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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의 땅’ 중경(重慶)을 향하여 3<문대골 칼럼>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4.16 15:55

“... 여러분, 여러 동지들, 이렇게 내 마음대로 집합을 시켜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광반 박·이 동지가 중국육군형무소로 이감된다는 사실을 장준하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또 한광반의 대원들로서는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늘 우리 동지인 박과 이가 중국육군형무소로 이감됩니다. 중국육군형무소의 실상을 들어보기라도 하셨습니까? 한번 투옥되면 살아나올 수 없는 곳으로 군형무 계통의 이력이 있는 자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대원들은 쥐죽은 듯 해졌다. 기침소리마저 내놓을 수가 없었다. 말엔 ‘내가 하는 말’이 있고 ‘하늘이(역사가) 주어 받아하는 말’이 있다. 박·이의 중국육군형무소로의 이감을 저지해야 한다는 장준하의 절규는 이미 장준하의 말이 아니었다. 장준하의 말은 계속 된다.

“여러분, 그래서 본부의 승인도 없이 제 개인적으로 여러분을 집합하게 한 것입니다. 저 역시 박·이 동지의 취중난동 행위를 격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국광복의 대로에선 우리, 대한민국의 심장부를 찾아가는 우리로서 박·이 동지는 있어서는 안 되는 오류를 범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성지(聖地) 중경을 향하는 이 거룩한 대열에서 사랑하는 두 동지를 내버려도 좋다는 말입니까? 나는 아직도 사랑하는 박·이 동지의 가슴 속에 오직 조국을 다시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군을 탈출하던, 탈출해 나온 그 거룩한 애국혼이 살아 흐르고 있다고 믿습니다.”

장준하의 역설은 이젠 거의 ‘하늘의 소리’로 승화되고 있었다.

“여러분,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한광반의 내무반이라는 게 가마니를 깔고 밤을 지새고 있다는 것은 백번 양보해 그렇다 해도 우리에겐 광복훈련에 필요한 목총 하나가 없습니다. 아예 훈련이 없습니다. 나날을 빈둥거리며 소일합니다. 광복을 위해 땀 흘려 훈련해야 할 그 귀한 나날들을 말입니다. 이런 퇴폐의 분위기에서 누구보다도 가슴 속에서 정의의 불씨를 품고 있던 박·이 동지의 그 취중난동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박·이 동지를 잃은 채로 중동행을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박·이 동지를 중국육군형무소에 넘겨둔 채라도 중동행을 하겠다면 여러분 ,,,”

여기까지 일장의 웅변을 토해온 장준하는 이제까지 왼손에 들고 있던 웬 보따리 하나를 오른손으로 바꿔 부쩍 들어올리며 “저는 중경행을 단호히 포기하고 박·이 두 동지와 함께 중국육군형무소를 택하겠습니다. 이미 저는 제 비품 몇 가지를 싸들고 나왔습니다.”

장준하는 울고 있었다. 아니, 장준하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울고 있었다. 60여명 모두가 하나로 울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장준하가 단에서 내려오자 다른 한 대원이 단으로 뛰어올라갔다.
“나는 오늘 장 동지를 통하여 참애국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애국을 한다면서 애국하는 동지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박·이 동지를 구해야겠습니다. 동지들 지금 즉시 행동합시다.”

장준하의 돌베개(179쪽)는 그가 일본의 대분고상(大分高商) 재학중 학도병으로 징병되어 탈출했던 김유길(金柔吉)이었다고 전한다. 김유길의 지원발언은 끝까지 계속될 수가 없었다.
“옳소. 옳소.”
“구합시다. 구하러 갑시다.”
하는 모든 청중의 함성에 묻혀버린 것이다. 장준하는 당시의 분위기와 자신의 감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하늘의 폭죽처럼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는 불꽃의 폭음으로 「옳소!」 소리가 귀에 감돌았다.”

바로 그 현장에서 김준엽을 비롯한 몇 대표가 선정되어 사건을 공식화했다. 바로 그 현장에서였다. 대표들이 김학규 주임, 진경성 교관, 모든 간부들을 모셔(?)왔다. 이미 분위기가 한광반에서 박·이의 신분인수를 책임지고 수행하겠다는 쪽으로 결정되고 있었다. 김학규 주임은 못내 언짢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원들의 분위기를 간파한 그는 못 이기는 척 “차후에 이 두 사람에 대한 모든 책임은 한광반원들이 공동으로 질것”을 전제로 <한국광복군>의 차원에서 중국당국과 교섭, 바로 다음 날 박·이의 출감이 이루어졌다. 모든 대원들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김준엽(金俊燁)이 말하는 장준하의 ‘순교자 정신’

