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회 칼럼 고정칼럼
종교의 경제윤리(1) "돈이란 무엇인가"<박상조 칼럼>
박상조 | 승인 2015.05.01 10:05

돈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시장경제에서 활동하고 있다.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에 신농씨(神農氏) 시대 농경사회가 나타나면서, “낮이 되어 시장을 열어 천하의 백성을 오게 하고, 천하의 재화를 모아 교환하여 가지고 들어가서 각각 그 처소를 얻게 하였으니”하는 말이 나온다. 화폐가 나오지 않은 때라 시장에서 물물교환을 했다는 뜻이다. 사람의 지혜가 발달하여 물물교환의 번거로움을 해소한 것이 화폐를 통한 거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효용성을 가진 돈이 금화나 은화가 나오면서 돈 자체가 재물이 되어 곡식이나 가축이 아니라 돈을 쌓아두는 부자가 나타나게 되고 돈으로 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돈에 대한 우상숭배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종교계 지도자들에게 들을 수 있는 것은 11조나 헌금 또는 후원금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이 경제현장에서 지켜야 할 행동지침, 특히 돈벌이나 돈쓰기에 대한 구체적인 권고를 듣는 힘들다. 이것은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가르침을 너무 엄격하게 해석하여, 돈에 대한 이야기 자체도 죄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가치보장의 수단” 즉, 재물을 쌓는 수단이긴 하지만, 의식주에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를 구하기 위한 “교환의 매개체”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니, 그리스도인들의 경제생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공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신자들의 모임에서 정치과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을 방해하고, 교회와 사회  생활을 따로 하게 만드는 이중성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겠지만,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어두었던 사람이 주인에게 꾸중을 들은 것은,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했다면 10배나 100배 이상의 성취도 가능했을 것이고, 하다못해 전문가에게 문의하고 신중하게 재능을 키웠다면 다른 이들의 성과와 같이 최소한 2배는 더 키울 수 있었는데도 그것을 게을리 한 탓이었을 것이다.

재물을 악하게 모은 부자가 회개하여 재산을 이웃과 나누는 모습 또한 “부자와 바늘귀” 이야기와 함께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려 한 말씀이 아닐까? 인간의 발전을 경제발전을 의미하는 세상이 되었으나, 전인적이고 통합적 발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돈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러한 추세를 변화시틸 수는 없고, 이와는 반대로 논의를 많이 해야지만 경제만능주의 추세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국의 도덕철학 교수였던 애덤 스미스가 1776년 <국부론>을 저술을 마친 45년 후인 1821년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를 완성하였다. 두 사람 모두가 그리스도교적 사고를 한 사람이다. 다산에 대해서는 그의 배교를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지만, 다산의 <중용> 주석서인 <중용자잠>이나 <중용강의보>에 따르면 다산은 항상 하느님, 즉 상제(上帝)의 존재를 믿고 무신론자인 주자의 학설을 반박하는 해석을 했다는 사실에서 다산이 숨어 있던 그리스도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다산이 “진리의 위계”에서 맨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였고(바티칸 Ⅱ,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참조), 서학 연구를 통해 애덤 스미스와 같이 그리스도교적 사고를 했다는 것과 모든 착한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또한 전 세계 교회의 학자들은 몬타누스 이단으로 돌아선 테르툴리아누스의 글을 귀중한 것으로 인정하고 인용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적 사고를 한 위대한 학자인 다산 선생을 너무 냉혹하게 대하고 그분의 사회윤리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경제윤리의 실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많이 유행하는 말이 “착한 소비”와 “착한 기업”, “사회적 기업”이라는 말이다. 윤리적 소비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개인과 단체의 자산운용과 기업경영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은 경제활동 전 영역에 거친 것이고, 세속을 떠나 산속에서 수행하는 사람의 경우나 젖먹이 어린이도 의식주 문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소비생활이라는 최소한의 경제활동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위하고 있으니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활동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의 책무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이 그간 올바른 사회-경제 질서의 확립에 기여한 일들이 많았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과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기 위해서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책무를 이행함에 있어 모든 종교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인들도 나서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임하심”을 앞당기려 노력하면서 그 때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1베드 3:15)을 말과 행동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의 희망은 더 포괄적이고 큰 것이지만 여기서는 경제활동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쓸 당시에 존 웨슬리는 <돈의 사용>에 대한 설교로 사람의 몸과 정신을 해치는 중독성 있는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거나 파는데 연루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퀘이커 신도들이 사업을 함에 있어서 “이윤이 아니라 양심에 돈을 걸겠다.”(not for profit, but at the bidding of conscience)는 결단을 하고, 고객을 상대로 물건 값을 흥정하던 전통적인 관습을 버리고 상품마다 정가를 표시하기로 했을 때 그렇게 하면 망할 것이라던 대다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사업이 더욱 번성하였다고 전하면서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증명한 것일 뿐이라 했다.

 토인비는 상품에 정가를 표시한 상인들이 성공하여 모두 부자가 된 사실을 두고 “부자와 바늘귀” 생각을 하면서 이들이 “자신들의 미덕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같은 영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움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활동에 있어 이러한 윤리적 결단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토인비의 말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재탄생이 가능할까? 만약 우리가 니고데모와 같이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의 스승이 말한 대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요한 3: 3-5)

<필자 소개>

박상조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 공부하고,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정책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  천주교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중앙대 행정대학원 객원교수, (사)기업책임시민센터 이사장(2010-2014.3)을 역임하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이사로 있다.

저서로는 "인간중심발전론적 시각으로 본 대기업정책의 평가"(한국학술정보/2007), "기업의 사회적 책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사람인가 돈인가" (이담북스/2011), "경제시평 -무너지는 바벨탑 수리하기"(이담북스, 2014)가 있다. 2011.11부터 내일신문 에 경제시평을 기고하고 있다.

박상조  pxzsimon@g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