고, 그 결론을 바탕으로 이제 어떻게 살아갈지를 다짐하는 식이다.
 

이 글쓰기 방식이 나만의 고유 방식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후기는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감정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과 경험에 따라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기는 굴곡진 인생을 돌이켜 보고 미래를 내다보기에 가장 적합한 양식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 글은 나를 위해 쓰는 글이지 누구에게 보여 주고 평가받는 글이 아니다. 짧은 하루의 경험이 내면에서 어떻게 소용돌이치며 내 몸과 마음을 바꾸었는지, 오로지 내면의 울림으로만 써나가는 글이다. 경험에 대한 내면의 성찰만이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를 표현하는 단숨에 글쓰기’를 어떻게 하면 누구나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조언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 조언은 철저히 나의 직관과 경험의 산물이다. 혹 누군가 삶의 의지를 다지는 글을 쓰고 싶다면 내가 밟아 온 과정을 나눔으로써 멀리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줄여 보고 싶어 쓴 책이다. 이 책에서 내가 살려는 의지를 다지는 글쓰기 방법론을 다양하게 소개하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내 삶의 주인이 나이듯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도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어찌 보면 ‘나를 표현하는 단숨에 글쓰기’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수도 있다. 글쓰기 실력 배양이 아니라 세상과 나를 열렬히 공부해 살려는 의지를 다지고 싶어 행하는 부차적인 절규 말이다. 아니 이를 위해 글쓰기는 목적일 수도 있다. 글쓰기가 공부 열의와 살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세상과 나를 대하는 나만의 인식 틀에 대한 이야기가 기둥이다. 글쓰기 방법론은 그 안에서 자연스레 펼쳐진다. 그래야만 ‘나를 표현하는 단숨에 글쓰기’가 실효를 거둘 수 있다.
 

물질의 풍요 속에서 정신의 빈곤에 시달리며 삶을 힘겨워하는 모든 이에게 ‘나를 표현하는 단숨에 글쓰기’ 방법론은 살려는 의지를 다지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글을 잘 쓰느냐 못 쓰느냐를 넘어 자기만의 글쓰기로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존중하는 사람, 힘들고 지칠 때마다 자기만의 글쓰기로 삶의 의지를 다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편집부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