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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심각한 빈부격차, 누가 먼저 말해야 할까<박상조 칼럼>
박상조 | 승인 2015.04.24 13:26

OECD는 4월 초 34개 회원국 모두의 빈부격차가 1980년대 7:1에서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있다면서, 세제개혁, 사회보장 등 소득재분배 정책의 시행과 빈곤퇴치 정책 및 교육기회 확대를 긴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소득격차가 작은 유럽 각국을 포함해도, 상위 10%의 소득이 하위 10%의 소득의 9.5배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최상최하 10%인구의 소득격차는 10:1이라 한다. 절대적인 사실을 비교로서 상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OECD의 경고와 정책 권고를 보면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 정권이 인하한 법인세율을 올리자는 의견에 대해서는 기업의 투자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시행하는 교육차원의 무상급식에 대한 자세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CEO의 천문학적 급여는 당연시하는 정도를 넘어 자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서민생계에 직결되는 과도한 가계부채에 대한 대응도 소식이 끊어졌다.

누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선출한 행정수반이 있고, 집권여당을 견제할 야당도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두면 될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나서서 현 상황의 심각성을 다시 일깨우면서 제도개혁을 촉구해야 할 것인가? 누가 먼저 나서야 할 것인가? 당연히 사회각계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나서야 할 것이고, 종교계 지도자들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노벨경제학자인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은 경제학이 그 뿌리인 윤리학과 거리를 너무 멀리하게 된 것을 불행으로 지적하였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인들 중에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대해 엉뚱하게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라는 말씀을 들어 부자들 중에도 하늘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주장을 넘어, 오히려 그들이야 말로 나라 경제 발전의 주역들이라 추켜세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안다. 사실 성당에 사목협의회 회장이니 무어니 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크던 작던 사업을 하면서 부자 대열에 든 사람들이니, 성직자들도 가난한 사람의 신앙심보다는 부자의 신심을 더 중히 여겨 “바늘귀 통행증”을 발급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학자들은 성서적 의미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예외 없이 “힘없는 사람들” 내지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의미하며, 재산이 많은 사람들의 “영적 가난”(spiritual poverty)은 제외된다고 한다. 즉 가난이라는 것은 경제적-사회적 결핍과 박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옳다면 예수께서 어떤 부자 청년과 대화를 나눈 후에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 19: 23-24)고 “거듭” 말씀하신 것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인 것 같다. 예수님이 부자들에게도 바늘귀를 빠져나갈 가능성을 남겨두신 것에 대해 질투심이 생겨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들이 식탁에서 빵부스러기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리면 우리 중에 누가 기뻐하지 않겠는가.

   
 
사람들 중에는 우리의 소득격차가 다른 OECD회원국보다 나쁘지 않다면서 소득격차 13~16배 그룹에 속하는 미국을 예로 들기도 할 것이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하나의 추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 자세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숫자만으로 비교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미국의 성인 남녀 두 명 중 한 사람 꼴로 비영리부문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으며, 그들은 최소한 주당 평균 3시간을 비영리사업단체에서 일하는 보내고 있다.”고 했다. 또한 미국인들이 국민총생산(GNP)의 2-3%만 기부하는 데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라 했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가 더 부끄럽지 않은가?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늑대 소굴에 들어간 사람 중에 무신론자는 없다.”는 명제를 남겼다. 위험과 고통과 궁핍 그리고 죽음이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최빈상태에 든 사람들을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종교적 용어인지 질문하고, 우리의 언어 습관이 엄중한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 아닐까 성찰해야 할 것이다. 본회퍼의 명제에 따르면 최하위 10%에 속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도움을 외치고 있을 것이고, 최상위 10%에 속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사회윤리에 대해 가톨릭은 “교회를 위하여” 말하고, WCC는 “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평신도 입장에서는 “교회를 향하여” 말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6-18)라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개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세상 즉, 각자가 속한 사회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말씀으로 알고 희망 속에서 살고 있다. 사도신경의 가르침대로 교회 자체도 믿음의 대상이다. 세상의 구원에 필요한 일이 생길 때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의 지도자도 나서기를 바라는 것은 신자의 당연한 기대일 것이다.

