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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과 다석의 돈오돈수에 관하여<박재순 칼럼>
박재순(씨알사상연구소 소장) | 승인 2015.04.21 11:24

다석은 1890년생이고 성철은 1912년생이니 22세 차이가 난다. 다석은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고 성철은 일찍이 불교계 주류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어쨌든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다석 유영모와 씨알 함석헌 선생께 배운 안병무는 성철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 다석 유영모
유영모와 함석헌이 닦아낸 씨알사상은 서구의 이성철학, 기독교정신, 민주사상과 동양 유불선과 한국정신이 합류한 대통합의 장엄하고 숭고한 사상이다. 한국근현대사는 동서정신문화가 합류하는 두물머리였고 유영모와 함석헌의 정신과 삶 속에서 동서고금의 정신문화가 순수하고 온전하게 정화되어서 융합되었고 씨알사상으로 닦여졌다. 씨알사상이 단순하고 쉬운 것 같으면서 어려운 것은 깊고 큰 사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대해서 말해 보자.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단번에 깨닫지만 점진적으로 몸과 맘을 닦아간다는 말이고 돈오돈수는 단번에 깨닫고 단번에 닦아낸다는 말이다. 돈오돈수나 돈오점수는 깨달음과 수행의 한 이론과 방법이다. 깨달음과 수행에는 수많은 이론과 방법이 있다.

다석의 경우에도 맘의 욕심과 편견, 감정과 허영을 한 점으로 가온찍기 해서 없음과 빔의 세계인 하늘의 빈탕한데로 곧장 들어간다고 한 것은 돈오돈수를 가리킨다. 맘을 한 점으로 찍어 버리고 하늘의 빈탕한데로 곧장 들어가면 더 이상 닦을 맘이 없을 것이다. 깨달음의 높은 경지에서는 그리고 깨달음의 순간에는 누구나 돈오돈수를 경험하고 느낄 것으로 여겨진다. 없음과 빔의 세계인 하늘의 자유를 누리는 순간에는 아무 거리낌도 군더더기도 없어서 몸과 맘을 다시 닦고 씻을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몸을 가지고 땅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존재다. 몸을 가진 이상 욕심과 편견, 감정과 허영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날마다 몸과 맘을 닦고 씻어야 하루하루 옹근 삶을 살 수 있다.

다석은 목숨을 말숨으로, 말숨을 얼숨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목숨은 목으로 쉬는 숨이고 말숨은 말과 생각으로 쉬는 숨이며 얼숨은 하늘의 얼로 쉬는 숨이다. 38억년 생명진화과정을 거치면서 물질에서 생명이 나오고 생명에서 감정과 의식이 나오고 감정과 의식에서 맑은 지성이 닦여 나오고 지성에서 영성이 닦여져 나왔다. 몸의 생명에서 얼 생명을 닦아내는데 38억년이 걸린다. 목숨에서 말숨으로, 말숨에서 얼숨으로 바꿔나가는 일은 단번에 될 수 없다.

   
▲ 성철스님
다석은 성철과 달리 생각을 강조하고 글읽고 글풀이를 많이 했다. 밥을 먹어 생긴 몸의 에너지 정(精)이 몸 속에서 기(氣)가 되고 기가 생각으로 피어오르고 생각이 하늘의 뜻에 사무치면 얼과 신에 이른다고 했다. 이점에서 다석은 성철과 달리 점수를 강조했다.

사람은 하늘을 향해 직립한 존재여서 곧장 하늘을 숨쉬고 하늘로 솟아올라갈 수 있는 존재다. 사람의 몸과 맘 속에 하늘이 열렸다. 단번에 깨닫고 하늘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점에서 돈오돈수가 옳다. 그러나 땅에서 몸을 가지고 사는 존재이고 생명진화와 인류역사 속에서 형성된 존재이므로 사람은 서서히 조금씩 솟아오르고 나아가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는 돈오점수가 옳다.

돈오돈수나 돈오점수만 아니라 여러 가지 깨달음과 수행의 이론과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과 정신은 입체적이고 역사적인 존재이며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 다석 유영모
씨알사상에서는 사람의 본성을 씨알로 나타난다. 씨알로서의 본성은 주어진 본성 그대로 자연 그대로 드러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주어진 본성을 닦고 씻어서만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본성인 씨알은 깨지고 죽어서 싹이 트고 꽃과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38억년 생명진화 과정 자체가 그랬다. 물질을 깨트리고 녹이고 초월해서 생명이 나왔고 생명의 본능을 깨트리고 감정과 의식이 나왔고 감정과 의식을 깨고 지성이 나왔고 지성을 초월하여 영성이 나왔다. 하나의 씨알처럼 깨지고 죽음으로써 새로운 존재의 차원이 열린 것이다. 몸과 맘의 낡은 껍질이 깨지고 부수어져야 속알맹이가 싹이 트고 자라난다. 단번에 깨지고 부수어지지만 또 서서히 점진적으로 싹이 트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사건이고 상징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적용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부활했듯이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다시 살아난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는 것은 단번에 죽고 단번에 사는 것이니 돈오돈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예수를 닮고 예수와 하나로 되는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십자가가 사람들을 예수에게로 이끄는 길이고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점진적인 수행을 뜻할 수 있다.   

기독교신학에서 말하는 ‘의화(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는 돈오돈수, 돈오점수로 이해할 수 있다. 의화(justification)는 흔히 의인(義認), 칭의(稱義)로 번역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핵심교리다.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이다. 믿기만 하면 도덕적 행위나 공로 없이 단번에 의롭게 되니까 돈오돈수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나 돈오돈수에는 단번의 깨달음 속에 철저하고 온전한 수행이 내포되어 있지만 의인(義認)에는 값없이 자유롭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복음의 자유와 은총을 말할 뿐 진지한 수행과정이 결여될 수 있다. 기독교신학에서도 의인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거룩한 삶에 이르는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만일 의인과 성화를 묶어서 말한다면 돈오점수에 가까운 수행과 실천이 나온다고 생각된다.

높이 철저히 깨달은 분들의 경지에 대해서는 헤아리기 어렵다. 헤아리거나 짐작할 수 있다고 해도 철저하고 높은 깨달음과 체험의 경지를 마음과 삶 속에서 이어가기는 더욱 어렵다. 몸과 맘의 욕심과 편견을 깨트리고 낡은 자아를 죽이고 없음과 빔의 세계인 하늘의 빈탕한데서 자유의 기쁨을 잠시 누리는 것은 ‘참 나’를 찾는 이들은 누구나 조금은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자유의 기쁨을 얼마나 깊고 높이 느끼는지 얼마나 오래 지속적으로 느끼는지가 중요하다. 적대적인 인간들과 맞부딪치는 현실 생활 속에서도 그런 자유와 기쁨을 계속 누린다면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말하는 ‘얼 나’의 자유, 하늘의 빈탕한데서 누리는 자유는 땅의 시간과 공간을 떠난 자유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주인으로서 생명의 주인으로서 제 때 제 삶을 사는 자유와 기쁨이다.

씨알은 땅의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생명의 기쁨과 자유를 누린다. 하늘의 빈탕한데서 누리는 씨알의 자유는 서로를 섬기고 살리는 사랑과 정의의 자유, 자치와 협동의 자유다. 생명과 역사, 민주와 영성, 공동체와 실존,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함께 녹아든 깨달음의 자유와 기쁨이 씨알의 삶과 정신 속에 담겨 있다.

박재순(씨알사상연구소 소장)  p994@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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