장준하 추모 12주기, 1987년 8월 15일 광복절 그날, <사상계>의 동인들이 작은 푼돈(?)들을 모아 파주 광탄 그의 묘소에 묘비와 함께,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지성일관(至誠一貫) 용왕매진(勇往邁進) 하자.”는 주창을 새긴 「사상계비」를 세우고 그 저녁 함께 가진 추모좌담회에서 김준엽은 한국광복군간부훈련 당시의 그 임천분교에서 있었던 박·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박·이를 구출해낸 사건의 주역 장준하를 이렇게 전한다.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때 장형을 보고 나는 그의 「순교자적 정신」을 느꼈던 거지요. 내가 장형을 존경하고 좋아한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때 그의 행동은 지워지지가 않아요. 그 결과 우리 모두가 서명을 해가지고 전체가 책임을 질테니까 선처를 해달라고 해서 수습이 되었죠. 그때 그 양반이 나서지 않았으면 그 두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의 순교자 정신이 아니었더라면 될 일이 아니었지요.”(박경수, 장준하평전 p.157)

   
▲ 장준하(왼쪽)와 함석헌
장준하는 그의 해방 전후사를 담은 역사를 1971년 <돌베개>애 담아낸다. 그는 그 돌베개에서 위의 박·이 사건을 언급하는 가운데, 이 박·이 구출의 호소에도 대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 “어떤 극단의 방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다짐한다. 장준하의 이 돌베개가 출판되는 해, 필자는 「씨의 소리」 업무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돌베개를 찾는 「씨의 소리」 독자들이 적지 않아 몇 십 권씩 「씨의 소리」사에 갖다 놓고 판매대행을 했고, 대금이 일정액 모아지는 대로 계산해드리곤 했었다. 돌베개가 「씨의 소리」사에 배달되었을 때 필자는 그 첫 구입자가 되었고 밤새 독파했다. 아마 2, 3일 사이였을 것으로 기억된다.
1972년 장준하는 「씨의 소리」에 ‘思想界 수난사’를 싣게 되는데, 그러면서는 아예 「씨의 소리」 발행에 함석헌과 함께 인쇄소로 출근하여 원고 전체를 교정하는 작업을 해내곤 했다.

이 무렵, 필자는 장준하 선생께 “선생님, 「돌베개」에 나타나는 그 「박·이 사건」에서 ‘만약의 경우엔 어떤 극단의 방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하셨는데 그 말씀 기억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기억하다마다. 죽기로 마음 먹고 한일인데...”
“선생님, 그럼 그 ‘어떤 극단의 방도’란 뭘 말씀하신 겁니까?”
“그거, 중경행을 포기하겠다는 거였지요.”

생명을 걸고 달려온 중경에의 꿈! 그러나 장준하에게 더 중요하고 무거운 과제는 「지금의 역사(役事)」였다! 그것이 장준하였다.

혼(魂)의 사람 장준하(張俊河)

참 힘은 칼에서 나오는 것도, 어떤 조직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국가니, 군대니 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어떤 재력, 어떤 조직력에서 나오는 힘은 전체의 공존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런 따위의 힘이란 후에는 반드시 공존을 훼손하고 전체를 계층화한다. 종교도, 교육도 이에서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장준하는 실로 놀라운 영적(?)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박·이의 두 번째 사건>에서다. 이 박·이의 두 번째 사건에서의 장준하의 경우는 기독교까지도(특히 한국에서는) 자(資)를 본(本)으로 살아가는 오늘의 이 죄된 현상에 한 위대한 터닝 포인트를 제시해준다. 중국육군형무소 이감 직전 천은을 입었던 박·이는 그 구출의 역사가 장준하의 헌신적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난 이후 장준하에 대해 지극한 존경심과 고마운 마음을 지녀오고 있었지만 임천을 떠나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시련의 행군이 계속되는 동안 짐승처럼 이는 성욕을 제어하는 데까지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누가, 무엇이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도 이성 하나 무뎌지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는 것 아닌가?

어쨌든 모든 대원들이 윤리적인 문란을 심각히 초래한 자들을 30대씩 뺨치기 하기로 결정하여 심판대에 세웠다. 그런데 뺨을 맞기로  장준하 앞에 세워진 자가 바로 그 이전 박과 이었다! 장준하는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인가 했다. 그러나 전체의 합의야말로 법 아닌가? 박과 이는 거구에 그 신장은 정확히 장준하보다 한 뼘씩이 더 했다. 작은 놈이 큰 놈을 심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이는 이를 딱 악물고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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