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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의 땅’ 중경(重慶)을 향하여 2<문대골 칼럼>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4.08 17:37

장준하가 살아내는 그 「계약(契約)의 삶」

전회(前回)에 이어 필자는 장준하가 살아내는 계약의 삶 이야기를 이어가야겠다. 우선 그 ‘장준하와 박·이(朴·李)사건’ 이야기다.
그 사건의 주역(?) 박·이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 언급한바 있다. 장준하가 일본신학교(日本神學校)에 재학 중에 있을 때 박과 이는 함께 명치대(明治大)에 재학 중이었다. 이 두 사람은 유달리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관계란 박·이의 인격적인 품성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박·이 두 사람은 특별히 우람한 체구에 좋은 표현으로 대단한 보스(?)기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같은 동류의 유형과 기질이 그 같은 관계를 이루게 한 것이다.

   
▲ 1944년의 장준하
장준하의 광복군 일단이 중경을 향하여 임천을 떠나 10여일쯤 되면서였다. 일행 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은밀히 흐르기 시작한 이 소문은 며칠이 지나면서 이제는 공공연한 사실로 드러났다. 일행 속엔 여섯 여인이 있었는데 세 여인은 그들의 남편과 함께 중경행에 참여하고 있어 소문과는 무관한 터였고, 또 한 여인은 지금 장준하의 일단에 참여하고 있지 않으나 임천 한광반에서 함께 광복군 간부훈련을 수료한 후 김학규의 요청을 수락, 거기에 남기로 했던 한 연상(年上)의 동료 딸로서 지휘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경우여서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독신들인 두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 두 여인들은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일본군 중 특히 사관들에게 성(性)을 제공하기까지 하면서 상당한 정보를 빼내 광복군에게 제공하는 공작원 출신들이었다.

그렇게 계속 되어 온 여인들의 사생활은 여인들로 하여금 성에 대한 금도(禁度) 같은 것을 개의치 않게 했다. 하기야 성(性) 하나 때문이라면 일군이거나 한광반이거나 뭐가 다를 것이 있겠는가? 사경(死境)을 헤쳐 가는 것 같은 나날의 행군, 남녀를 가릴 수 없는 밤의 처소, 어느 날은 마구간, 어느 날은 어느 집 나뭇간과 외양간, 추위는 칼날처럼 살을 에는데 거기 무슨 인률(人律)이 있겠는가? 거기서 무슨 인률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이 두 여인과 먼저 관계를 시작한 것은 장준하의 한광대의 중경까지의 인도를 위해 임천 한광반으로부터 공식으로 임명된 교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날이 가면서 이 사건은 한 두 사람과의 관계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혼음으로까지 번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더욱 장준하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가족주의 현상이었다.

일군 관할지역에서 이 지역의 보장(里長)에 의해 비밀리에 한광반에 인계되었다는 세 가정은 중경을 향해 가는 광복군 대열의 또 다른 대열(?)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겠거니 하던 장준하에게 이 가족들은 적지 않은 짐거리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이지러져 가는 조국의 광정을 위한 이 성대열(聖隊列)에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무례를 버젓이 자행(恣行)하는 것이었다. 이 세 가족은 이 한광반에 인계될 때부터 중경행을 작심한 터라 가능한 것이었고, 그래서 대원들의 극진한 보호까지를 받고 있는 터였는데 행군이 계속 될수록 단체생활, 단체활동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탈선을 빚는 것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세 가족이 지니고 있는 돈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알려진 대로 일본군 관할지역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로 상당한 현금을 지니고 있는 터, 행군을 하는 도중 지나게 되는 마을의 상점이나 또 하루 이틀씩 혹은 며칠씩 머물게 되는 읍이나 도시의 시장거리를 지나치게 될 땐 규율의 통제 아래 움직이는 대원들과는 달리 특미의 간식거리를 사다가 한편 구석에서 자기 식구들과만 나누어 먹으면서 즐기는 것이었다. 이런 행위가 통제 없이 계속 되면서 그 도를 더해갔다.

자주 술을 사다가 부부 간에 과음을 하기도 하고 보기 어려운 추대를 보이면서도 태연해져 가는 것이었다. 이 같은 부부들, 가족들의 행태들은 그들로서의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른 세 여성과 대여섯 되는 남성들을 불결한 혼음상태로까지 이끌어 갔다. 이제는 상당한 지성이라는 것까지도 예외가 아니게 된 것이다.

장준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정·가족이라는 것, 돈이라는 것, 성(性)이라는 것을 씹고, 씹고 또 씹어 보았다. 돈·돈·돈, 가족·가정, 성·성·성! 그는 거대한 <벽>을 기어오른다. 적어도 지금 장준하의 도상에서의 돈·가정·성은 좌시할 수 없는 죄덩이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 엄청난 주제들은 장준하를 마치 한 풋내기로, 그 절벽 아래로 내던져버리는 것 같았다. 어떤 문제가 목전에 놓일 때 그 문제의 회피야말로 <죄>로 규정하고 붙잡고 혈투를 마다않는 장준하로서도 인생에 있어 이 가정이라는 것, 성이라는 것, 돈이라는 것과의 씨름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장준하로서도 이 문제를 문제시하기엔 아직은 너무 허약한 지경이었고 게다가 자신 앞에 지금 박두해있는 조국광복(祖國光復)이라는 문제가 자신의 생사와 연결된 것이어서 그 전력을 양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탈선한 가족들, 성(性)의 난행자들 그 단호한 처벌

