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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의 땅’ 중경(重慶)을 향하여 4<문대골 칼럼>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4.23 16:29

중경을 향하는 광복군 공동체의 규율을 심각히 위반, 30대씩의 뺨을 맞아야 할 자로 회중이 결정한 대원이 다섯, 그 다섯을 응징(?)해야 할 자로 뽑힌 자가 둘, 그 둘이 장준하와 김준엽이었다. 이상할 만큼 장준하와 김준엽은 공식적인 모임에서 정히 결정하는 것이 아닌데도 아주 자연스럽게 대표역을 수행하게 되고는 했다. 이제 두 사람이 다섯을 30대씩 쳐야한다. 한 사람이 두 사람 반(?)씩을 쳐야하니 나중 한 사람은 장·김 둘이서 열다섯 대씩 나누어 때리게 된다. 필자가 이미 박·이 두 사람의 외형을 말한바 있지만 박·이는 장준하 앞에 벌을 받을 자로 설 자가 아니었다. 박·이 둘은 소문난 부잣집 아들들에, 장준하의 일본신학교(日本神學校)보다는 명문으로 인식하고 있는 소위 명치대학(明治大學)의 재학생들이었다. 더구나 그저 한 사건으로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은 왜소, 단신의 징벌자와 거구, 장신의 피징벌자의 모습이었다!

필자는 장준하의 「돌베개」가 전하는 이 <박·이의 징발사건>을 우리의 역사에서는 물론이요, 세계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민주주의의 전형(民主主義 典型)」으로 주목하면서 장준하의 중경 입성 이후의 자리에서 제(題)를 달리하여 전하려 한다.

그 사건의 고귀함·아름다움·참스러움이 가히 <오순절 예루살렘 공동체>에 결코 뒤지지 않는 사건으로 확신되기 때문이다. 그 <박·이의 징벌 사건의 현장> 그것은 아주 정확한 <하나님 나라> 모습이기 때문이다.

삶의 현장(現場)에서 쓰러진 장준하(張俊河)

누구의 삶이 되었든지, 삶이야말로 실로 고귀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대교회, 대성당, 대사찰의 주제(主祭)의 살림이거나 그 주제 밑에서(?) 바닥살이를 하는 이의 살림이거나 삶에 선후(先後)는 없다. 하물며 고저(高低) 따위야! 더구나 그 삶에 그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거기 자(自)체(體)를 드려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말씀이 ‘육신’(생生의 주체-필자 주)이 되었다는 그 사르크스(σαρξ=sárx)다. 그러면 예수와 내 몸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가 내안에 나로 있고, 나또한 예수 안에 예수로 있게 된다.

삶이란 그렇게 위대하면서 아름다운 것이다. 장준하의 일거수 일투족이 영락없이 그랬다. 노하구(老河口)에 머문 지도 벌서 20여일, 그동안 대원들이 아주 고맙게도 푹 쉬어 체력과 담력을 새롭게 추스렸고, 임천을 떠나 남양(南陽·河南省)을 거쳐 노하구에 이르기까지 꼭 한 달, 죽음을 각오하기까지의 그 초혜(草鞋·중국짚신)의 그 행군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는 일, 따뜻이 입히고 신겨 출동을 해야 한다. 노하구는 중국중앙군 제5전구(第五戰區) 관할지역으로 제5전구의 지원 없이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 노능서(왼쪽), 김준엽(가운데)과 장준하(오른쪽)
게다가 장준하를 정말 슬프게 한 것은 한국광복군 파견대의 중경행의 극심한 방해 행위였다. 알고 보니 노하구 주재 광복군 파견대라는 것이 광복군 사령부의 공식 파견대가 아닌 제1지대의 분견대였다. 당시 임시정부 군무부장(軍務部長)이면서 제1지대장을 겸임하고 있던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이 자신의 사세(私勢)를 확장하기 위해 임천으로부터 광복군 사관 출신 일단이 중경을 향해 행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급조, 노하구에 광복군 파견대라는 것을 설치해 행단을 맞게 한 것으로 이들은 장준하 일행의 중경행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장준하 행단의 전 대원들을 정식으로 노하구에 주둔시켜 새로운 세력을 확장하겠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니 이 파견대라는 것에 장준하의 중경의 마지막 장정을 위한 중국 전구로부터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장준하의 아픔은 소위 광복군 파견대의 방해공작보다도 그 공작에 내부의 전열에 이완(弛緩)이 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중국군 제5전구의 전적인 지원이 없이는 출동할 수 없다. 더구나 이제는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그 파촉령(巴蜀嶺)을 넘어야 하는데...