지도자층에 들어선 그리스도인의 1차적 책무는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지금의 부패상과 빈부격차의 심각성에 대해, 침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보다 세상일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셨으니,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제자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라이허(Robert B, Reich) 교수는 정치인들은 후원금이 줄어들 것이 두려워 돈 많은 사람들과 웰-스트리트 즉, 금융시장을 비판할 처지가 아니라 한다. 똑같이 교회의 지도자들이 헌금이 줄어들 것이 두려워 잘못된 현실을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면, “가난한 이들의 교회”니 “가난한 교회”니 하는 말은 헛된 구호에 거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천주교에 “병신도”라는 오래된 유행어가 있는데 조만간 모든 신자 즉,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를 지칭하는 낱말이 될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할까?

칼 야스퍼스(K. Jaspers)의 말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서에 기초를 둔 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여러 종파들 ....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와 신의 이름하에 고문을 하고 살인을 하는 종교재판관 등에서 현실화되었던 모든 것을 포괄한다. ...성서는 어떠한 어려움도 은폐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성서는 파악할 수 없는 신뢰의 가능성을 불러일으켜 주는 심연에로 정직한 인간을 인도한다. 그러므로 ...여하한 단체나 교회가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요구에 저항할 수 있다.” 야속한 생각이 들지만, 사실인 것도 있으니, 모두를 부인할 수 없겠다.

이런 비판적인 글을 읽다보면 칼 라너(K. Rahner)의 아래 말이 연상된다. “ ...우리 신학자들이 항상 바로 이런 위험 속에서 규모나 비중에 있어 거의 무제한적인 종교적 신학적 개념의 병기창을 이용해서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학에서 매우 훌륭하게 말하는 기술을 습득하지만 아마도 존재의 심연에서부터 우리가 진정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두 학자의 말이 근거가 있다면, “신학 하는 것 자체를 위협과 억압이라는 권력 행사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의혹이 생기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 될 것이다. 도날 도어(D. Dorr)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상상력이나 창의성 보다는 지능, 자비심과 행정능력에 따라 선택된 사람들이니, 우리 모두가 더 창의적인 지도력을 제공할 수 있도록 교회를 도와주어야 할 것이라 한다. 도로시 데이, 헬더 카마라, 마틴 루터 킹, 도로테 쉘레, 어니스트 슈마허, 율리우스 네이레레, 로즈마리 호손, 페드로 아루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제이스 젝슨, 단 베리간 같은 분들이 하느님께서 교회에 보낸 사람들이며, 우리에게 영감을 주어 전에는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하게 보이던 것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안젤 구리아(Angel Gurria) OECD사무총장이 4월 17일 브루킹스연구소에서 한 말이다. 케네디는 “바다의 해류가 높아지면 모든 배가 떠오를 것”(the rising tide lifts all boats)이라 했지만, 성장이란 파고에 따라 떠오른 것은 백만장자의 요트뿐이고, 극빈자들의 뗏목은 개펄에 들어붙었다 하면서, 지금의 세계적인 불황을 극복하는 길은 최빈곤층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소득재분배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라 했다. 지난 수십 년간의 실증적인 연구결과는 전통적인 생각과는 달리 소득재분배는 성장을 상쇄(trade-off)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원천이고, 소비, 저축, 투자를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이를 촉진한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빈부격차는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가정, 건강과 의료 등 생활 모든 측면에 악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다시 경제성장을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부자들이 최빈곤층의 평균수명보다 14년이나 더 길다는 사실과, 역사상 처음으로 OECD각국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40%대로 내려 앉아 서회-정치적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최빈층이 사회-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포괄적 성장”(Inclusive Growth)만이 성장한계에 부딪친 세계경제를 구할 수 있다. 

빈부격차의 극복이라는 사회의 복음화에 대해 교회는 그것은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평신도의 몫”이라 하니, 그 대책에 대해서도 평신도에게만 배타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지도자들이 심각한 사회적 불의에 당면하여 추상적이 말만 하게 되면 평신도들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문헌에 이미 다 나와 있어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도 성경에 이미 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하고 되묻게 될 것이다.

<필자 소개>

박상조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 공부하고,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정책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  천주교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중앙대 행정대학원 객원교수, (사)기업책임시민센터 이사장(2010-2014.3)을 역임하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이사로 있다.

저서로는 "인간중심발전론적 시각으로 본 대기업정책의 평가"(한국학술정보/2007), "기업의 사회적 책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사람인가 돈인가" (이담북스/2011), "경제시평 -무너지는 바벨탑 수리하기"(이담북스, 2014)가 있다. 2011.11부터 내일신문 에 경제시평을 기고하고 있다.

박상조  pxzsim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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