그는 더 이상 무너져 가고 있는 이 중경향단(重慶向團)의 자세를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 아직도 원초의 전사의 자세를 버티어 가는 쓰까다 탈출 5동지를 소집, 그 대책을 논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 꼴로라면 중경에 간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이라니, 의미에 사는 것 아닌가?”
“이대로는 안 된다!”
5인은 토론을 원하지 않았다. 5인 동지들은 사건에 휘말린 몇 사람을 제외한 대원들의 의사를 타진 분위기의 쇄신책을 수립해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해 책벌을 한다는 것으로 첫째는 세 가족에게 이 행보를 마칠 때까지 단체행동에 위해(危害)가 되는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 만에 한나 그 같은 행동이 재연되는 경우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서약을 하게 하는 것이었고, 성(性)의 난행위가 확인된 다섯 남성의 경우는 전체 회중 앞에서 30대씩 뺨을 때려 그 죄를 벌하기로 한 것이다.

가족문제의 처리는 일언반구 이의 없이 가족대표들의 뜨거운 유감의 표시까지 있어 전 회중들의 감사의 염(念)까지를 품게 되는 아름다움이 참여한 모두를 덮어주었다. 그러나 성의 난행문제의 처리는 그 방법은 채택이 되었지만 그 집행은 실로 지난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처벌행위 자체가 한광반의 공적 결정에 의해서가 아닌 중경행대(重慶行隊) 대원들 스스로의 결정이라는 사실이 그랬다. 때문에 30대의 뺨치기는 뺨을 맞아야 할 자들의 스스로의 절대승복이 보장되지 않는 한 턱도 없는 일이었다. 회중의 모임에서 ‘뺨을 누가 칠 것이냐?’로 합의가 된 사람은 두 사람, 장준하와 김준엽이었다. 특히 장준하에겐 이미 앞서 말한바 있는 그 거구에 완력을 지닌 박과 이 두 사람이 배정되어졌다.

박(朴)과 이(李)는 장준하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관계였다. 그 관계는 이전 임천 중국중앙군관학교 분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내용은 이랬다. 소위 단짝으로 지내는 박·이가 임천시내에 외출을 나가 소문난 한 술집을 찾았다. 빈주머니였다. 둘은 하나같이 돈 없이도 술은 마실 수 있다는 뱃심(?)의 사람들이었다. 과음을 했다. 무전취주. 술집이 조용할 리가 없었다. “돈이 없으면 술을 마시지 말 것이지. 술값 내놓으시오. 술값 안 내고는 죽어도 못가요.” 술집여인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 박은 일군에서 탈출해온 한 대원이 일본도(日本刀)를 가지고 탈출해 보관해오고 있었는데 거의 우격다짐으로 이 칼을 빌려 휴대하고 있었다. 술값을 계산하지 않으면 죽어도 못 간다는 술집주인의 고성에 박은 두 말 없이 그 일본도를 뽑아 옆에 쭈그리고 있던 주인집 개를 일도양단 해버렸다. 주인은 물론 다른 여러 주객들이 혼비백산하여 술집을 뛰쳐나갔다. 술집은 말 그대로 피바다를 이루었고...

박이의 취행은 계속 되었다. 온 시내를 피 흐르는 칼을 휘두르며 술집들을 찾아다니며 11시 귀가하기까지 세 술집을 더 훑었고 그 이후에 역시 단칼에 죽인 개가 세 마리를 더했다. 그러고 귀대한 것이 밤 11시. 그들의 막됨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새벽 두시까지 칼을 뽑아들고 대원들 모두를 벌벌 떨게 했다. 그러기를 제 풀에 지쳐 가마니 바닥에 쓰러져 잠들기까지 계속했다. 큰 사고가 없었던 것만으로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곧바로 중국의 임천분교 당국에 비선을 통해 보고되었고, 이튿날 아침 과업이 시작되기도 전, 중국헌병들 수 명이 출동해 박·이를 연행, 분교의 영창에 수감해버렸다.

박·이가 수감된 후 장준하는 정말 난감했다. 우선 이들의 사식 시중이 걱정이었다. 영창의 식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론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한광반에서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사식을 좀 넣어주어야 할 형편인데 아무도 이 일에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당시 한광반의 취사부장을 겸하고 있던 장준하는 역시 이 일을 자임하고 나섰다. 약간의 영치금과 색다른 맛의 먹거리를 구해다가 날마다 차입해주었다.

그러기를 3·4일쯤 지났을 즈음해 영창관리 책임자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박·이의 사건으로 처벌해달라는 주민들의 빗발 같은 성화가 쇄도하고 있다면서 박·이가 수 일 내에 <중국육군형무소>로 이송된다는 것이다. <중국육군형무소>! 그곳은 들어가면 거의 죽어 나온다는 곳이었다. 영창관리관마저도 “참 안됐다.”는 말을 아주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몇 차례나 반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단 중국육군형무소로 이송되는 경우 영원히 나누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다. 중국형무소에 이감될 경우 가장 두렵고 확실한 게 아사(餓死)라 했다.

하늘이 깊은 흑암으로 말리는 듯했다. 사식과 영치금을 넣어주고 돌아온 장준하는 한광반원 전체의 소집을 알리는 호각을 불어댔다. 긴급사태라는 것이었다. 주임인 김학규까지도 모르는 소집이었다. 평대원이 전체 반원을 소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준하는 거칠 것이 없었다. 김준엽마저도 그 비상소집의 이유를 몰랐으니...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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