장준하는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대표자 회의를 소집했다. “우리는 안으로나 밖으로나, 전후좌우로나 나갈 길이 다 막힌다 해도 중경행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방법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일단이 중경에 안착할 때까지 필요한 보급품을 지원받는 것입니다.” 해서 김준엽과 윤세현을 협상대표로 선임, 제5전구 사령부를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김준엽은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김준엽과 윤세현이 먼저 찾은 곳은 5전구의 정보참모였다. 우선 그는 김준엽의 유창한 중국어와 깔끔한 맵시, 정중한 자세에 깊은 호감을 느꼈다. 중경행을 나서야 하는 광복군의 행군에 보급품 지원의 간청을 경청한 정보참모는 “두 사람의 요청을 잘 알았소. 우선 내가 2, 3일 어간에 막사를 한번 방문하겠소. 나 역시 이 같은 청구를 하려면 여러분의 상황을 확인해야겠으니 말이오.” 그렇게 두 대표는 5전구를 물러나왔는데 바로 다음 날, 그것도 바로 업무가 개시되는 아침시각, 한국광복군 막사를 5전구 참모들이 현장시찰 차 방문했다. 물론 그중엔 어제 만났던 정보참모도 동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준하를 포함한 우리 측 대표 몇 명과 자리를 함께 했다. 자연스럽게 이 행대의 과거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는 재(在)일본대학 유학생들로 일군에 징집되어 군사훈련 후 중국 강소성 서주(江蘇省 西州) 쓰까다 부대 근무 중 일군을 탈출, 임천 중국중앙군사학교에서 정규간부훈련을 마치고 사관 임관을 받고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정부를 찾아가는 중이라는 것, 파촉령을 넘는 육로 이외에는 길이 없는데 여러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마저 딸려있는데다 설상가상으로 먹을 것, 입을 것마저 없어 제5전구를 찾아 이 같은 보급품을 요청하게 된 것이라는 데까지의 이야기를. 그러나 이 대난관의 실마리는 전혀 엉뚱한데서 풀려 왔다.

<광명의 길> 연극공연

   
▲ 김준엽(왼쪽)과 장준하
김준엽이 시나리오를 만들고 장준하가 연출했던 임천에서의 그 <광명의 길>에서였다.
김준엽의 그 <광명의 길>은 후에 임정 군무부로부터 특선되어 미국의 첩보부대인 O.S.S까지 함께 투신하게 되는 동지 노능서(魯能瑞)의 실제 애화를 담은 것으로, 처절한 군국주의(軍國主義)에의 저항과 조국의 광복을 그 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5전구의 정보참모는 임천분교장으로부터 “그 중경행대가 임천분교 졸업식에서 <광명의 길>이라는 연극을 했는데 한국인들은 물론 우리 중국인들까지도 큰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 그 연극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중국군 참모들은 극본의 내용, 공연의 결과에 대해 설명을 듣고는 즉석에서 “그 연극을 우리 군에서 한번 공연해줄 수 있겠소? 우리도 여러분의 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테니 어떻소?” 이리하여 한광반에서는 공연 여부를 놓고 밤 새어 논의를 했고, 몇 날쯤 소요될지는 알 수 없지만 오히려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라며 5전구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

공연은 상상 이외의 놀라운 결과를 거두게 되었다. 전구에 속한 7개처의 예하부대, 15개의 소학교, 수 개 처의 노하구의 시민단체, 나중엔 노하구 전 주민회 주최의 대형공연을 치러내야 하기까지...

물론 장준하의 연출이었다. 한광반의 최종공연인 <시민회관공연>은 그 노하구의 축제가 됐다. 장준하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시민회관 안에 가득히 자리를 메운 1천여 명의 눈동자는 가스등 불빛에 숨을 죽였다. 그 관중들 가운데는 거의 강제로 초대된 노하구시의 저명인사들이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은 엄숙한 자세로 공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기어이 우리는 관중을 울리고야 말았다. 이 연예의 피날레의 막이 열광적인 박수 속에 천천히 내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속으로 혼자 감격하고 있었다. 흥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와 청중들의 뒷좌석이 가려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조명과 같은 눈부신 황홀감이 나를 사로잡았다.”(돌베개 249쪽)

그리고 장준하는 바로 그 무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관중들은 모르는 상태였다. 여러 동지들이 전신의 부분 부분을 지압하고, 물을 먹이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씻겨내고, 상반신을 흔들어보고, 온갖 응급조치를 시도했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많은 동료들이 있었지만 일체처럼 움직일 수 없는 것, 그러나 정말 재빨리 인력거를 부르는가 했더니 동료들의 부축으로 장준하를 싣고 병원을 찾아 달리는 한 친구동료가 있었다. 김준엽이었다. 때는 이미 열한시가 넘어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준엽은 이 응급환자의 입원을 거부하는 다섯 곳의 병원을 거쳐 여섯 번째 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스웨덴 출신 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이었다. 김준엽은 청원이 필요 없었다. 장준하는 아주 신속히 응급실 응급대에 바로 뉘여 졌다. “장준하 동지! 당신은 죽지 않을 거야.” 김준엽의 속으로 되뇌는 말이었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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